Psychology of Deficiency RAW novel - Chapter 7
7
해민은 매해 겨울이 시작되기 전마다 한바탕 크게 앓았다. 늘 그래 왔는데 올해는 별 기미가 없어서 웬일로 그냥 지나가려나 했다. 그러나 예외는 없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복도로 나오던 해민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걸 느꼈다. 손으로 이마를 짚자 뜨끈뜨끈했다. 미열이었다.
마침 주말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한결에게 옮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면 한결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아니 어쩌면 또 길모퉁이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같이 밥을 먹고 가볍게 입을 맞추다가 끌어안고 몸을 겹칠 텐데…… 감기를 옮기는 건 당연지사였다.
아프다고 밀어내면 한결은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밤샘 간호를 자처할 게 뻔했다. 그건 또 싫었다. 저 때문에 걱정하는 얼굴을 보는 건 피하고 싶어서 이번 주말에는 혼자 쉬겠다고 미리 연락을 보내려던 차였다.
[이번 주말에는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같이 못 있을 거 같아요. 괜찮아요?]한결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구구절절 돌려 말할 필요도 없고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응, 잘 다녀와.]언제나 그랬듯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날아들었다.
[주말 동안 뭐 할 거예요?]쉬어야지. 푹 쉬고 산뜻하게 나은 모습으로 다시 마주해야지.
죽 먹고 약 먹고 푹 자고, 그렇게 주말을 보내면 언제 앓기나 했냐는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익숙한 과정이었다.
[그냥 쉬려고.]액정 위로 엄지를 놀려 답장을 보내 놓고 집으로 귀가하던 중이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긴 진동이 이어지는 걸 보니 전화가 걸려 오는 모양이었다.
발신자는 안 봐도 뻔했다. 뭐 하면서 쉴 거냐고, 제가 없는데 정말 괜찮은 거 맞냐고, 보고 싶다고 한마디만 하면 당장 달려오겠다고 빈말을 늘어놓을 고한결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서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곧장 전화를 받았다. 해민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응.”
-…….
그런데 어쩐 일인지 건너편에선 아무런 말도 넘어오지 않았다. 해민은 순간 멈칫했다. 그대로 오피스텔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뒤늦게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 해민아.
익숙하지만 한없이 불편한 목소리가 낮게 내리깔렸다. 후우, 대답 대신 한숨이 먼저 나왔다.
“네, 아빠. 어쩐 일이세요?”
해민은 화단 턱에 살짝 걸터앉았다. 휴대폰을 쥔 손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반가워야 할 상대가 전혀 반갑지 않은 건,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을 이미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곧…… 졸업이지?
해민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대답했다.
– 그래. 취업 준비는 잘되어 가고?
“네, 잘 준비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 알지, 그럼. 해민이는 원래 혼자서도 잘 해내니까. 아빠는 걱정 안 해.
해민이 아랫입술을 슬쩍 당겨 물었다. 잘못 씹었는지 피비린내가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수없이 엎어지고 다시 일어남을 반복해야 했다. 손 내밀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매번 좌절을 맛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렇게 살아왔다. 일으켜 달라고 두 팔을 뻗은 적 없으니 아버지에게는 ‘원래부터 혼자 잘 해내는 딸’로 각인된 모양이었다.
– 해민아, 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아빠 사정이 요즘 좀 어렵다. 작은애는 이제 수험생이라 돈 들어갈 일밖에 없고, 큰애는 대학 들어가는데 아빠 된 도리로써 대학 등록금은 내줘야지 않겠니. 성인이 되자마자 빚을 지게 할 수는 없으니까.
대학에 들어가는 큰애, 수험생인 작은애. 해민에게 그런 동생들은 없었다. 얼굴도 모른다. 아버지가 새로 살림을 합친 여자의 자식들이었다.
– 그러니까 해민이 너라도 아빠 짐을 좀 덜어 줬으면 해. 아빠가 그동안 너한테 해 줄 만큼 해 줬잖아. 그렇지?
해 줄 만큼 해 줬다는 게 금전적인 도움이 전부라면, 그러했다. 부정할 순 없었다. 지금까지 어렵지 않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건 분명 부모덕이었다.
“네……. 그래요.”
