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101
100화. 단망(斷網)
무관대전의 결승전을 하루 앞둔 날 밤. 잠이 오지 않는지 단리우가 종영관의 이층 난관에 서서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야.”
그를 발견한 유운이 다가왔다.
“유화 누…… 아니, 유운 형님.”
‘언제까지 저렇게 오락가락 할거지?’
단리우의 얼굴을 본 유운이 미간을 좁혔다.
“뭐지? 그 불순한 얼굴은?”
“아하하, 아닙니다. 별거 아니에요.”
괜히 궁금한 것을 물었다가는 뒤통수가 화끈 달아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몸의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는 단리우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흐음…….”
지난 진호준과의 대결.
“제가 이긴 게 맞죠?”
“그럼. 네가 이긴 거야.”
이겼지만 찝찝했다. 과연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막상막하였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고, 단리우는 그와 검을 맞대며 왠지 모를 쾌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호각 소리가 들려왔고, 화용관 진영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진호준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졌습니다.’
황당했다. 대체 그는 갑자기 왜 패배를 시인했을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진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그를 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저와 결승에서 붙기를 원했어요. 마치 식사에 앞서 먹잇감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죽여 버리고 싶었겠네?”
그의 마음을 훤히 안다는 듯 첨언하는 유운. 단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었어요. 단순히 그가 얄미운 게 아니었어요. 제 무인으로서의 짜릿한 승부를 망친 그놈을 뭉개버리고 싶었어요.”
진윤으로 인해 씌어졌던 진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인물이 진호준이었다. 그는 순수하게 강함을 추구하는 무인이었다. 짧았지만 그와 나눴던 검격이 단리우에게는 활기가 되었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던 계기였다. 그 순간을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진윤이 모든 것을 망쳐놨다.
“네 마음, 나 또한 알고 있어. 나도 무인이니까.”
순수한 무림인 중 그 마음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대응할 이유는 없어. 정천이 했던 말 기억하지?”
“몸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네가 취해야 할 마음가짐이야.”
“그런데 대체 대인은 어디를 가신 겁니까?”
진호준과 대결이 끝난 후에야 정천이 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유화에게 들었다.
“나도…… 모르겠어.”
벌써 이틀이 지났다. 내일이면 사흘째.
‘잠깐 산책 좀 다녀오려고. 그러니까 저 칠칠이 좀 잘 지켜보고 있어. 결승은 사흘 뒤라고 했나?’
그렇게 그는 비무장을 떠났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
무림이라는 세계는 강한 무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어떤 간계에 빠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유화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아.”
정천이라는 사내는 언제나 그녀에게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다.
* * *
“어이, 불구. 너 또 왼손으로 검을 잡았다가 고운당주님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다며? 킥킥.”
또 시작이었다. 어린 진회는 그 말을 무시하고 수련에만 집중했다. 일 검, 일 검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내리쳤다.
‘구천구백구십구!’
이제 마지막 만 번째 검격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지르는 마지막 일 검.
턱-
“……!!”
그의 검이 막혔다.
“불구,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그의 검을 막아선 이를 바라보는 진회. 어진당(御珍堂)의 소당주이며 화용진가 천고일재(千古一才), 진원. 그는 유력한 차기 가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만하십시오, 형님.”
진회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만 못하겠다면? 불구 네가 뭐, 어떻게 할 건데?”
“…….”
진회는 참고 또 참았다. 언젠간 저 면상을 짓이겨놓겠다고 다짐하면서.
퍽!
“커헉!”
그의 배가 새우처럼 꺾였다.
“뭐야? 그 주둥이까지 불구가 된 거야?”
퍽!
다시 주먹이 꽂혔다.
“아니, 묻잖아, 이 새끼야.”
“…….”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는 진회.
철썩!
따귀를 맞은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왜? 노려보면 어떻게 할 건데? 엉? 이 불구새끼가.”
그대로 멱살을 잡고 끌어당기는 진원.
“잘 들어. 너 같은 불구 자식은 그 어떤 수련을 해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그러니까.”
툭- 툭-
진원이 장난스레 그의 뺨을 쳐댔다. 하지만 진회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눈을 부라리는 것뿐이었다.
“찌그러져서 하라는 것만 해. 알겠어?”
이날 진회는 다짐했다. 꼭 저 자식을 뛰어넘겠다고 말이다.
* * *
뚝- 뚝-
지면 위로 피가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복은 진즉에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헉…… 헉…….”
거친 숨소리. 그를 바라보는 백혼대의 무인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것이 그대의 한계인가?”
반면, 진회는 여전히 멀쩡했다.
“끌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영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노궁의 비웃음까지 정천의 신경을 자극했다.
“…… 꽤 하네, 형씨.”
“쯧쯔, 아직도 입만 살아서는.”
혀를 차는 노궁. 정천에게는 그를 상대할 힘도 없는 듯 축 처진 어깨를 연신 들썩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히죽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진회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궁금하구만.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웃고 있다니. 혹, 주화입마에라도 빠진 겐가?”
아니면 머리가 돌아버렸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정천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아, 그게 말이지, 후우.”
얻어터지기만 했다. 좌수로 옮긴 그의 검은 완벽에 가까웠다. 검법의 완성도, 내기의 운용도, 그리고 눈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속도의 검격까지.
