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logy of Deficiency RAW novel - Chapter 8
8
처음에는 분명 호기심이었다.
이제 막 미성년에서 탈피한 이들의 달뜬 열기로 휩싸인 캠퍼스에서 시뻘건 독기를 품은 서해민은 유독 돋보였다.
성인의 자유를 누리는 학생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험생의 연장선을 밟고 있는 서해민의 하루 일과는 단조로웠다. 집, 강의실, 도서관, 집. 그런 서해민이 자꾸만 제 신경을 긁어 대는 이유가 대체 뭔지 궁금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오기와 뒤섞인 승부욕이었다.
아무리 옆에서 깔짝거리며 따라붙어도 서해민에게서 돌아오는 건 난처한 얼굴과 눈빛뿐이었다.
서해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저만치 밀려난 엑스트라가 된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시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도 뻘짓을 해 댔다.
이윽고 입술을 맞추며 서해민의 연애 상대가 되었다는 걸 확인받았을 때는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고 험한 산 정상에 깃발을 꽂은 기분이었다. 비록 유효 기간이 있는 연애였음에도 충분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곧 사그라들 감정이라고 여겼으니까.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
서해민의 작은 날갯짓이 반대편에 있는 고한결에게 거대한 태풍을 불러일으켰다. 실수로 발을 디딘 늪지대는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서해민의 얼굴만 봐도 발정했고, 제 시야 안에 해민이 없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에게 엉망으로 휘둘리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곧 있으면 안 볼 사이잖아.’
해민이 여상하게 뱉은 그 말은 주말 내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한숨도 자지 못해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그 말만은 또렷하게 떠올라 머릿속을 휘저어 댔다.
높낮이 없이 평온하기만 한 목소리와 아파서 해쓱해진 얼굴,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묵직한 공기와 집 안 풍경까지. 어느 하나 선명하지 않은 게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주말이었다.
* * *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됐다. 영영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늪지대가 고한결을 뱉어 냈다. 다시 걸음을 돌려 원래 가던 길을 걸으면 되는 거였다. 간단했다. 고작 세 달도 채우지 못한 일탈이 막을 내렸다.
월요일. 무리에 둘러싸여 캠퍼스를 거닐었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을 메우려고 일부러 말도 많이 하고 밥도 많이 먹었다. 혼자 남겨지면 공허한 기분에 집어삼켜질까 봐 사람들 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자꾸만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한결은 하염없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화요일. 전날과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일상으로 돌아가면 금세 지워질 줄 알았던 서해민의 목소리는 오히려 소음을 거스르려는 듯 점점 또렷해졌다. 좆같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이들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게 거슬렸다.
오랜만에 찾은 동아리 방은 여전히 썰렁했다.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여 대며 얼쩡거리는 녀석들이 거슬리고 짜증 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이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지 않을까 해서.
실내를 빙 둘러보았다. 구색이라도 맞출 요량으로 둔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써 놓은 제 글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건 동아리 부장이 쓴 거야?’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별안간 질문을 던졌던 해민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다. 그때 해민은 제가 썼다고 하니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어설픈 칭찬을 보탰었다.
‘아…… 그래? 글씨 예쁘네.’
나도 내 글씨체 개같은 거 다 아는데…….
해민이 랩탑을 펼쳐 놓았던 테이블, 해민이 앉아 있던 의자, 혹시나 방해될까 봐 숨을 죽이고 자그마한 등을 지켜보며 누워 있었던 소파. 눈길이 닿는 곳곳에 서해민의 환영이 가득했다.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 오는 게 몹쓸 병이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정의 정체가 뭔지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은데, 정작 그 감정의 물꼬를 터 준 해민은 곁에 없었다.
한결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의자를 끌어와 창틀에 팔을 괴고 앉았다. 하하 호호 웃으며 캠퍼스를 거니는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바닥을 기고 있는 제 기분과 선명하게 대비되어서, 저만 빼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온전한 시각을 되찾는 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가물가물한 시야 안에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들어왔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제 가슴 언저리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서해……민…….”
저도 모르게 창밖을 향해 이름을 내지르려다가 입 안으로 주워 담았다.
기시감이 일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그땐 긴 고민 없이 흔쾌히 해민의 뒤에 따라붙었었다. 가벼운 호기심이 전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걸음이 붙들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해민을 향한 감정의 무게가 무거워진 만큼 발걸음에도 무게가 실리는 모양이었다.
수요일. 강의 내내 맨 앞자리에 앉은 동그란 뒤통수에 줄곧 시선을 두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서해민이 맨 앞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뚫어져라 쳐다보지도 못했을 테니까.
교수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해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뾰족한 무언가가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아직도 가방 안에는 지난날 말을 붙여 볼 요량으로 해민에게 빌렸던 펜들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펜을 돌려주겠다고 말을 건네 볼까.
우스웠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한 사이에 대화를 나누려면 이따위 빌미가 필요하다는 게.
책상 위에 펜을 늘어놓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사이, 해민은 그의 시야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 * *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염없이 해민을 기다렸던 길모퉁이에서 홀린 듯 걸음이 붙들렸다. 한결은 벽에 기대어 서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언젠가 몰래 찍어 두었던 해민의 강의 시간표가 화면에 떠 있었다.
오늘도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만날 수 있을까. 해민이 늘 오가는 길이니 마주칠 수는 있을 거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 교수님만 쳐다보고 있던 뒤통수 말고, 저를 향해 웃어 주는 말간 얼굴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전화를 해 볼까. 그렇게 한참 동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와서 귀를 쫑긋 세웠다. 빠르지만 규칙적인 발걸음이다가오고 있었다.
그 걸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번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걸음의 주인은 고개를 떨군 채 땅만 바라보았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제 입술 틈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볼품없게도 꽉 잠겨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말갛게 웃는 해민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힘겹게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보고 싶어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뻔했는데.”
그런데 저를 보는 해민의 눈꼬리가 축 내려가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해. 울고 싶은 건 난데.
“보고…… 싶었어.”
그런 얼굴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잘도 믿겠다. 억지로 받아 낸 대답에 후련해지기는커녕 흙더미를 집어삼킨 것처럼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한결은 쪽팔려서 먼저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무서웠다. 또 서해민이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밀려날까 봐. 어차피 곧 끝날 사이 아니냐며 사실을 적시해 주면, 이번에는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해민은 저를 보지 않았다. 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할래?’
파자마 단추를 풀어 내리며 해민이 했던 말이 연신 가슴을 두드렸다. 사실 못 할 것도 없었다. 해민의 말마따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그 말에 화가 나는 게 이상한 거였다.
생각해 보니 서해민은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눈이 마주치면 성적인 흥분에 사로잡혀 몸을 겹치는 사이였고, 곧 끝날 사이인 것도 맞았다. 애초에 이 관계에 유효 기간조차 없었더라면 해민은 저를 그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도 않았을 거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일어난 건 제 자신이 서해민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고부터였다.
그런데…… 우리 아직 안 끝났잖아.
“내 좆이 그렇게 맘에 들었어요?”
갈증을 채우기 위해 바닷물을 삼키는 꼴이었다. 언젠간 끝날 관계라면 그 끝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만 들키지 않는다면 몸만 섞는 관계는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자꾸만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아픈 몸으로 한번 하자던 사람치고는 태도 변화가 너무 급격한 거 아닌가.”
해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기대했던 바가 아니었다. 한결은 여지없이 달아나려는 해민을 가로막았다.
“이제 그만해.”
힘겹게 버티고 있던 바닥이 정처 없이 무너져 내렸다. 발치 아래로 떨어진 심장이 진창을 나뒹굴고 있었다. 결코 들어선 안 될 말이 기어이 해민의 입에서 흘러나온 탓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할래, 한결아. 더는 못 하겠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헤아려 볼 틈도 없었다. 조급해진 탓에 앞뒤 가릴 것도 없이 해민의 뒤를 쫓았다.
해민이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면, 이 어긋난 관계마저 영영 끝날 것 같아서 두려웠다.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견고한 벽을 허물기 위한 발악이었다. 한 번도 굽혀 본 적 없는 자존심을 제 손으로 구깃구깃하게 구겨뜨렸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고작 가벼운 호기심 따위로 서해민의 옆자리를 탐내선 안됐다. 지독한 오만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진짜 다 잘못했으니까 그런 말…… 안 하면 안 돼?”