– 좋은 회사에 취업하면 이제 네 이름으로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있을 거야. 요즘은 사회 초년생들 전세 대출도 잘 나온다던데, 미리 미리 알아보고…….
그는 힘겹게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죄책감 때문에 해민에게 마련해 주었던 원룸 오피스텔. 그 보증금이면 빠듯한 그의 형편에 필시 도움이 될 터였다.
짓씹었던 아랫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자 붉은 피가 살짝 묻어났다.
“알아보고 있어요. 취업도 꼭 할 거고.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그래, 그래. 아빠는 우리 해민이 믿어.
거짓말. 보증금을 빨리 돌려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전화한 거면서.
그 초조함이 전화 통화로도 절절하게 전해지는데 굳이 저를 위한다는 말로 포장하는 꼴이 우스웠다. 빈말로도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지금 좀 바빠서요.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사사건건 부딪치는 부모 아래서 눈치를 보며 견뎌 낸 건, 태어난 이상 살아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해민은 저 때문에 갈라서지 못하는 부모를 볼 때마다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두 분 모두 각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텐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해민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오로지 죄책감뿐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해민은 서둘러 죽을 끓였다. 그리고 자꾸만 넘어오려는 밥알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싹싹 긁어먹은 후에 약통에서 꺼낸 감기약을 꿀꺽 삼켰다.
‘아무렇지 않잖아. 전부 괜찮은 거잖아.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는데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렇게 수천 번이고 수만 번이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럼에도 불쑥불쑥 저를 원망하던 부모의 눈동자가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이 욱신거렸다. 언성을 높이며 싸울 때마다 구석에 쪼그려 앉은 어린 해민을 흘겨보던 서늘한 눈빛. 쟤는 어쩔 거냐며 소리 없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던 눈빛 말이다.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그들이 갈라서기 전까지 해민은 늘 마음에 부모를 향한 서운함을 품고 있었다. 그 싸늘한 눈빛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때마다 서운하고 속상했다. 그건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었던 어린 마음 때문이었다. 제게 핏줄을 물려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고.
그 탓에 해민은 일찍이 깨닫고 말았다.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클수록 서운함도 큰 법이라고. 서운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기대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이론적으로는 쉬웠다. 하지만 말랑말랑한 마음에 딱딱한 굳은살이 배기까지는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수차례 서운해하고 실망한 끝에 서서히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해민은 코트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결과의 대화 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액정 화면이 고한결이라도 되는 양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이번 주말에는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같이 못 있을 거 같아요. 괜찮아요?]“가야 할 곳이 어디라는 것쯤은 좀 알려 주지…….”
그러니까…… 서운했다. 몸이 아파서인지는 몰라도 연약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디에 있는 거냐고, 저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냐고, 지금 혼자 있기 싫은데 옆에 있어 주면 안 되냐고. 전송할 수 없는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이윽고 메신저 창을 닫고 침대 옆 협탁 서랍에 휴대폰을 넣어 두었다. 마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피를 키운 서운함을 꽁꽁 숨기듯이.
자꾸만 고한결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어지는 마음을 경계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끝날 관계니까. 순식간에 버팀목이 사라져 버리면 예전처럼 무너져 내릴 게 뻔하니까.
* * *
꼬박 하룻밤을 앓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열병은 다음 날이 되어서도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전날처럼 기계적으로 죽을 끓이고 약을 먹은 뒤 침대에 누웠다.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해민은 얼핏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사방이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창 너머로 어슴푸레 새어 드는 달빛이 전부였다.
“해민아.”
현관문 밖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해민은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바닥을 딛는 두 다리에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았다.
“서해민, 나 왔어.”
그럼에도 현관으로 달려 나간 건 고한결이 반가워서였다.
반갑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러움이 배가된다던데 해민에겐 익숙한 일이었고 서러워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이번에는, 유독…….
한결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요즘 유난히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건 전부 고한결 탓이었다.
해민을 침대에 눕힌 한결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과 목을 수건으로 연신 닦아 주었다.
어디가 아프냐, 언제부터 아팠냐, 괜찮은 거 맞냐, 약은 먹었냐. 걱정이 잔뜩 묻은 질문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기어이 이런 꼴을 보이는구나.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주말 동안 못 볼 거라더니 왜 갑자기 찾아온 건지.
