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103
102화. 선과 악 (2)
십 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뚜벅- 뚜벅-
회랑은 길었다. 길을 걷는 내내 두 부자(父子)는 긴장하여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휑한 오른 소매를 일별한 진윤이 침을 삼켰다.
“…….”
회랑의 끝. 그들은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가주께서 기다리십니다.”
한 사내가 그들을 안내했다. 둘은 한마디 대화도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의 앞에 도달했다.
“원신당 도편의사(度編議士) 진걸, 가주께 인사 올립니다!”
오른 손목만 잘리지 않았다면 작금의 당주가 되었을 아비를 안쓰럽게 쳐다본 진윤 또한 가주를 향해 고개 숙였다.
“원신당 소당주 진윤, 가주께 인사 올립니다.”
높은 단상 위 태사의에 앉아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윤을 한참 훑어보던 가주의 입이 열렸다.
“나쁘지 않네.”
나쁘지 않다는 그의 한 마디. 두 부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화용진가의 사람이라면 그의 평가가 매우 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진걸이 외쳤다.
“쯧쯔…… 어디 불구 놈이 나서고 그러느냐.”
“…… 죄송합니다, 가주.”
화용진가에서 오른손을 잃은 자는 사람 취급을 받지도 못한다.
“네가 소당주라고?”
“그, 그렇습니다.”
“흐음, 너희 당주가 추천할 만하네.”
그의 시선이 좀 전에 두 부자를 안내했던 사내에게 향했다.
“가져와.”
“예, 가주.”
무엇을 가져오라는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자루의 검을 들고 온 사내. 가주가 턱짓으로 지시하자 사내가 진윤의 발 앞에 검을 내려놓았다.
“원신당의 소당주.”
“예, 가주!”
“너희 당주가 부탁해서 특별히 네게 하사하는 거니까, 그 검 잘 쓰도록.”
“가, 가주께서 하사하신 이 검으로 평생을 가문에 헌신하여 보답하겠습니다!”
가주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그래. 어디 한번 얼마나 충성스러운 보답을 할지 본좌가 두고 보겠다.”
“열과 성을 다하여…….”
“시끄럽고, 가져가.”
“예, 가주!”
진윤이 발 앞에 놓인 검을 집어 들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솨아아아아—
달그락!
진윤이 놀라 검을 떨어뜨렸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왜? 마음에 들지 않아?”
“아, 아닙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집어 드는 진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솨아아아아—
그의 뇌리를 강타하는 무언가.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 댔다. 하지만 지금 이것을 다시 떨어뜨린다면 가주의 신임도 끝이었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 검의 이름은 청룡신검. 주인을 찾고 있었지.”
그때, 가주의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꽂혀 들어왔다. 정신이 확 든 진윤이 가주를 올려다봤다.
“너희 당주의 말대로군. 청룡신검이 충분히 주인으로 인정할 만한 자질을 지녔다더니, 끌끌.”
그가 손을 휘휘 저었다.
“가져가라. 십 년 뒤,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몹시 궁금하군.”
십 년 뒤. 진윤은 다짐했다. 십 년 뒤에 진가에서 그 누구보다 인정받는 무인이 되겠노라고. 아버지께서 지난날, 그리고 앞으로 받아 온 멸시를 종식시키겠노라고.
* * *
진윤이 바닥에 뻗어있는 단리우를 내려다봤다.
“입만 산 놈 같으니라고.”
그는 원신당 최고의 기재이자, 차기 대망의 위치에 오를 인물이라고 자신했다.
“끄윽.”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 단리우. 진윤이 질렸다는 듯 혀를 차며 그를 지켜봤다.
“고작 무영문의 똥개 새끼가 질기기는.”
단리우와 그는 태생부터 달랐다. 가문의 인정을 받아 청룡신검까지 하사받은 그. 반면 단리우는 무영문의 직계 제자도, 뭣도 아니었다. 감히 그와 검을 나눌 급이 아니라고 여겼다.
퍽!
일어서려는 단리우의 복부에 발길질을 날리는 진윤.
“커헉!”
울컥, 입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단리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포기하면 편해. 이제 알잖아? 네놈과 나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말이야.”
이미 격의 차이는 느낄 수 있을 만큼 느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일어선다. 심지어.
“그 표정은 뭐야?”
실실 쪼개고 있는 단리우의 얼굴을 마주한 진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단리우가 물었다.
“그럼, 그럼. 괜히 더 큰 고통에 몸부림칠 필요가 없단 말이지.”
“후우.”
단리우가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려 진윤을 바라봤다.
“그럼, 네가 포기하던가.”
“뭐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 짓는 진윤.
“지금 상황이 안 보여?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겠어? 조금만 더 맞았다가는 정말 급사할 수도 있어.”
그런 그를 단리우가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
“너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본 적이 있어?”
“죽음?”
“아니, 다시 물어볼게. 너는 죽음을 각오하고 네 가문을 위해 싸워본 적이 있어?”
죽음을 각오하고 가문을 위해 싸운다? 그럴 일이 그에게 있었을 리가.
“나한테 무영문의 똥개 새끼라고 했지?”
단리우가 씩 웃었다.
“너는 내가 무영문의 똥개가 된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알아?”
설사 토끼 사냥이 끝난 후 삶아 먹히더라도 말이다.
“나는 개처럼 무영문에 내 모든 것을 바칠 생각이거든.”
“대체 왜 그렇게 해야 하지?”
진윤이 얼굴을 찌푸렸다.
“무영문에서 나고 자란 놈도 아니고, 고작 무관에서 뽑혀가는 놈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단리우가 고개를 저었다.