누군가에게 내비쳐 본 적 없는 보잘것없는 감정이었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이었다. 내성이 없어서 휘두르기는커녕 휘둘리기만 했다.
자각하기까지 오랜 머뭇거림이 필요했다. 이미 커다랗게 부피를 키운 마음은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
“한결아, 너 잘못한 거 없어.”
돌아온 대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니까 그만하자.”
모래알처럼 붙잡을수록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서해민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넋이 나간 채로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요일 감각도, 계절 감각도 무뎌졌다. 손에 잡히는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나가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말을 얹었다.
“고한결, 정신 나갔냐? 춥지도 않아?”
“알 바냐?”
안에서 휘몰아치는 한파가 너무 싸늘해서 상대적으로 바깥의 기온은 춥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서해민처럼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하며 강의를 따라가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강의는 꼬박꼬박 출석했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허무주의는 일종의 회피 전략이라던데 그 의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서해민이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해가 지면 술자리에 나가 궤짝으로 술을 퍼마시고, 해가 뜨면 눈을 감으며 현실을 회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메시지 앱에는 여전히 999+ 빨간 배지가 떠올라 있었고, 으레 그랬듯 그중 해민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답장이 돌아올 때까지 연거푸 메시지를 보내는 짓도 이제는 할 수 없었다.
‘그만하자.’
곱씹을수록 또렷하게 들려오는 해민의 목소리. 차마 끝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 아직 안 끝났잖아. 아직 끝 아니야. 그렇게 속으로 되새김질하며 스스로에게 거지 같은 위안을 건넬 뿐이었다.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식당이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고기인지 고무인지도 모를 정도로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말을 던지며 술잔만 들이켰다.
문득 가게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익숙한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새하얀 패딩에 파묻혀 있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서해민에게 길들여진 파블로프의 개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고한결! 어디 가!”
등 뒤에서 신승협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한 서해민의 발걸음은 몹시 빨랐다. 누군가와 발 맞춰 걸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저와 걸을 때도 종종 걸음이 빨라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깍지를 껴잡고 손을 흔들면, 어설프게나마 발을 맞춰 주곤 했다.
성큼성큼, 한결은 보폭을 크게 하며 해민의 뒤를 밟았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는 건지 도통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손을 뻗으면 해민의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였다.
“네, 아빠.”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해민의 어깨가 눈에 띄게 축 쳐졌다. 해민이 우뚝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한결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해민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혀 올렸다. 한숨을 내쉬는지 새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빠,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물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서해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앞에 그려졌다. 해민의 한숨이 깊어질수록 한결의 미간에 그어진 선 또한 서서히 깊어졌다.
“나 아직 시험도 남아 있고, 졸업은 하지도 않았고, 상반기 공채까지는 더 멀었어요. 눈앞에 놓인 산도 까마득해 죽겠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한 맺힌 응어리를 꺼내 뱉은 해민은 휴대폰을 주머니로 찔러 넣더니, 패딩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한결이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해민은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부모님은 이혼하고 각자 제 살길 찾아 사느라 바쁘지, 친구는 없지. 외로울 때 기댈 수 있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좀 나으려나 싶었는데, 멍청하게 뒤통수만 거하게 얻어맞고…….’
언젠가 술에 취한 해민이 푸념하듯 늘어놓았던 말이 아스라이 머리를 스쳤다. 이제야 해민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새삼 떠올라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눈앞에 놓인 까마득한 산, 홀로 겨우 버텨 내고 있는 해민을 닦달하는 부모.
한결은 차마 해민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무겁게 짊어진 짐에 저까지 보탤 수는 없어서. 그 연약한 어깨에 티끌만 한 무게라도 실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말 잘 듣는 개처럼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평생 해 본 적 없는 배려와 인내를, 난생 처음 좋아하게 된 서해민을 위해 베풀어 보기로 했다. 적어도 눈앞에 놓인 산을 해민이 혼자만의 힘으로 넘어설 때까지.
그들의 관계를 끝내기로 한 그 지점이 또 다른 시작점이 되기를 바라면서.
* * *
출석하기를 관두었던 강의도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공강에는 동아리 방에 처박혀 경영관과 학식, 카페 주변을 맴도는 해민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매일같이 중도 앞에 차를 세워 놓은 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해민을 기다렸고, 무사히 귀가하는 뒷모습을 몰래 훔쳐봤다.
음침한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서해민을 보지 못하면 삶이 나락으로 처박힐 것 같아서였다. 혼자 정해 둔 디데이가 올 때까진 가만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서해민의 껍데기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것을 힘겹게 뚫고 들어가니 탐스러운 과육이 그를 맞이했다. 달큼한 향에 취해 한껏 음미하다 보니, 그 아래 또 빌어먹게 단단한 껍질이 나왔다. 이건 뭐, 지권의 층상 구조도 아니고. 서해민의 내면, 그 중심으로 향하는 길은 퍽 고단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해민은 수석 졸업이라도 할 기세로 도서관에서 꼬박 반나절을 보냈다. 한결은 건물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고 건물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해민을 놓칠까 봐서.
한참이 지나자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해민이 보였다. 반가움에 꼬리라도 살랑살랑 흔들고 싶었으나, 인내심을 십분 발휘해 참아 보기로 했다.
그런데 해민의 발걸음을 막아서는 어둑한 인영이 보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운전석에서 튀어 나간 한결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해민의 가느다란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고 있는 이도한의 손이 보인 순간, 발등에 떨어진 불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씨발, 손에 쥐면 부러질까 무서워서 나도 함부로 못 잡는 걸.’
발에 치이는 돌멩이 중 손아귀에 알맞게 들어오는 하나를 들어 꽉 움켜쥐었다.
“고한결이 너 갖고 노는 거라고! 알아들어? 사랑은 무슨.”
“나도 알……!”
나도 알긴 뭘 알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다. 퍼억,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이도한이 저 멀리로 떨어져 나갔다. 그의 얼굴을 가격한 주먹에 힘이 실렸다. 윤결이 알려 준 삶의 지혜였다. 손에 무언가를 세게 움켜쥐면 악력이 강해져서 때릴 때 힘이 더해진다고.
“아, 그렇구나. 너는 사랑이 뭔지 존나 잘 알아서 좆을 헤프게 놀리고 다니는구나. 이 창놈 새끼야.”
그러고는 볼썽사납게 나뒹구는 이도한의 위에 올라타 흠씬 두들겨 팼다.
사람한테 주먹을 휘둘러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인성이 된 사람들은 한결을 긁어 대는 일이 없었고, 인성이 덜 된 새끼들은 굳이 나서서 권력을 과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넙죽 기었다. 주위엔 뭐라도 얻어 보고자 손을 비벼 대며 비위를 맞추는 놈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중 눈에 띄게 개 노릇을 자처하는 새끼가 바로 이도한이었다.
뜨겁게 끓던 속이 펑 터졌음에도 오히려 기분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꽉 그러쥔 주먹은 규칙적으로 이도한의 얼굴을 강타했다.
“도한아, 숨! 숨 쉬어야지.”
기절하듯 늘어진 그의 얼굴을 툭툭 치자 도한이 쿨럭쿨럭 피를 뱉어 내며 눈꺼풀을 올려 뜬다. 그렇지, 이대로 죽으면 안 되지. 더 맞아야 하는데.
“내가 그동안, 너랑 좀 어울려 주니까, 아주 개, 호구 같았어? 응?”
한 음절 한 음절 짓씹듯 내뱉을 때마다 주먹이 앞섰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이도한은 입 한번 벙긋하지 못했다.
서해민한텐 잘만 싸지르던 주둥이를 영영 다물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의 멱살을 쥔 채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너 불쌍해서 그런 거야, 불쌍해서. 찌질하고 거지 같은 새끼가 인성까지 바닥이라 불쌍해서. 어? 죽을 때까지 시궁창 인생일 게 뻔해서. 도한아, 알아들어?”
피떡이 된 그를 발로 지그시 밟아 주려고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등 뒤에서 옷자락을 살며시 끌어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해민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한결아…….”
해민이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른다. 혼탁했던 시야에 해민이 담기자, 가슴이 아릿하게 조여 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가자, 응? 한결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해민을 꼭 안아 주고 싶었다.
한결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피 맛이 올라왔다. 엄지로 입술 끝을 쓸어내리며 낮게 읊조렸다.
“알긴 뭘 알아요.”