게다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슈트 차림이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정시 출퇴근을 하는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아 비웃은 적도 있었는데, 이제 보니 잘 어울렸다. 심지어 굉장히…… 멋있었다.
이렇게 근사하게 빼입고 어디를 다녀온 걸까. 저는 혼자 병든 닭처럼 끙끙 앓고 있었는데. 스스로가 초라해짐과 동시에 떠오른 건 분명 질투였다. 한결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으니까 제가 아니어도 그의 옆에 있어 줄 사람은 차고 넘칠 것이었다.
해민은 발톱을 드러내려고 하는 질투심을 숨기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어디 다녀온 거야? 정장까지 차려입고.”
그는 깡시골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다고 했다. 저는 이렇게 아픈 상태로 침대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는데, 한결은 아무렇지 않게 가족들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는 사실에 뜨거운 무언가가 목 끝까지 불쑥 치밀었다. 그럼에도 씁쓸한 웃음을 내걸며 애써 서러움을 삼켰다.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는 제가 아픈 것도 몰랐을 테니까. 곁에 있어 달라고 손을 뻗지 않은 건 저였다. 그러니 그를 원망할 자격은 없었다. 더구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연애 상대일 뿐이니 일거수일투족을 저에게 보고할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찰박찰박 차오른 서운함과 질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터라 주체하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아직 약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정신마저 몽롱했다. 판단력이 흐려진 탓이었다. 제가 파자마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기 시작한 건.
“할래?”
한결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내면의 동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늘 제멋대로인 고한결이 제 행동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게. 마치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비틀린 마음이었다.
“어차피 우리 곧 있으면 안 볼 사이잖아.”
말을 보탤수록 한결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 갔다.
“그때까지 재미있게 놀면 그만이지, 왜 화를 내고 그래. 응?”
한편으로는 그를 시험대에 올린 고문관이 된 기분이었다. 내 부모도 외면한 나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완전한 남남이니, 그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하진 못할 거라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그냥 호기심이라면서.
목구멍 끝까지 치기와 오기가 치밀었다. 이래도 괜찮아? 이래도? 그렇게 고한결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나지막하게 욕을 짓씹은 한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한결이 이마에 올려 주고 간 수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제대로 쥐어짜지도 않았나 보다.
“하아…….”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스스로에게 분통이 터졌다. 이래서 마음에도 없는 연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마음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밀려드는 뜨거운 감정은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베푸는 법을 안다. 해민의 바닥은 텅 비어 있다 못해 퍼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아무리 퍼 주고 싶어도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가뭄 난 땅처럼 갈라져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쌓은 벽을 지키고 있는 게 전부였다.
* * *
매일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울려 대던 휴대폰은 요 며칠 잠잠하기만 했다. 한결과 다툰 다음 날인 일요일에도 해민은 병마와 씨름하느라 하루를 꼬박 앓았으며, 그다음 날인 월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학 생활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화요일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고한결이 끼어들기 이전의 일상과도 같았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리고 수요일이 돌아왔다. 한결과 같은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강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운 적이 있었던가. 해민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고한결을 마주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넬까.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까. 사르르 웃으면서 팔짱을 끼면 어이없다는 듯 웃어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쪽한테 부담 줄 정도로 거창한 감정은 아니고,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가벼운 호기심. 더 나아간다면 이성적인 호감. 딱 그 정도의 감정일 텐데.
이번 학기가 끝나면 한결과의 관계도 끝낼 생각이었다. 그 계획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시한부 연애가 아니었더라면 제 삶에 고한결을 들일 일도 없었을 거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을 거다.
언제 마침표를 찍게 될 줄 몰라 전전긍긍 속 끓이는 관계는 싫었다.
해민은 강의실로 들어서자마자 일부러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고한결이 시야에 들어와 있으면 온 신경을 빼앗길 테니까.
강의 시간에 다다르자 뒷자리가 어수선해졌다. 한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그 소리에 무심하게 대꾸하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에 귀가 바짝 곤두섰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한결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하지만 결코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강의 내내 등 뒤에 달라붙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민은 코트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땅만 보고 걸었다.
먼저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한결에게서 연락이 오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 줄 생각뿐이었다. 아직 약속한 기간이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여자 친구 노릇을 해 줘야겠다고. 훗날 되돌아봤을 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오피스텔로 꺾어지는 길모퉁이를 돌 때였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심장을 둥둥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눈앞엔 제 발끝과 부딪친 큼지막하고 새하얀 운동화 앞코가 보였다. 한결과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는 보고 싶어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뻔했는데.”