“내가 형씨의 검을 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어서 말이야.”
“깨달은 것? 그것을 지금 이 상황에 깨달아서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곧 죽을 놈이 말이지.’라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다.
“혹여, 시간을 벌려는 속셈인가?”
혹시 지난번 무영문 대공자를 상대했을 때처럼, 원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속셈은 아닐까 진회는 생각했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정천.
“그게 아니라니까.”
정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신경 쓰이는 진회가 얼굴을 굳혔다.
“내가 너무 기뻐서 어딘가에는 떠벌려야 속이 뻥 뚫릴 것 같단 말이라고, 형씨.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인지 떠벌릴 때의 그 쾌감을 알고 싶다고나 할까.”
“주군, 칠공자가 주군께 머리를 맞고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합니다, 끌끌.”
노궁의 조소. 그러나 진회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정천을 응시했다.
“말해 보게.”
“후우, 잠깐 한숨만 더 쉬고. 후—우!”
거친 숨이 점차 사그라들고 호흡이 가다듬어지자 정천이 입을 열었다.
“자자, 내가 지금까지 벽에 막혀 있었단 말이야.”
과거를 회상하는 듯 그의 눈빛이 상념에 젖어들었다.
‘무형검(無形劍). 이것이 무형검이다. 잘 새겨두도록.’
둘째 사형의 한 수를 떠올렸다.
“둘째 사형의 무형검은 도저히 내가 뚫을 수 없었어. 생각을 해봐. 무형검이래.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 중 형태가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말이 되지 않잖아? 검은 형태가 있는데, 검형이 없는 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형씨는 좀 알겠어?”
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닌 걸 알기에 진회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걸 전혀 몰랐어. 알았으면 둘째 사형에게 단 한 수에 무너지지 않았겠지. 그런데 방금 형씨를 상대하면서 그걸 알아버렸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기분이 날아갈 것 같겠어.”
그가 말하는 둘째 사형, 사현이라면 화용진가에서도 가장 경계하고 있는 무영문의 최강자였다. 자연스레 그의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진회.
“주군, 저런 헛소리 따위 무시하시는 게 상책…….”
스윽-
그의 검에 드리운 예리한 검날.
“경고하는데, 그 주둥이를 뭉개버리기 전에 닥쳐라.”
“흡!”
그는 배신자를 믿지 않는다. 한 번 배신한 이라면 충분히 두 번 배신할 수 있으니까.
“말해 보게. 나와의 대결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말이야.”
정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천상 무인이었다. 그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은 순수함이 가득한.
“역시 마음에 드는 형씨란 말이야.”
죽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말해 보게.”
그렇지 않아도 이제 다시 말을 이을 생각이었다.
“간단해.”
진회는 강했다. 대사형의 충고처럼, 광극지관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확실했다. 그런데 그를 상대하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형씨는 유형에 집착하고 있어. 그것도 과하게.”
“유형에 집착한다?”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로부터 왼손잡이는 좌폐자(左撇子)라고 불려 왔지.”
이때 폐(撇)는 손 수(手)와 해질 폐(弊)가 합쳐진 글자이다. 즉, 폐를 끼치는 사람, 혹은 업신여겨도 되는 사람 취급을 당해왔다.
“그 좌폐자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를 가진 가문이 바로 화용진가이고.”
왼손잡이를 환대하는 가문은 없지만, 화용진가처럼 불구 취급을 하지는 않는다.
“강함에 대한 집착이 불러일으킨 참사라고나 할까.”
“그것이 유형에 대한 집착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이더냐?”
“에이, 형씨도. 잘 생각해봐.”
정천이 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은 안된다. 왼손은 안된다.’ 강박적으로 외치다 보니 오른손에만 집착하고 그러다 보니 진가는 극단적인 우수검의 ‘형(形)’에 집착하게 되어버린 거야. 그리고 정반대로.”
정천이 손을 펴 그를 가리켰다.
“그 반감이 극에 달한 형씨는 좌수검에 집착하게 된 거지. 자연스레 좌수검의 형태에 너무 공을 들인 거야. 증명해야 하니까. 좌수검으로도 우수검만큼 뛰어난 성취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둘째 사형이 굳이 무형검이라며 보여줬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고민했어. 대체 왜 무형검일까? 검의 형(形)을 없애야 하는 것일까? 둘째 사형이 나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었어.”
둘째 사형은 그에게 무형검을 전수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단지, 깨달음을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한계를 정하지 않는 거였어. 다시 말해서 한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거지.”
무형검이든, 자연검이든, 그리고 무영신검이든. 상관이 없었다. 한계를 정하는 순간, 한계에 집착하는 순간 그것이 고점이 되어 버린다.
“내가 둘째 사형의 단 일 검을 받지 못했던 이유, 그리고 형씨가 대망(大蟒)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같다고 생각해.”
정천은 진회를 보며 그 스스로를 투영했다. 그리고 그를 보며 스스로가 하늘 위로 쳐 놓은 그물을 끊어 낼 수 있었다.
“이제 보여줄게. 내가 끊은 대망(大網)이 무엇인지.”
정천이 묵룡을 들어 올렸다. 이 싸움을 끝낼 때였다.
‘광극지관(光極之關)이라…….’
광극(光極), 빛의 끝자락.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천은 비로소 세 번째 관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묵빛 검신이 대기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