“한결아, 얼른. 응? 얼른 가자.”
“갖고 놀긴 누가 널 갖고 놀아, 서해민. 너 때문에 하루하루 피가 바짝 말라 가는데, 그게 갖고 노는 거야?”
해민이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한결을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애틋한 마음이 넘실대는 해민의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그런 거.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러니까 집에 가서 얘기하자.”
해민은 한결의 옷자락을 꽉 붙든 채로 사방을 둘러보며 한결의 차를 찾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누르자 가까운 곳에서 헤드라이트가 깜빡였다. 해민이 그의 손에 쥔 차 키를 단숨에 낚아채 갔다.
“너 손 아프잖아. 내가 운전할게.”
주먹을 펴자 꽉 쥐고 있던 돌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바닥에 깊이 파인 상처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면허는 있고?”
해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결의 등을 떠밀어 조수석에 앉히더니 차체를 빙 돌아가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해민이 서투른 손길로 시동 버튼을 누르더니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한결은 백미러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이도한이 보였다. 건물 안에서 나온 누군가 그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좆같은 새끼. 깽값도 아까운 새끼. 조만간 고윤결에게 불려 가게 생겼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결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해민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핸들에 상체를 바짝 붙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초보 운전이었다. 오 분도 안 돼 도착할 장소에 이 속도라면 오십 분은 족히 걸릴 듯했다. 운전면허 학원에서 모는 누리끼리한 자동차도 이보다는 빠를 거였다.
“……밟아요.”
해민은 초조하게 입술을 맞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으니까 밟아. 알아서들 피해 가니까.”
세상에서 가장 느린 스포츠카에 몸을 실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서해민과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으니까. 서서히 차오르는 안도감에 그동안 머릿속을 부유했던 모든 상념이 가라앉았다.
한결은 아예 몸을 반쯤 틀어 해민의 옆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동안 못 봤던 만큼 세밀하게 눈에 새겨 넣을 작정이었다.
해민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수차례 감쳐물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쟤 죽으면 어떡해?”
“안 죽어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원래 가해자는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모른다며.”
“나는 모르는 거 없어. 다 알아.”
“…….”
“숨넘어가기 직전까지만 때렸어. 괜찮아.”
해민이 한결을 슬쩍 곁눈질했다.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눈빛이었다.
“틀어 앉지 말고 똑바로 앉아. 그러다 사고 나면 많이 다쳐.”
“이 속도로는 사고 나도 아무도 안 다쳐요.”
끽해야 차 겉면만 슬쩍 긁히고 말겠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안 그래도 힘들고 복잡한 사정에 제 멋대로 끼어들어서 미안하다고. 처음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해서 미안하다고. 이렇게 쉽게 끝날 줄 알았다면 집에서 몸만 겹치는 게 아니라 야외 데이트도 많이 하고, 근사한 식사도 많이 사 줄 걸 그랬다고. 서해민만 보면 정신 못 차리고 눈깔이 홱 뒤집혀서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어요.”
그보다 더 크게 자리하고 있던 감정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해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도.”
힘겹게 떨어진 말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죽어 있던 심장이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늑골을 뚫고 나올 기세로 세차게 요동했다.
“그럴 거면서 왜 그만하자고 했어요?”
붉고 도톰한 해민의 입술이 다시 꾹 다물렸다. 말을 고르는 중인지 얇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무어라 말하려 살짝 벌어진 입술이 이윽고 또다시 닫혔다. 그래서 한결은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
“난 그만하기 싫어.”
해민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치미는 무언가를 꾹 누르듯 연신 마른침을 삼켜 댄다.
“내가…….”
해민은 두 눈에 힘을 잔뜩 실으며 잠시 숨을 고르더니 떨리는 목소리를 가늘게 내뱉었다.
“내가 겁이 많아서 그래.”
“…….”
“너랑 가까워질수록 점점 의지하게 되는 것도 무섭고, 서운함이 커지는 것도 무섭고, 언제 갑자기 멀어질지 몰라서 무섭고…….”
해민이 신중하게 덧붙일 말을 고민하는 듯 미간을 한데 모았다. 해민의 솔직한 고해 성사가 이어졌다.
“같잖고 유치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 어딘가 덜 자란 어른처럼 삐거덕거리기만 하니까 그냥 도망치고 싶었어. 그래서 그만하자고 한 거야.”
어떻게 서해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뻥 뚫린 제 가슴 한구석을 빠듯하게 채워 주는 유일한 존재인데.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죠? 우리 둘,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피식, 웃음을 흘린 한결이 전방을 향해 몸을 돌리며 한숨 쉬듯 대답을 꺼냈다.
“너랑 얽히고부터 나는 등신이 됐거든.”
해민에게 집적대는 이도한을 죽어라 팬 것도, 스토커처럼 해민을 졸졸 따라다닌 것도, 애초에 해민한테 호기심을 느끼고 접근한 것도, 오롯이 서해민만을 향해 있는 터널 시야에 갇혀 버린 탓이었다.
그런 주제에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변변히 할 수 없었다니. 이게 등신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오피스텔 주차장에 비딱하게 차를 세운 해민은 시동을 껐다. 그제야 한결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너 등신 아니야. 그런 식으로 자학하지 마.”
이대로 두면 두 칸이나 차지한 민폐 차주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배시시, 입에선 바보 같은 웃음이 샜다. 정말이지 등신 같았다.
한결은 해민에게도 피가 묻을까 봐 상처 나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집에 가자마자 키스해도 돼요?”
해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상처부터 치료하고.”
“치료 다 하면 키스해도 된다는 뜻으로 들려요.”
“……알아서 생각해.”
꼭대기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목구멍이 말라비틀어질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한결은 해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잠시 놓치기라도 했다간 어디론가 증발해 버릴까 봐. 해민은 붉어진 뺨을 손으로 꾹꾹 문지르며 눈동자를 굴렸다. 꽉 잡은 손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결이 보드라운 손등을 연신 쓸어내리며 애타는 마음을 드러냈다.
“나 절대 안 떠날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요. 대신 선배도 나 버리면 안 돼.”
해민이 한결을 슬쩍 올려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결은 입꼬리가 스멀스멀 위로 향하려는 것을 꾹 내리누르며 웃음을 참았다.
“왜 그랬어요?”
“뭐가?”
“이도한 그 새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잖아.”
“걔가 자꾸 네 욕 하는데 어떻게 그냥 무시해? 너한테 소시오패스라고 했단 말이야.”
씨발, 그냥 죽일걸.
분통한 마음이 고개를 치드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저 때문에 서해민이 그 새끼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는 말이 가슴에 콕 날아와 박혔다.
해민은 한결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슥 훑어 내렸다. 그러더니 눈썹을 늘어뜨리며 봇물 터지듯 막혀 있던 말을 쉴 새 없이 쏟아 냈다.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다녀? 춥지도 않아?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사 하나가 빠져서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있어야죠.”
“밥은 좀 챙겨 먹고 다닌 거야?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제가 듣고 있을 말은 아닌 듯해서 한결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멀리서 지켜볼 땐 잘 몰랐는데 해민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보나마나 뻔했다. 저처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서해민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한결은 피가 묻지 않은 손등으로 해민의 야윈 뺨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선배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제야 해민은 엘리베이터 벽면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금세 수긍이 간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 * *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빈 맥주 캔과 소주병이 보였다.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걸 절대 못 보는 성정이었음에도 요즘 그런 것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더 가관이었다. 썰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던 테이블 위에는 술병들이 빼곡했다.
한결은 슬쩍 해민의 눈치를 살폈다. 할 말을 잃은 듯 경악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해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작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뭐지?”
“어…… 잠시만요. 금방 치워요.”
재빨리 몸을 날려 쓰레기를 처치하려던 한결의 몸짓을 해민이 가로막았다.
“아니야. 이따가 치워. 사람 냄새도 나고…… 조, 좋네.”
“좋긴 뭐가 좋아요. 퀴퀴한 냄새밖에 안 나는데. 십 분만 눈 감고 있어 봐요.”
“그 손으로 뭘 하려고 그래. 먼저 흐르는 물에 피부터 닦고, 구급상자는 어디 있어?”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겨우 다시 잡은 손인데 이 손을 어떻게 놓쳐……. 한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해민의 어깨에 제 머리를 얹었다.
“닦아 줘요.”
“아니야. 넌 손 닦고 나오고, 나는 구급상자 찾아서 꺼내 놓을게.”