입술을 꽉 물었지만 그 틈새로 속절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한결의 말투가 반가워서.
해민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반질거리는 신발 끝에서 길게 뻗은 다리로, 넓게 펼쳐진 탄탄한 가슴팍에서 저를 설레게 했던 시원스러운 목울대까지.
숨을 짧게 집어삼킨 후에 고개를 젖히자, 드디어 한결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
해민의 입가에 희미하게 머물러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처럼 속없이 웃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한결의 얼굴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며칠 새에 눈에 띄게 살이 내렸다. 뾰족해진 턱 끝이 안쓰러웠다. 울컥, 뜨거운 무언가 목 끝까지 치밀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나 안 보고 싶었냐고요.”
“……싶었어.”
한결은 눈썹을 한데 모으며 해민의 입가로 제 귀를 바짝 들이밀었다.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다는 말에 해민은 꼬깃꼬깃 구겨진 마음을 비집어 꺼냈다.
“보고…… 싶었어.”
고한결이 보고 싶었다. 텅 빈 옆자리가 쓸쓸해서 미칠 것 같았다. 겨울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갈 때마다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기분이었다. 메마르고 건조할수록 상처는 쉽게 남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가슴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이 꽉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고한결을 의지하며 그에게 기대고 있다는 뜻이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해민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아픔도 크다는 건, 그동안의 학습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으니까.
“언행일치가 잘 안 되는 거 알죠?”
한결은 해민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더니 제 옆에 나란히 서서 걷게 했다. 그러나 전처럼 손깍지를 껴잡는다거나 제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준다거나 하는 친절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전보다 벌어진 심리적 거리를 실감케 했다.
“내가? 언행일치가 잘 안 돼?”
“그렇잖아요. 보고 싶었다면서 죽어도 먼저 연락하는 법은 없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나는…….”
한결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더니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쪽팔리잖아요.”
나도 쪽팔려. 그 말은 목구멍 너머로 꾹 눌러 삼켰다.
“개새끼 취급받았다고 혼자 화나서 뛰쳐나갔는데 먼저 연락하면…… 진짜 쪽팔리니까. 원맨쇼도 아니고…….”
“내가 언제 너를 개새……끼 취급 했다고 그래.”
“원래 가해자는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는 법이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몇 차례 도발을 했다. 그건 인정하는 바였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걸 아는데, 알면서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흔한 말이지만 생각보다 용기를 필요로 하는 말이었다.
가라앉은 침묵 속에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결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구 내핵까지 뚫고 들어갈 듯한 묵직한 한숨의 무게가 느껴졌다.
띵, 소리와 함께 1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어색함을 견딜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해민이 용기를 쥐어짜 내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낸 순간이었다.
“미……!”
“내 좆이 그렇게 맘에 들었어요?”
한결의 입술 사이로 뻗어 나온 말은 뾰족한 가시를 품고 해민의 가슴을 푹 찔렀다. 고개를 젖혀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전에 본 적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해민의 심장이 발치 아래로 쿵 떨어졌다. 불길한 기분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생각해 봤거든요.”
“…….”
“어차피 죽으면 백골이 진토 되어 사라질 육신인데, 아껴서 뭐 하나 싶더라고.”
잊고 있었다. 고한결은 상대의 기분을 진창으로 끌어 내리는 데 소질이 있다는 걸.
그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중이었다. 역지사지가 뭔지 보여 주기 위해 지금까지 말을 아끼고 있었던 건가 싶을 정도였다.
“못 알아들어요?”
“한결아…….”
“선배님을 위해서 열심히 굴러 드리겠다고요.”
“말 함부로 하지 마.”
“선배가 바란 게 이런 거 아니었어요?”
“……야.”
“아픈 몸으로 한번 하자던 사람치고는 태도 변화가 너무 급격한 거 아닌가.”
“너 입에 칼 물었어? 어디까지 가려고 이래?”
참다못한 해민이 언성을 높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지 쇠꼬챙이로 가슴을 지지고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제가 먼저 시작한 갈등이나 다름없기에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말이 이토록 아프게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다. 곧 닥쳐 올 이별의 아픔은 이보다 훨씬 클 것이 틀림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고한결이 제 안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통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크게 요동하는 낯선 감정에 두려움과 후회가 앞섰다.