“네 가정은 아예 잘못됐어. 정반대야.”
“정반대?”
“그래. 정반대.”
단리우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얼굴로.
“네놈은 태어날 때부터 깨끗한 공기를 마셔서 그 중요함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탁해진 공기만 마시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끗한 공기를 마실 기회가 주어진 이에게는 그 ‘누군가’가 은인이고, 그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나중에 어떤 이용을 당하든, 그로 인해 개죽음당하든 상관없이 말이야.”
그는 정천과 거래를 한 게 아니다. 단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은혜를 입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갚는 데에 조건이 붙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네 개똥 논리가 다 옳다고 쳐도 네가 날 이길 가능성은 없다니까.”
“그래서 네가 안타까운 거야.”
“뭐?”
목검에 진기를 불어넣는 단리우. 진윤 또한 그의 기운을 느꼈는지, 얼굴을 굳히며 검에 진기를 주입했다.
“나는 무영문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우는데, 너는 네 안위를 위해 싸우니까.”
지금까지의 전력으로 따진다면 단리우가 불리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이 과거 정천이 해주었던 조언이 들어서 있었다.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부딪히면 되는 거야.’
단리우의 신형이 움직였다. 무영(無影), 그림자조차 쫓아올 수 없을 때, 무영신검의 진가가 발휘된다. 의지가 동하는 순간, 몸이 움직인다.
“……!!”
진윤이 검을 들어 올렸을 때, 그땐 늦었다.
빠악!
단리우의 목검이 진윤의 왼쪽 가슴에 닿는 순간, 부서져 내렸다. 동시에 진윤의 신형이 뒤로 붕 날아올랐다.
콰당!
검병만 남은 검을 쥔 채 우뚝 서 있는 단리우와 바닥에 널브러진 진윤. 승부는 명확했다.
짝짝짝!
정적 속에 들려오는 박수 소리.
“그래, 그게 무영신검이지.”
정천의 목소리가 단리우의 귓가에 꽂혀 들었다. 그리고.
우와아아아아아아-!
터져 나오는 관중들의 탄성 소리. 그리고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 이겼나……?”
어안이 벙벙했다. 누군가 뭐라 뭐라 떠드는데 그 어떠한 소리도 명확히 들려오지 않았다. 단리우의 시선이 정천을 향했다.
‘잘했다.’
뿌듯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를 본 단리우는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한 듯 만면에 함박웃음을 띄었다.
“이겼다!”
* * *
원신관의 관주실. 두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사내의 오른 손목이 휑했다.
“끌끌, 졌다고요?”
“…… 면목이 없네, 당주.”
“아니, 형님. 면목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
“그러니까 잘 좀 키우지 그랬소? 예? 내가 소당주 자리까지 내어주면서 지원해줬는데 져버리면 어쩌자는 거요?”
“그건 아우, 네가 아들이 없어, 컥!”
“걸 형님.”
원신당의 당주, 진권. 그리고 그의 배다른 형이자, 소당주 진윤의 아비인 진걸. 이들의 관계는 미묘했다. 오른손을 잃고 불구자 취급을 당하며 당내 서열에서 밀린 진걸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반대로 뛰어난 성취로 당주의 자리를 꿰찬 진권에게는 자식 복이 없었다.
“내가 가주 볼 면목이 없어요, 내가!”
콰앙!
주먹을 내리치자 탁자가 산산조각났다.
“후우, 청룡신검까지 진윤이 그놈에게 줘버렸는데, 지금 이걸 어찌한단 말입니까? 예?”
진권이 머리를 감쌌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할 거요? 예?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좀 해보시오.”
한숨을 푹 내쉬는 진권. 그렇다고 진걸이라고 묘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원신당이 맡은 임무는 무영문의 제자, 혹은 장로와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과 직접적인 싸움을 벌이는 이들은 세 개의 당, 즉 대망을 배출한 고운당, 어진당, 그리고 대평당이었다.
원신당이 해야 할 일은 매년 백여 명의 관도, 즉 미래의 무영문도를 배출하는 종영관의 운영을 망치는 것이었다. 이번 무관대전에서 박살을 내야 원래는 종영관으로 향할 무재들이 원신관으로 선회할 테니까.
“그 무영문 막내 제자 놈…….”
뿌득.
진걸이 이를 갈았다. 윤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무영문의 막내 제자 놈이 비무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윤이가 쓰러지던 순간, 그 막내 제자 놈의 얼굴을 봐버렸다. 그의 아버지를 죽인 후 그의 손목을 자르며 지었던 그 웃음.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당주님, 급보입니다!”
“들어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건네는 서신.
“…….”
서신을 든 진권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왜? 무슨 일인가?”
“…… 당했답니다.”
“당해? 뭐가 당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진권의 동공이 흔들렸다.
“고운당주가 당했답니다.”
“…… 뭐? 대망이 말인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진권. 진걸이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대, 대체 누구한테 말인가?”
“…….”
“말해 보게!”
대망에 오른 인물을 이긴 자.
“막내 제자.”
“……!!”
이제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비무장에 피 칠갑을 한 채 나타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 개 같은……!”
똑똑-
그때 또다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왜, 또!”
“그게……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개 같은 자식이! 내가 지금 손님 받게 생겼어?”
“그게 막무가내라…….”
꼭지가 돌아 버린 진권이 벌떡 일어서서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어떤 놈이…… 헉!”
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본 진권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안녕하쇼?”
씨익 웃으며 그에게 인사하는 인물, 정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