“혼자 못 해서 그러는데 좀 도와줘요. 나 아프잖아…….”
해민은 어이가 없다는 양 미간을 한데 모았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저보다 훌쩍 큰 한결의 몸을 질질 끌며 욕실로 데려갔다.
“아무리 아파도 손은 혼자 닦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해민이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을 한결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대신 평소보다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리며 처연하게 해민을 바라보았다.
“아야.”
“많이…… 아파?”
흐르는 물에 한결의 손을 갖다 댄 해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말라붙은 피 얼룩을 자그마한 손으로 살살 닦아 주는 감각에 한결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괜히 아쉬웠다.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살가죽이 깊숙하고 길게 찢어졌더라면 해민이 더 걱정해 줬을 텐데. 그 빌미로 아무데도 못 가도록 제 옆에 꼭 붙들어 두었을 텐데.
“이게…… 그렇게 안 보이지만 굉장히 아파요.”
한결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원래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잖아요. 작은 상처가 훨씬 더 쓰라린 법이라고. 알죠? 아, 지금 보니까 좀…… 감각이 안 느껴지는데. 마비된 것 같기도 하고.”
해민이 한결의 손을 닦아 주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왜.”
실컷 엄살을 부려 대던 한결도 나지막하게 대꾸하며 해민의 시선을 꼿꼿이 맞받아쳤다.
“119 부를게.”
“음? 아니, 아니, 아니.”
“마비된 거 같다며. 그 정도로 큰일 난 거면 병원부터 가야지. 움직일 수는 있겠어? 못 걷는 거 아냐?”
“아니, 아니에요. 물이 너무 차가워서 그랬나 봐.”
졸지에 작은 생채기가 났다고 앰뷸런스에 실려 갈 뻔한 한결이 다급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해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세면대 거울 속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모르는 척 받아 주면 어디가 어떻게 돼요? 하여간 매몰차기 짝이 없어.”
“그래. 다음부턴 모르는 척해 줄게.”
다음, 다음부터? 한결은 그 말을 입 속으로만 읊조렸다. 입술 끝이 씩 올라갔다. 해민과의 다음이 있다는 게 꿈만 같을 뿐이다.
상처 난 부위를 소독한 해민은 한결의 손에 붕대를 칭칭 감아 주었다. 사실 붕대를 감는 것도 조금 과한 처사건만, 두어 번 감고 관둘 줄 알았더니 해민은 끝도 없이 붕대를 감았다.
“다 됐다. 이 정도면 안 아프겠지?”
한결은 권투 글러브를 낀 것처럼 새하얀 붕대 뭉치가 된 제 오른손을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걱정이 잔뜩 묻은 얼굴로 물어 오는 해민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른손을 다쳐서 어떡해……. 시험은 다 끝났어?”
“안 끝났으면 시험도 대신 쳐 줄래요?”
“그건 부정행위니까 어렵고, 왼손으로 어떻게든 잘 해결해 봐.”
다행히도 한결의 시험은 오늘로 전부 끝이 났다. 종강이었다. 해민과의 연애를 끝내기로 했던 이번 학기의 종강.
해민은 내일도 마지막 시험 하나가 남아 있었다. 강의 시간표를 줄줄이 꿰고 있는 터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이 바로 한결이 염두에 두었던 디데이였다. 이전의 관계를 깔끔하게 끝내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이 될 디데이.
그런데 하필 오늘 이런 불상사가 터질 줄이야.
마른침을 꼴깍 삼킨 한결이 해민에게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내일이면 진짜 끝이네요.”
대학 생활의 종지부. 이번 학기의 마지막 날. 시한부 연애의 끝.
잠시 멈칫한 해민이 살며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진짜 끝이지.”
“내일 시험 끝나면 뭐 할 거예요?”
“글쎄.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나 만나요.”
싫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대답이 나오기 전에 권투 글러브로 해민의 입가를 가렸다.
“대답은 하지 말고 그냥 나 만나요.”
순 억지였다. 해민이 만나 주지 않는다고 해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 제 할 말을 할 생각이었지만, 해민도 마음의 준비는 필요할 터였다.
다행히도 착해 빠진 서해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작은 고갯짓에 마음이 놓였다.
온몸에 힘이 풀린 한결이 해민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터라 농축된 피로가 기어이 한계를 넘어섰다. 해민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손을 내려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겨 주었다.
이마가 예쁘니까 머리를 넘기고 다니라던 해민의 말에 매일같이 이마를 드러내고 다녔었다. 해민이 그만하자는 말을 꺼낸 이후론 간신히 면도나 하고 다니는 정도였지만. 어차피 봐 줄 사람도 없으니까.
이렇게 불시에 맞닥뜨리게 될 줄 알았다면 면도는 못 해도 머리는 항상 올리고 다닐 걸 그랬다.
한결은 부드러운 손길에 정신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민과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해민을 끌어안고 있을 때나 해민의 품에 안겨 있을 때마다 찾아오는 안정감이 좋았다.
“기분 좋다…….”
깊게 잠긴 한결의 목소리를 들은 해민이 작게 웃었다.
“실컷 울다가 엄마 품에 안긴 애새끼가 된 기분이에요. 엄마가 없어서 이런 기분 느껴 본 적 없었는데.”
순간 해민의 눈동자가 잘게 요동쳤다. 한결은 흠칫 놀라 움직임을 멈춘 해민의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온기 가득한 손바닥에 제 뺨을 비벼 대며 입술을 쪽, 쪽, 맞추었다.
“왜? 나 불쌍해요?”
부디 불쌍하게 여겨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찰나, 당황한 해민의 얼굴에 저를 향한 동정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순간을 포착한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한결은 그 틈을 더욱 파고들었다. 상대방이 가여워 보이고 귀여워 보이면 끝이라는 소리를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몸정보다 더 깊은 것이 연민이라면, 기꺼이 해민에게 불쌍한 인간으로 취급당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한테 좀 따뜻하게 대해 주면 안돼요? 곧 있으면 끝날 사이라느니 그딴 개소리 집어치우고, 응?”
자존심 같은 거 구겨 던진 지 오래였다. 동정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구차하다고 손가락질한대도 끄떡 안 할 자신이 있었다. 서해민이 옆에 있는데 뭐가 문제겠냐고.
해민은 입술을 감쳐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귓가를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게…… 어떤 건데?”
한결이 대뜸 몸을 일으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면 익히 알고 있었고, 해민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렇게요.”
한결은 해민의 양 뺨을 살며시 감싸고 입술을 포개었다. 폭신하고 말캉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혀를 섞지 않은 담백한 입맞춤. 가슴 깊숙한 곳이 근질거렸다. 구름 위에 올라탄 듯 몽글몽글한 기분이었다.
쪽, 소리를 내며 입맞춤을 끝마친 때였다. 예상치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을 반쯤 내리감은 해민이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꼴렸다. 한결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다리 사이로 피가 몰려 하반신이 뻐근해졌다. 당장 해민을 드러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난잡한 키스를 이어 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 상황에서 또 섹스를 하게 되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번에도 ‘할래?’ 이딴 소리 하기만 해 봐요.”
갑작스레 물러난 한결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던 해민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해민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민망한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두어 번 헛기침을 한다.
“안 해. 절대로.”
“나 봐 봐요.”
“…….”
“서해민, 나 봐.”
해민은 좀처럼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한결이 해민의 갸름한 턱 끝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저를 보게 했다.
“내일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참겠어요.”
“안 한다니까. 진짜 안…….”
“좋아해요.”
“……!”
안 그래도 커다란 해민의 두 눈이 곧 쏟아질 것만 같았다.
“좋아해요. 진짜 좋아해. 너무 좋아서 미쳐 버리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좋아해요.”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해민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는 아니라는 말이 돌아올까 봐. 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것처럼 쿵쿵 뛰었다.
한결은 해민의 한 손을 제 왼쪽 가슴으로 가져갔다. 분명하게 느껴 보라고. 팔딱팔딱 뛰어 대는 심장을 꺼내 보여 주고 싶었지만, 그건 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해민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해민이 그의 가슴팍을 짚은 반대편 손으로 한결의 눈가를 가렸다.
한결은 해민의 뜻대로 서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럼에도 해민의 손은 흘러나오는 말까지 막지는 못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둑이 무너진 것처럼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좋아한다, 좋아해 서해민, 엄청 좋아해, 죽을 때까지 좋아할 거야, 아니 죽어서도 좋아할게.