애초에 그가 제안한 것 따위 해선 안 됐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제 울타리 안으로 들여선 안 됐는데…….
한결을 지나쳐 복도로 향하려던 발걸음이 단숨에 가로막혔다.
“어딜 가요.”
“비켜.”
반대편으로 옮겨 나아가려고 했던 걸음 또한 그에게 제지당했다.
“아직 안 끝났잖아요. 며칠 더 남았잖아. 그때까지 나 좀…….”
“이제 그만해.”
해민이 한결의 말허리를 끊어 내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나는 이제 그만할래, 한결아. 더는 못 하겠어.”
살결을 맞대고 몸을 섞을수록 한결을 향한 마음은 서서히 몸집을 부풀릴 게 뻔했다.
마음 없이 몸만 섞는 관계? 그런 건 해민에게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저와는 맞지 않는 사상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해민이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현관 앞에 다다라 도어 록을 해제하려는 순간, 등 뒤로 묵직한 무게감이 와 닿았다.
한결의 고개가 해민의 어깨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뜨거운 숨만 몰아쉬다가 힘겹게 꽉 잠긴 목을 울렸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한결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인해 해민의 내면엔 세찬 풍랑이 휘몰아쳤다.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오기도 하고, 금세 따뜻하게 달궈지기도 하고, 다시 차갑게 식기도 했다. 그 모든 게 고한결로 시작되어 고한결로 끝나는 게 문제였다.
“선배 아픈데 혼자 두고 나가 버린 것도 미안하고, 강의 시간에 계속 쳐다본 것도 미안하고, 멋대로 선배 눈앞에 나타난 것도 미안하고, 방금 나쁘게 지껄인 것도 미안해요. 내가 진짜 다 잘못했으니까…….”
“…….”
“그만하자거나 끝내자는 그런 말…… 안 하면 안 돼?”
머리가 어찔했다. 겨우 가라앉힌 미열이 슬금슬금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한결아, 너 잘못한 거 없어.”
잘못은 이쪽이 먼저 했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한테 서운해하거나 질투를 내비쳐선 안 됐던 거다. 그가 베푸는 호의에 고마워해야 마땅했다. 함부로 그에게 기대하고, 기대고, 서운해하고, 마음을 키운 제 탓이었다.
그를 향한 감정이 무거워질수록 점점 더 무서워졌다. 먼저 뒤돌아설 그의 등을 보는 게 끔찍하리만치 무서웠다. 고한결의 뒷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만하자.”
언젠간 받을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 * *
기말고사 기간이 코앞에 닥쳤다. 그동안 답지 않게 공부를 게을리했던 해민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해민은 늦은 시간까지 중앙 도서관에서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눈이 뻑뻑해지고 카페인 효과도 다 떨어졌을 때쯤 자리를 정리하고 교정을 나섰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한겨울 추위를 견디기엔 모자랐다. 패딩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언젠가 한결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술집이 모여 있는 번화가를 가로질러 가면 더 빠르게 집에 도착할 수 있다던.
‘그 족발집 알아요? 거긴 손님이 별로 없는데 맛은 제법 괜찮거든요. 나만 알고 싶어서 아무한테나 말 안 해 주는데…… 선배한테만 특별히 얘기해 주는 거예요.’
‘껍데기집? 존나 번잡하고 위생 상태도 최악. 웬만하면 가지 마요. 어차피 갈 일도 없겠지만.’
‘아, 거기 곱창. 그냥 그래요. 싼 게 비지떡이라 애들이 허구한 날 죽치고 있긴 한데.’
그 뒤에 이어졌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귓가에 선명하게 맴돌았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번화가로 향했다.
글씨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공부하겠다고 앉아 있던 시간 중 고한결 생각을 하느라 절반을 흘려보냈다.
우스웠다. 먼저 그만두자 말하고 등을 돌린 건 저인데. 미련하게 털어 내지 못하는 마음이 넝마처럼 너울댔다.
그래도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런 시간은 꼭 필요했다. 옆에 누군가 없어도 저 혼자 오롯이 감내하는 연습. 살아오는 내내 해 왔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말을 보기 좋게 부정했었다. 난 자리보다 든 자리가 훨씬 불편하고 어색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조상님들 말씀은 틀린 거 하나 없다고.
번화가를 가로지르면서 우스운 생각이 줄줄이 이어졌다. 어쩌면 우연히 고한결을 마주칠 수도 있겠다고. 그러면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니다, 한결이 먼저 무시하고 지나칠지도 모르니까 그런 기대는 안 하는 게 낫겠다.
패딩을 목 끝까지 채워 새빨개진 코를 완전히 덮은 채 고깃집 앞을 지나칠 때였다. 해민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려다 다시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리문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 멀리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수려한 이목구비가 여전했다.
한결은 검은색 블루종 하나만 걸친 채 테이블을 둘러싼 제 친구들에게 무어라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 앉은 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한결은 한쪽 입꼬리만 씩 올려 살짝 웃고 만다. 그러다가 소주잔을 단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더니, 고기를 집어 먹는다. 해민은 정갈하게 젓가락질하는 한결의 손끝을 눈으로 좇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얼굴 살이 더 내렸다.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걸 보면 밥을 먹긴 하나 본데, 왜 자꾸 살이 빠지는 걸까.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추울 텐데…….”
목덜미가 휑해서 보는 사람이 다 시릴 정도였다. 목 티라도 껴입지. 목도리는 챙겨 다니나. 설마 블루종 위에 아무것도 안 걸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이 날씨에 얼어 죽겠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시답잖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였다. 가게 출입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담뱃불을 붙이다가 해민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키웠다.
“어? 서해민 선배님?”
신승협이었다. 학식에서 한결과 함께 밥을 먹을 때 나타났던 그의 친구였다. 해민은 들켜선 안 될 모습을 들킨 사람처럼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어…… 안녕.”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
“한결이 보러 온 건 아니고요?”
“아니지. 당연히…….”
집에 가는 길이었다. 물론 우연히 보게 된 고한결 때문에 발이 묶였지만.
“아, 난 또.”
“응? 왜?”
“한결이랑 선배님이랑 사귄다는 소문이 파다하잖아요.”
그 소문이라면 익히 알고 있었다. 그와 만나 보기로 결심하기도 전, 한결이 해민을 졸졸 따라다닐 때부터 무성한 소문이 피어났다. 경영관과 가장 멀리 떨어진 미대까지 퍼졌을 정도니까 당사자인 제가 모를 리 없었다.
“학식이면 진저리를 치는 놈이 선배랑 같이 학식 먹을 때 저는 이미 눈치 깠거든요? 근데 고한결한테 아무리 물어봐도 절대 입 벙긋 안하더라고요. 실실 쪼개기만 하고.”
해민은 아랫입술을 꽉 물며 고개를 떨구곤 운동화 앞코로 바닥에 동그라미만 연신 그려 댔다.
“……아니야, 그런 거. 그냥 한결이가 나를 좀 챙겨 준 것뿐이야.”
“저 새끼가 누굴 챙겨 줄 놈이 아닌데요.”
그건 그렇지.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걸음을 떼면 그만인데, 왠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한결이 목도리를 두르고 다니는지, 감기 걸리지 않게 잘 챙겨 입고 다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만 죽였다.
담배를 피워 대던 승협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선배는 곧 졸업이시죠? 취업 준비 빡세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한결이랑 친하니까 슬쩍 부탁 한번 해 보세요. 공채는 어려워도 인턴 정도는 쟤 입김으로 충분히 가능할 텐데.”
“무슨 부탁?”
뜻 모를 말에 해민이 눈을 올렸다. 승협을 바라보자, 그는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한결이가 신양 그룹 외손자잖아요.”
“아, 그렇…… 어?”
해민의 두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얘가 날 놀리나?’였다. 그러나 승협의 표정은 진지했다.
“모르셨어요?”
“…….”
“와. 진짜 모르셨나 보네.”
아무렇지 않게 취업 청탁 비리를 종용하는 태도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고한결이 신양 그룹의 외손자라는 거였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멍청한 물음을 던졌다.
“쟤 고씨잖아. 신양 그룹 회장은 윤씨인데?”
“……외손자라고요, 외손자. 게다가 거기 회장님은 한결이 할머니시고요.”