한결은 눈이 가려진 채로도 계속 고백을 퍼부었다. 고백이 멎은 건 해민이 어렵사리 입술을 떼어 낸 순간이었다.
“내일…….”
“내일?”
해민은 짧게 숨을 집어삼키더니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내일 다시 얘기해 줘.”
한결은 제 눈가를 가리고 있던 해민의 손을 끌어 내렸다. 그제야 어룽거리는 시야 안에 해민이 온전히 들어찼다.
물기가 촉촉하게 배어나는 해민의 눈동자에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한결은 지그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내일도 해 줄게요. 평생 얘기해 줄게.”
한결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해민을 품에 안았다. 작고 여린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져 더욱 세게 끌어안고 천천히 다독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렇게 안고만 자게 해 줘요. 섹스 같은 거 하지 말고. 밤새 같이 있고 싶어.”
해민은 애처롭게 떨리는 팔로 한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해민의 잇새로 그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필로그
마지막 시험을 완벽하게 망쳤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고한결로 가득 찬 머릿속에 활자 따위 집어넣을 여유 공간은 없어서였다. 언제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시간과 성적이 비례하는 편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석 졸업…….”
은 물 건너 간 듯했다. 자기소개서에 몇 줄 더 채워 넣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강의실을 나서는 해민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후련했다. 아주 높고 험한 산을 혼자만의 힘으로 넘어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끝이다!”
“끝난 거 축하해요. 고생했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지개를 쭉 켜는 순간이었다.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해민이 어깨를 움츠렸다. 고개를 돌리자 고한결이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어젯밤에 칭칭 감아 준 권투 글러브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멀쩡한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해민의 입술 사이로 덩달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다렸어?”
“언제는 안 기다렸나? 나는 맨날 기다리고 있죠.”
“난 기다리라고 한 적 없는데. 끝나자마자 바로 연락하려고 했어.”
“알아. 누가 시킨 거 아니고 그냥 내가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거예요.”
가까이 다가온 한결이 손을 뻗어 해민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더니 깍지를 껴잡았다. 아직 캠퍼스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는 전부 괜찮았다.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든지 간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한결이 옆에 있으니까.
“좀 걸을래요?”
“응.”
해민은 맞잡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한결과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이미 종강을 한 학생들이 많아서 캠퍼스 내에 인적은 드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더 눈에 띄었다. 그중 하나가 워낙 시선을 몰고 다니는 고한결이기도 하고.
“시험 잘 봤어요?”
“완전…… 망쳤지.”
“나도 이번 학기 성적 개망했는데. 이런 것까지 따라 하면 어떡해요?”
“너는 거기서 더 개망하면 어떡해?”
“뭐야. 내 성적을 다 꿰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대충 짐작은 가니까.”
그래도 출석은 꼬박꼬박 하는 편이니까 어느 정도 중간은 가겠거니 했다.
“나 학고 받으면 책임져 줄래요?”
학사 경고는 좀 심각한데. 제가 책임져 준다고 만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민이 걱정을 가득 담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결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야?”
“농담, 농담.”
한결은 평소보다 한층 더 능글맞은 미소를 걸치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나 이제 해민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실을 가장하기 위해 더 과장되게 웃고 있다는 걸. 정말 심각하긴 한가 보다.
한결과 해민은 교양관과 학관, 경영관 근처를 하염없이 배회하다가 새파란 인공 잔디가 깔린 운동장 근처까지 다다랐다.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두 사람은 나란히 걸터앉았다. 마치 한강 둔치에 앉아 강 너머를 바라보던 그날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책임져 줄 수 있는데.”
“응? 뭘?”
“선배가 시험 같은 거 다 망쳐도 원하는 기업에 입사할 수 있게 책임져 줄 수 있다고요.”
잠시 멍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신양 그룹 회장의 외손자. 잠시 잊고 있던 그의 신분이 막 떠오른 참이다.
“왜 말 안 했어?”
주어가 없음에도 한결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가 무릎 위에 팔을 걸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앉았다.
“나에 대해서 하나도 안 궁금해했잖아요.”
그야 당연히 곧 끝날 사이니까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하고 싶진 않아서였다. 해민은 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그래도 취업 청탁 같은 거 할 생각은 없어.”
“우리 집 단수됐을 때 욕실 빌려준 대가라고 생각해요. 나도 은혜 갚은 까치 한번 되어 보게. 응?”
해민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사양할게.”
결코 달갑지 않은 호의였다. 신양 그룹에 입사할 꿈을 품고 이제껏 스펙을 쌓아 왔는데, 고한결의 도움으로 꿈을 이루게 된다면 그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거니까.
“으으. 싫다, 진짜.”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쳐져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한결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와, 서해민 자존심 진짜 끝장난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너 같으면 냉큼 물 거야?”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능력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건 능력이라기엔 좀…….”
“좋아해요.”
대뜸 말허리를 끊고 달려든 한결 때문에 해민은 말문이 막혔다.
오늘이 바로 끝을 약속한 그날이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야 진짜 약속이라고 말하던 그날의 한결이 떠올라서 푸스스 웃음이 샜다. 그날 결국 새끼손가락은 얽지 못했다. 오늘처럼 깍지를 껴잡았지. 그래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우스운 생각이 뒤따랐다.
“누가 그랬는데. 그때 가서 백년가약 맺어 달라고 바짓가랑이 붙들지나 말라고.”
“아, 그때는……! 그때는 좀…… 그땐…….”
한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렇게 될 줄 몰랐지.”
한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내가 무슨 예언자도 아니고 미래를 어떻게 알아.’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게나 말이다. 이하 동문이었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자꾸만 시야에 거치적거리며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을 저 멀리 치우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연애를 시작했었다. 아무도 열지 못하게 꽉 잠가 두었다고 생각한 문은 슬금슬금 틈이 벌어졌고, 고한결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래, 아…… 솔직하게 말할 테니까 실망하면 안 돼요.”
안절부절못하며 다채로운 표정을 드리우던 한결의 얼굴이 자못 진지해졌다.
“응, 실망 안 해.”
“약속 한 거죠?”
고개를 끄덕이자 한결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뭐, 그때 말했던 대로 그냥 서해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나만 보면 눈이 가늘어져서 새침하게 쏘아보는 게 짜릿하기도 하고, 이도한 그 씹새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된다고 하는지 오기도 생기고 그래서…….”
“한결아, 숨 좀 쉬면서 말해.”
답지 않게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고한결이 귀여웠다.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이 모습은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광경이었다. 해민은 당장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으로 남겨 놓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야만 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 빌어먹을 제안을 했던 거라고…….”
한결의 말꼬리가 희미하게 뭉개졌다. 해민은 웃음을 꾹 참으려고 입술을 일자로 맞물었다.
“다 아는 사실을 갖고 새삼스럽게 열변을 토하고 그래.”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
“지금부터 중요한 얘기할 거니까 잘 들어요. 집중, 집중!”
지금까지 실컷 중요한 얘기를 꺼냈으면서, 그는 이제 와 집중하라며 해민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퉁겨 댔다.
“응, 집중하고 있어.”
한결은 내내 무심하기만 한 해민이 못마땅한 듯 슬쩍 해민을 흘겨보더니 입술을 사리물었다. 도저히 눈을 마주한 상태로는 말을 못 하겠는지 해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더니 주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비비적거리며 해민의 목덜미에 대고 소곤거렸다.
“사랑해요.”
해민은 순간 숨 쉬는 법을 까마득히 잊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못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실체가 없을진대 물리적인 통증을 몰고 왔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 찌르르 떨리는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 졸업하려면 아직 이 년은 더 남았고, 어느 정도 자리 잡으려면 그 후로도 이 년은 더 필요할 거예요. 지금부터 넉넉하게 오 년.”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건지 한결은 갑자기 손가락을 접으며 햇수를 세고 있었다.
“오 년 후에 결혼하자.”
해민은 얼굴에 화르르 열이 올랐다. 제 귓가에 인생 계획을 주르륵 읊는 한결에게 어떤 대답을 돌려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결혼이라니……. 연애도 전혀 생각에 없던 부분이었는데, 한발 더 나아가 덜컥 결혼 얘기가 나오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집안을 떠올리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사이, 한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해민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하…… 존나 멋대가리 없다.”