아, 그렇지. 맞네. 멍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해민은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고한결을 만나면서 그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도 없었나 싶어서. 정녕 허울뿐인 관계였나 싶어서. 남들 다 아는 걸 저만 모르고 있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의미로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겨우 혼란스러움을 갈무리한 해민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승협에게 안녕을 고했다.
“저기, 승협아.”
“오, 이제 제 이름 기억해 주시네요.”
“한결이한테는 나 마주쳤다고 말하지 말아 줘.”
“비밀이에요?”
“응, 비밀이야. 꼭 지켜 줘.”
해민은 입술 위에 검지를 일자로 갖다 대며 속닥거렸다. 괜히 그의 귀에 제 이름이 흘러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면 해서였다. 안 그래도 저를 떠올리면 짜증 나고 불쾌하기만 할 텐데, 장작을 지피고 싶진 않았다. 한결을 들쑤셔 봤자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결국 저였다.
집으로 돌아온 해민은 씻고 나오자마자 랩탑을 펼쳤다. 하려고 했던 일들을 전부 미루고 포털 사이트 창을 열었다.
검색 창에 ‘신양 그룹’을 적어 넣었다. 검색 버튼을 누르자 방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기업 정보라면 이미 줄줄 외울 만큼 알고 있으니 가볍게 넘겼다. ‘오너 일가’ 링크를 누르자 새 창이 떴다.
누군가 보기 좋게 정리해 놓은 가계도였다. 세상 참 좋아졌다. 남의 집안 사정을 클릭 몇 번으로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고한결〉
스크롤을 쭉 내리자 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말도 안 돼.”
해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해민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혹시 동명이라 승협이 장난친 건 아닐까? 그러나 아스라이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그의 말에 확신을 더했다.
‘너는? 졸업이 멀어서 거기까진 아직 생각 안 해 봤으려나?’
‘나는…… 신양 들어갈 건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되돌아왔던 한결의 대답. 그때 해민은 비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발로였다. 순간 귀 끝이 화끈 달아올랐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한결의 이름 위에 ‘고윤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신양 그룹 계열사인 영화 배급사 ‘시네마박스’의 대표였다.
‘영화가 얼마나 재미없으면 말이야. 어? 이거 안 되겠네. 누가 만든 거야, 이거. 욕이라도 퍼부어 줘야지.’
그때 한결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휴대폰을 쥐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 것처럼 굴었다. 정말 형에게 연락을 넣을 생각이었을까. 곱씹다 보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의 취미와도 단번에 연결되었다.
“와…… 감쪽같이 속였어.”
당연히 의도적으로 숨긴 건 아니었을 거다. 제가 묻지 않았으니 굳이 말하지 않았던 거겠지.
해민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침대 위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거렸다.
그와 천지 차이 나는 재력쯤이야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당장 취업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저와는 완연히 다른 신분이라는 것에 낙담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아쉬움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이왕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거면, 고한결에 대해 알아 가려는 노력이라도 해 볼걸. 평범한 연인들처럼 어떠한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릴 때 모습이 궁금하다고 사진이라도 보여 주면 안 되냐고 말이나 꺼내 볼걸.
어린 고한결이 궁금했다. 아니, 사실은 그에 대한 모든 게 궁금했다. 그래도 꾹 눌러 삼켰던 건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끝날 관계니까 입 안에서만 맴도는 호기심을 끝내 꺼내지 않았다.
만약 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면, 한결도 해민에 대해 물어 왔을 거다. 그럼 사실 굉장히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눈칫밥을 하도 많이 먹어서 아직도 배가 부르다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졌을 거다.
그래서…… 그래서 진지하고 무거운 관계가 어렵다고, 너한테 감정을 내보이는 게 너무 힘들고 무섭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뭐가 달라졌을까. 한결은 한강 둔치에서 말했던 것처럼 저는 부담을 떠안을 만큼 대단한 감정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을까? 아니면 저에게 기대도 된다고 너른 어깨를 내줬을까?
전부 쓸데없는 가정이었다.
해민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고한결과 끝이 났다. 더는 볼 일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넝마처럼 너절하게 늘어져 있는 미련을 털어 내고 다시 제 갈 길을 가야 했다. 그게 다였다.
* * *
기말고사가 끝나면 마지막 학기도 끝이 난다. 지긋지긋한 캠퍼스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시험을 보고, 또 남은 시험을 위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요즘 해민의 일과였다.
짙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짐을 챙겨 도서관 건물을 빠져나온 해민은 걸음을 재촉했다. 하도 많은 양의 지식을 머리에 욱여넣다 보니 과부화가 온 듯했다. 공부하는 동안 칼로리를 많이 소모했는지 배도 고프고 춥기도 몹시 추웠다.
“누나.”
순간 저를 향해 날아든 부름에 해민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벽에 기대어 서서 저를 부른 사람은 이도한이었다. 해민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도한은 느리게 몸을 움직여 다가왔다.
“그렇게 안 봤는데.”
“…….”
“누나 되게 야망 있는 여자였네요.”
도한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기울어졌다. 시퍼렇게 날이 선 눈에 이채가 어렸다. 원망, 분노, 자격지심, 뭐 그런 종류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씨발, 난 까맣게 몰랐지. 사람들이랑 말도 안 섞고 공부만 존나 열심히 해 대길래 그냥 착하기만 한 범생인가 했지. 근데 돈 많고 잘생기고 어린 새끼 만나려고 그딴 코스프레하고 다닌 거였구나.”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래서 고한결 그 씹새끼한테 대 줬어? 취업 보장, 뭐 그딴 거 해 준댔나? 아니면 한번 붙어먹을 때마다 거하게 당겼어요?”
이제껏 시건방진 말버릇으로는 고한결을 이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만한 착각이었다. 이도한의 입에서 나오는 건 말이 아니라 칼날이었다.
해민은 연신 헛숨을 터뜨리다가 이런 비이성적인 인간과는 대거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스쳐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손목이 꽉 붙들렸다.
“아아……!”
온몸이 휘청거렸다. 해민이 겨우 중심을 되찾고 바로 섰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도한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없었던 일로 쳐줄게요.”
“뭐?”
“고한결이랑 붙어먹었던 거, 다 없던 일 쳐줄 테니까 나랑 다시 만나자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너랑 왜 다시 만나!”
“왜요? 나는 별 볼 일 없는 새끼라 안 된다 이건가?”
이도한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어른스럽고 다정한 태도로 환심을 사던 그의 가면이 벗겨졌다. 고스란히 드러난 민낯은 추악하기만 했다. 짐짓 살의까지 느껴지는 바람에 해민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고한결이 너 좋아서 만나는 거 같아? 개같은 소리지. 그 새끼 소시오패스야. 네가 존나 고고하게 구니까 궁금해서 슬쩍 건드려 본 것뿐이라고.”
“……놔.”
해민은 어금니를 으득 물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이미 눈이 돌아 이성을 잃은 그가 해민의 말을 들어 줄 리 만무했다. 해민이 힘을 주어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고 해 보았지만 성인 남성의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주제 파악 좀 하세요. 똑똑한 줄 알았더니 순 맹추네? 그 새끼, 앞길이 뻥 뚫린 고속 도로에다가 쟁쟁한 기업 여식들이 줄을 서서 대기 중인데 너 같은 게 가당키나 해?”
“놔! 놓으라고 했어!”
“야, 서해민, 잘 들어.”
손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둔통이 온몸으로 저릿하게 퍼져 나갔다.
이도한이 하는 말은 전부 귓등으로 흘려들으려고 했다. 하지만 콕콕 날아와 심장에 박히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제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한결이 너 갖고 노는 거라고! 알아들어? 사랑은 무슨.”
“나도 알……!”
순간 눈앞으로 커다랗고 단단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퍼억,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텅 빈 교정을 울렸다.
손목에 달라붙어 있던 억센 악력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니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이도한이 아스팔트 바닥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너는 사랑이 뭔지 존나 잘 알아서 좆을 헤프게 놀리고 다니는구나, 이 창놈 새끼야.”
이도한의 위에 올라타 그의 얼굴을 강타하고 있는 사람이 고한결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시야에 뿌연 안개가 낀 탓이었다. 고한결이 널 좋아해서 만나는 거 같냐는 이도한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서서히 차오르던 눈물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해민은 소매로 겨우 문질러 닦아 냈다.
“한결아…….”
맥이 탁 풀렸다. 이도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서가 아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고한결이 제 눈앞에 나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