자조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한결에게 당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사고가 정지한 듯했다.
꽤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해민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고, 한결은 연신 입을 벙긋거렸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냥 관둘래요?”
순간 해민의 심장이 발치 아래로 쿵 내려앉았다.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능력이라고 했는데, 제게 다가온 기회가 그대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해서…….
“그래, 싹 다 관두자. 다 잊어버려요.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
“…….”
“진짜 연애.”
맥이 탁 풀렸다. 해민은 놓치고 싶지 않아서 꽉 움켜쥐고 있던 한결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쥐었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제 귀도 한결 못지않게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게 분명했다. 온 얼굴에 퍼진 열감이 그 증거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너처럼 멋있게 얘기해 주고 싶단 말이야…….”
한결의 낮은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흩어졌다. 등을 다독여 주는 손길이 따뜻했다. 고한결과 함께 있으면 한겨울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속까지 따끈따끈하게 데워졌으니까.
“그냥 좋아한다고 하면 되지, 겉멋만 잔뜩 들어 가지고. 어른인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순 애네.”
웃음기가 잔뜩 어린 타박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해민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었나. 아마도 한결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치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법도, 남에게 퍼부어 주는 법도 몰라서 한참을 헤맸다.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 끝까지 치미는 바람에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너 좋아하면…….”
해민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밀어 넣느라 숨을 삼켰다. 한결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해민이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내가 너 좋아하면, 너 나 감당 못 해.”
“…….”
“나 많이 사랑해 줘야 해.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사랑 그거, 네가 다 줘야 해. 전부를 퍼 줘도 나는 내내 부족하다고 할지도 몰라. 그걸 네가 감당할 수 있어?”
여린 어깨가 들썩거렸다. 해민이 고개를 파묻고 있는 한결의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고한결을 제멋대로인 어린애라고 여겨 왔던 생각을 철회해야 할 때였다.
해민은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애가 된 기분에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제껏 참아 온 서러움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자존심만 센 줄 알았더니……. 걱정도 팔자네.”
한결은 혀를 쯧 찼다. 그가 해민의 뒷목을 감싸 안고 제 품으로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퍼붓는 마음 감당할 준비나 해요. 더는 못 받아먹겠다면서 밀어내지나 말고.”
“……그럼 약속해 줘.”
이번에는 새끼손가락도 걸고. 절대 어기지 못하도록 계약서를 써서 공증이라도 받아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민이 더듬더듬 한결의 손을 찾아 새끼손가락을 들게 했다. 그리고 제 새끼손가락을 엮고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불안했다. 손가락이 떨어지는 동시에 그가 한 약속이 전부 사라질까 봐.
“새끼손가락 거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약속하는 방법이 있는 거 알아요?”
한결의 입매가 근사한 호선을 그렸다. 해민은 가파르게 들썩이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물었다.
“뭐, 흑, 뭔데?”
한결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딸깍, 묵직한 뚜껑을 열자 앙증맞은 보석이 콕 박혀 있는 심플한 링이 보였다. 한결은 생명 줄이라도 되는 양 제 손을 꽉 붙들고 있는 해민의 오른손을 펼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반지는 부드럽게 들어가더니 꼭 맞게 자리했다.
“이게 뭐냐면 족쇄라는 건데, 혹시 알아요?”
피식 피식, 연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해민은 제 손가락에 끼워진 족쇄를 하염없이 매만지다가 황급히 한결의 손가락을 눈으로 좇았다.
“너는…… 없잖아, 족쇄.”
발그레 달아올랐던 해민의 얼굴이 시무룩해진 건 순식간이었다. 해민이 한결의 양손을 펼쳐 꼼꼼히 살펴봤지만 그 어디에도 반지는 없었다. 이러면 다 무슨 소용이지?
한결이 해민의 입술에 쪽, 쪽, 입을 맞추더니 싱긋 웃었다. 타들어 가는 제 속도 모르고 웃기만 하는 그가 퍽 얄미웠다.
해민이 졸업하면 이 캠퍼스에는 고한결 혼자 남을 테고, 그는 언제 어디서나 시선을 끄는 사람이니까 그를 마음에 품는 사람도 당연히 많을 거였다. 그럼 불안해서 대체 어떻게 살아?
한결은 해민의 속내를 단번에 읽어 낸 듯 이번에는 코트 겉주머니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해민의 입술 사이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아…….”
“와, 어떡하냐. 나 완전 서해민한테 코 꿰었다. 이건 뭐 족쇄로도 안 되겠는데? 그냥 나 업고 다닐래요?”
해민은 재빠르게 그의 손에서 상자를 낚아채 뚜껑을 열었다. 제가 끼고 있는 반지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 한결의 길고 굵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자, 역시나 꼭 맞았다.
“어? 대답해 봐요. 보자기에 둘둘 싸서 등에 업고 다녀라, 그냥.”
놀리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해민의 기분은 좋기만 했다. 해민은 똑같은 족쇄를 끼고 있는 두 손을 나란히 펼쳐 놓고 빤히 응시했다.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나사 하나가 풀리는 걸 말하는 듯했다. 아니면 허파에 바람이 드는 걸 말하는 건가.
“내가 너 업으면 바닥에 다리 질질 끌려 다닐 텐데, 괜찮아?”
“뭐가 안 괜찮겠어요. 다 좋지.”
해민은 여상한 말투로 대답하는 한결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확신에 찬 그의 말이 해민의 가슴을 둥둥 울렸다. 코끝에 스미는 그의 체향이 익숙했다. 익숙함은 곧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응, 나도 다 좋아.”
서로가 서로에게 귀속되었음을 맹세한 오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 *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오피스텔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긴장감은 팽팽했다.
한결과 닿아 있는 건 고작 손끝뿐이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해민의 검지를 감아올리며 야살스러운 감각을 돋웠다. 그가 손가락 관절을 뭉근하게 문지르더니 단정하게 정돈된 손톱 끝으로 해민의 손바닥을 슥 쓸어내렸다. 맞닿은 살결로부터 전해지는 열기에 해민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나른하게 반쯤 내리감긴 눈꺼풀 사이로 초점이 나간 한결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해민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흥분으로 젖어 드는 눈가가 붉은 빛깔을 띠었다.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후텁지근한 열기가 밀폐된 공간을 가득 메웠다.
해민을 향해 훅 다가온 한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더니 귀와 어깨 사이, 겨우 드러나 있는 새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날렵한 코끝이 여린 살갗을 꾹 눌렀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흥분했어요?”
목덜미에 달라붙는 숨결이 뜨거웠다. 숨 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호흡이 가빠지고, 목구멍이 타들어 갈 정도로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연신 공간을 울렸다.
“……너는?”
“나는…….”
한결은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뜸을 들였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임을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습하게 젖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서서히 스며들었다.
“존나 꼴려서 뒤지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이 맞물렸다. 두 사람은 허겁지겁 혀를 얽고 얽으며 서로를 강렬하게 탐했다. 해민은 한결의 체취를 전부 제 안으로 집어넣고 싶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뜨겁고 붉은 살덩이를 아무리 비벼 봐도 갈증은 달래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더 짙은 행위를 원하고 있었다.
해민은 한결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한 팔로 해민의 엉덩이 아래를 받친 한결이 가뿐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해민이 허공에 붕 뜬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열기가 피어나는 다리 사이를 한결의 상체에 바짝 밀착하고는 슬쩍슬쩍 허리를 들썩이자 자극이 더해졌다.
“얼씨구.”
입술 끝이 닿을 듯 말 듯 살짝 틈을 벌린 한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서해민 발정 났네.”
등 뒤에서 도어 록 키패드를 빠르게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그 안으로 입성한 한결은 해민의 몸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게걸스럽게 물고 빠는 키스를 이어 갔다.
쾅, 육중한 문이 닫히고 현관 센서에 불이 켜졌다. 해민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려 한결의 가슴팍을 살며시 밀어내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열기에 취해 몽롱하게 풀린 한결의 동공이 색정적이었다. 뺨이며 인중, 입술 할 것 없이 얼굴 곳곳에 와 닿는 불규칙한 숨소리가 한껏 뜨거웠다.
“하아…….”
“한결아, 나 못 참겠어…….”
“뭘 못 참겠어요?”
한결은 해민의 턱 끝을 지그시 쥐었다. 그러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붉어진 눈가에, 가늘게 뻗은 콧등에, 움푹 파인 인중에 쪽, 쪽,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의 어깨를 감싸 쥔 손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실었다.
“하고…… 싶어. 나 하고 싶어, 한결아. 얼른 해 줘.”
“뭘 하고 싶은데. 뭘 해 줘요. 응? 말해 봐.”
입술을 부딪치려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도 한결은 그 대답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양 고개를 홱 피하며 약을 올렸다. 해민은 혀로 입술을 쓸어 내고는 그의 귓불을 앙 깨물었다.
“섹스하자, 우리.”
다시금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혀에 돋은 돌기가 맞물리고 서로의 혀 날을 문지르며 거칠고 난잡한 키스를 나눴다. 타액이 섞이는 적나라한 소리가 귓등을 잔잔하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서로의 겉옷을 끌러 냈다. 해민의 니트 안으로 커다란 손이 파고들었다. 뜨거운 화마를 품은 아랫배를 덮고 살살 문지르는 듯하다가 기어이 위로 향하는 한결의 손길이 달가웠다.
한결이 입고 있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던 해민의 손이 자꾸만 엇나갔다. 어서 살갗을 맞대고 온기를 나누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해민은 답답하기만 했다.
한결은 그런 해민의 속내를 읽어 낸 듯 셔츠를 단숨에 벗어 던지더니, 해민의 니트마저 순식간에 벗겨 냈다.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굴곡을 더듬으면서도 척척하게 젖은 입술은 절대 떨어뜨리는 법이 없었다.
새하얀 살결을 문지르던 한결의 손이 슬그머니 위로 올라와 브래지어에 감싸인 해민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흐읏……!”
브래지어 컵 안으로 파고든 그의 손가락이 빳빳하게 일어난 정점을 유린했다. 거센 악력으로 양 가슴을 주무르자, 해민의 잇새로 달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결은 그 신음 소리마저 전부 받아먹을 기세로 입술을 겹쳤다. 해민은 배 속이 간지러웠다. 다리 사이로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애액이 속옷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한결이 해민의 팔을 살짝 그러쥐어 당기더니, 반대편 벽을 짚게 했다. 전면이 거울이었다. 한결은 해민의 등 뒤에 서서 고스란히 드러난 동그란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혀를 내밀어 어깨를 할짝거리는 한결의 모습이 거울 속에 비쳤다. 그의 시선은 거울 속 해민을 향해 올곧게 박혀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찌릿하는 전율이 온몸으로 퍼졌다. 해민은 고한결의 행동을 제 눈으로 보고 있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고개를 떨구었다. 뒤에서 뻗어 나온 한결의 손이 해민의 턱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봐야지, 해민아.”
해민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아니야…… 안 볼래.”
“섹스할 때 네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너도 봐야지. 나만 보기 아까워서 그래.”
한결이 해민의 브래지어를 위로 밀어 올리자, 풍만한 가슴이 출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빳빳하게 솟은 유두가 누군가의 온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어야 된다? 응? 해민아, 믿을게?”
“흐으, 으응, 응. 으응…….”
해민의 확답을 받아 낸 그는 가슴을 주무르며 젖꼭지를 둥그렇게 굴리기 시작했다. 해민은 신음을 참아 내려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러다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으며 붉은 흔적을 새겨 넣던 한결과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매가 예쁘게 휘어졌다.
숨통이 바짝 조여 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찰나, 한결의 허벅지가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가 쓰러지려는 해민의 몸을 무릎으로 받쳐 들었다.
“자, 이제 직접 해 봐. 잘 지켜봤으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
한결은 거울을 짚고 있는 해민의 한 손을 감싸더니 그녀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해민은 손에 닿는 제 맨살 느낌이 낯설었다. 그는 해민의 손가락을 세워 젖꼭지를 둥글게 굴리기를 종용했다. 한결의 허벅지에 다리 사이를 비벼 대자 흥분은 배가되었다.
“옳지. 잘하네. 계속 굴리고 있어.”
해민은 한결이 알려 준 대로 제 가슴을 주무르고 돌기를 굴리며 아래로 내려가는 한결의 손을 바라봤다. 그는 해민의 바지 버클을 툭 푸르더니, 척척하게 젖은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나 없을 때 혼자서 자위해 봤어요?”
“아니, 아니, 흐으…… 안 해 봤어.”
속옷 위로 통통하게 부푼 음핵을 문지르며 한결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안 했다고?”
“안 해, 난 그런 거, 흐응, 안 해 봤어.”
한결이 해민의 어깨를 세게 깨물더니, 무언가 못마땅한 듯 혀를 내둘렀다.
“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네 생각하면서 딸 쳤는데.”
그의 손길로 인해 바지와 속옷이 쑥 말려 내려갔다. 해민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비부를 문질러 대는 한결의 손에 온몸을 내맡겼다.
“나랑 뭐 하는 상상하면서, 하아…… 자위했는데?”
녹진하게 달라붙는 열기에 취해 거침없이 말이 새어 나왔다. 한결은 해민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며 피식 웃었다.
“궁금해요?”
“으응, 궁금해.”
또 한 번 바지 버클이 툭,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엉덩이 사이로 길고 두툼한 기둥이 느껴졌다.
그의 귀두 끝에서 흘러나오는 체액과 제 다리 사이에서 쏟아지는 물이 뒤섞여 야한 마찰음을 빚어냈다. 찔꺽찔꺽. 뭉툭한 귀두가 갈라진 틈을 비집고 들었다. 좁고 어두운 구멍이 벌름거리는 감각이 여실히 전해졌다.
“거울 안 볼래? 눈 뜨고 똑바로 봐.”
날아드는 타박에 해민은 두 눈에 힘을 실어 부릅떴다. 하아, 하. 뜨거운 호흡을 뱉어 내고 있는 거울 속 고한결의 얼굴은 실제로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달뜬 흥분에 취해 있었다. 이윽고 그의 성기가 좁은 내벽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윽.”
한결은 아랫입술을 당겨 물다가 허겁지겁 해민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찾았다. 달콤하고 상냥한 키스와는 달리 아래 사정은 그러하지 못했다.
“너랑 이렇게 떡 치는 상상하면서 물 뺐지.”
한결이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그때마다 저릿한 쾌감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뒤덮었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거울을 짚은 손톱 끝이 새하얗게 변했다.
해민이 숨을 헐떡거리며 거울에 상체를 기대려 했다. 온몸의 힘이 풀리고 모든 감각이 다리 사이로 고여 드는 바람에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결은 해민의 한쪽 무릎 뒤로 팔을 넣어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흐읏! 한결아, 나, 나 힘들어……!”
발목에 걸려 있던 바지와 속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민은 거울 안에 비치는 한결을 눈으로 좇았다. 한결은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밑에 봐 봐요.”
그의 말대로 시선을 아래로 떨군 해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기 중으로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밀지, 그 안에 박혀 있는 기둥은 아직 반도 채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다 넣지도 않았는데 힘들다고 하면 난 어쩌라고.”
“하아, 나 못 해. 못 할 거 같아. 너무 커. 빼, 한결아. 빼……!”
“맨날 못 하겠다면서 잘만 씹어 먹잖아요.”
“아니, 아니. 오늘은 진짜 안 될 거 같아. 더 커진 거 같아. 나 못 해.”
“할 수 있어요. 서해민이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한결은 그 상태로 허리를 퍽 쳐올렸다.
“하읏!”
제 구멍이 커다란 성기를 뿌리까지 집어삼켰다. 안 그래도 좁은 내벽이 바짝 조여 들었다. 기둥에 돋아난 힘줄 하나하나까지 느껴져 정신이 어찔했다. 아랫배가 꽉 차다 못해 버거운 감각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한결은 해민의 머리에, 귀 뒤에, 목덜미에, 어깨에,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면서 해민이 달콤한 키스에 방심한 틈을 타 허리를 느릿하게 쳐올렸다. 좁고 쫀득한 내벽이 옴찔옴찔 성난 기둥에 달라붙었다.
“이것 봐. 좋다고 오물거리는 거.”
“흐응, 하, 으으응…….”
“먹어도 돼. 서해민 혼자 다 먹어. 죽을 때도 선배한테 박은 채로 죽고 싶어요.”
해민의 교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에 따라 한결의 허리 짓도 점점 난폭해졌다. 살결이 찰싹찰싹 맞붙는 소리 또한 현관에 가득 울렸다.
“자, 잠깐만, 한결…… 너무, 너무…… 하아.”
“너무 뭐요? 후우, 너무 좋아?”
너무 강하게 들이닥치는 그가 두렵기도 했지만, 모순적이게도 이 순간에 의지해야 할 사람은 고한결뿐이었다.
고통을 동반한 쾌감이 서서히 고통을 지워 냈다.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성적 쾌락이 해민의 욕망을 부추겼다.
“너무 좋, 흐응, 좋아…….”
그의 좆은 해민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결은 집요할 정도로 그 부위를 찾아 귀두를 푹푹 쑤셔 박았다. 이미 끝 간 데 없이 부푼 줄로만 알았던 성기가 위압감을 과시하며 더욱 몸집을 키웠다.
“나도 좋아, 해민아. 나 너 정말 좋아해.”
거울 속에서 귀두까지 물러난 기둥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다리 사이에 흥건히 고여 있던 물이 해민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렀다. 끈끈한 점액질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눈에 새겨 넣던 한결이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선배님은 섹스도 좋아하고, 느끼기도 잘하고, 물도 존나 많고. 내가 따라잡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그치?”
“너, 너도…… 너도 그렇잖아. 섹스에 환장해서…….”
“난 섹스가 아니라 서해민한테 환장한 거지. 선배는 아니죠? 나보다 섹스가 더 좋지?”
한결의 눈초리가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해민에게 원망 섞인 시선을 던지며 얕은 숨을 뱉어 냈다. 상처받은 짐승처럼 자조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해민의 마음을 들쑤셨다.
“아냐. 나도 네가…… 섹스보다, 하아, 네가 좋아.”
“아, 그래요?”
손바닥 뒤집듯 그의 목소리가 단번에 반전됐다. 한결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해민에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러더니 성기를 빼지 않은 채로 해민의 몸을 돌려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엄…… 우리 선배님 힘드시니까, 이제 누워서 박아 줄까?”
서서 박히는 게 무리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거울 속으로 그들의 행위를 지켜봐야 하는 거였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교접 행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는 건 생각보다 치욕스러웠다. 그래서 침대로 향하자는 한결의 제안이 달가웠다.
하지만 달가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 사이즈의 침대에 몸이 떨어지자마자, 고한결은 굶주린 짐승처럼 해민을 몰아붙였다. 그동안 채우지 못했던 허기까지 전부 채우려는 듯 미친 듯이 성기를 처박았다.
색욕으로 젖은 한결의 눈가가 붉었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얼굴선을 타고 흐르더니 턱 끝에서 해민의 뺨 위로 톡, 톡 떨어졌다.
“그만, 한결아, 흐응, 그마안……!”
“미안. 나, 못 멈추겠어, 후우, 진짜 미안.”
한결은 진심으로 저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해민이 걱정된다는 양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에 반해 허리를 쳐올리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그 강도 또한 끝도 없이 거세졌다.
그는 온몸을 바르작거리며 침대 헤드로 달아나려는 해민의 허리를 쑥 잡아당겨 성기를 맞물렸다.
“아아, 도망가지 마요, 섭섭하게.”
해민의 머릿속에 번쩍이는 섬광이 수차례 스쳤다.
“아응! 응! 흐으읏! 아앙!”
기어이 해민이 먼저 절정에 다다르고 말았다. 다리 사이로 흥건하게 터져 나온 물이 시트를 적셨다. 교성을 내지르던 해민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친 한결이 한 박자 늦게 으윽, 신음을 터뜨렸다.
“하아…….”
비릿한 성교의 잔향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해민은 납덩이를 올린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좀처럼 여운이 가시지 않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결은 해민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렸다. 쪽, 쪽, 담백한 입맞춤 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
“미안. 내가 너무 제멋대로 박아 댔지?”
“……알긴 알아?”
해민은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뱉었다. 거친 숨과 뒤섞여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지만, 한결은 용케도 말뜻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턱 끝과 목덜미에 키스를 퍼붓던 그가 슬그머니 내려가더니 빗장뼈에 입술을 묻고는 잘근잘근 씹어 댔다. 아직 빼내지 않은 성기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순간 불길함이 엄습했지만, 고한결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 긴장을 놓았다.
그러나 한결은 은근슬쩍 해민의 유두를 제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뭉근하게 비벼 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반대편 정점을 살짝 물고 빨아 당기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 부드러운 콘셉트로 할게.”
“안 돼. 그만해.”
“나 또 섰는데?”
“고한결, 제발…….”
해민의 머리 양옆으로 팔을 짚은 한결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언제 사정을 하긴 했냐는 듯 산뜻한 얼굴로 사르르 눈웃음을 친다.
해민은 울컥하는 마음을 눌러 삼키며 한 음절 한 음절 꾹꾹 짓씹어 내뱉었다.
“미친놈.”
“좋다. 흥분돼. 더 욕해 줘.”
“너 진짜 미친놈 같아……!”
한결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해민의 가슴 위로 흩어졌다.
해민은 손이 닿지 않는 가슴 깊숙한 곳까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사그라든 흥분감이 점차 되살아났고, 제 안에 들어온 고한결을 느끼기 위해 온 감각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 * *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통창 너머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가만히 온기를 느끼던 해민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개운했다. 이제까지 누적된 피로가 어제를 기점으로 전부 씻겨 내려간 듯했다.
침대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척일 때였다. 두꺼운 팔뚝이 해민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홱 끌어당겼다.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곤히 잠든 한결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와 있었다. 밤새 저를 괴롭혀 댈 때는 짓궂게 웃으며 장난기 어린 얼굴을 드러내더니, 표정을 지운 그의 얼굴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해민은 빤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언제 봐도 완벽한 얼굴이 제 눈앞에 있다는 게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한결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말했다.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나.”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도 같다.
“내 얼굴 뚫린 거 같은데 한번 봐 줘요. 어디 구멍 난 데 없나.”
해민은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말캉하고 폭신한 감각이 전해졌다. 더없이 좋았다.
아직 잠기운을 채 걷어 내지 못한 한결이 눈을 반쯤 뜨더니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아, 뭐야. 일어나자마자 하자고?”
그제야 다리 사이에 박힌 이물감이 느껴졌다. 딱딱하고 굵은 기둥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벽을 빠듯하게 채웠다.
“선배 괜찮겠어요? 나는 좋은데.”
“너 설마 이 상태로 잔 거야?”
해민이 기겁하며 미간을 흠씬 구겼다. 그의 성기를 빼내려 몸을 뒤로 물렀지만, 한결이 단박에 해민을 끌어안아 몸을 바짝 밀착했다.
“으응. 우리 밤새 했잖아요. 넣고 빼는 것도 일이니까 시간을 아껴 보자는 취지였지. 효율, 알지?”
“하아. 너는 진짜…….”
잠기운에 취해 있음에도 따박따박 논리를 따지고 드는 한결이 퍽 우스웠다.
해민은 더 이상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저 제 품을 파고드는 한결을 꼭 끌어안아 줄 뿐이었다. 해민이 그의 머리에 뺨을 비비며 웃었다.
“너는 진짜 똑똑해.”
한결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해민의 작은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안도의 숨을 흘렸다.
“우리 같이 살래요?”
해민은 묵묵히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제 등에 닿아 오는, 햇살보다 따스한 그의 손길을 느끼며.
“이제 외롭지 않게 해 줄게.”
맞닿은 살결 너머로 전해지는 안정감에 안도하며.
“내가 진짜 잘할게요.”
홀로 감당하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며.
해민은 공허한 마음을 꽉 채워 준 한결에게 더없이 고맙다는 말을 짤막한 대답으로 치환했다.
“사랑해.”
해민의 턱을 쥐고 저를 바라보게 한 한결이 지그시 눈을 맞춰 왔다.
“내가 더.”
길게 입술을 맞추었다가 살며시 떼어 낸 그가 덧붙였다.
“사랑해.”
서해민의 결핍은 사람, 그리고 사랑이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채워 줄 고한결을, 아마 처음부터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같은 결핍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기 마련이니까.
해민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고한결을 얻음으로써 타인이 채울 수 없는 결핍마저도 그가 전부 채워 주었음을.
톱니바퀴 맞물리듯 각자의 빈 공간을 다독이며 살아 낼 앞날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고 스며드는 햇살처럼 고한결이 전해 주는 온기는 완전했다.
〈결핍의 심리학〉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