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123
9화. 무영문 일곱 번째 제자(9)
어렸을 적 강렬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특히, 그 기억이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면 말이다.
“백도 놈들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쳐들어와?”
백의쌍마 중 한 사내, 허진이 코웃음을 쳤다.
“온 김에 죽는 거지 뭐, 큭큭.”
또 다른 한 명, 허강이 조롱했다.
“갈! 어디 천한 놈들이!”
용맹한 무림맹의 한 무인이 허진을 향해 검을 날렸다. 그리고.
푸욱-
“커헉-!”
결과는 허무했다. 떨리는 눈으로 심장에 꽂힌 검을 내려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게 네놈과 나의 차이야.”
촤아악-
그가 검을 뽑아내자, 무인의 몸이 피 분수를 뿜어내며 그대로 짚단처럼 쓰러졌다.
“에이, 씨. 의복에 더러운 피가 다 튀었잖아.”
못 볼 꼴이라도 봤다는 듯 얼굴을 구기는 허진.
“맞아, 그때도 저랬어.”
정천이 씩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땐 내 이름이 개똥이였는데.”
사실 이름이라고 하기도 뭐했다. 당시 어린 그를 부리던 이들이 귀찮아서 대충 부르던 호칭이었으니까.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가 있다면 나에게 오라!”
오만방자한 그의 외침에도 좀 전에 그가 펼친 한 수를 목격한 무림맹의 무인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사형, 제가……!”
그때, 무당오검의 일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형, 태극검제 현무가 그를 막았다.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어딘가를 향하는 그의 시선. 그 시선을 따라가자 웬 거지 몰골의 무인이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백의쌍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굽니까?”
“글쎄다. 누구일지 몹시 궁금하구나.”
“예? 사형이 관심을 가진다고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극검제. 그는 무(武)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강한 자만이 그가 관심을 갖는 대상이었다. 놀라서 물으려 할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검을 아느냐?”
“검?”
거지몰골의 무인이 꺼내든 검의 검신은 묵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묵빛이라. 묵철은 희귀하기야 하지만 굳이 더 나을 것도…….”
태극검제가 고개를 저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
“예?”
“저 찬란하게 빛나는 묵빛은 만년한철만이 빚어낼 수 있는 빛이니라.”
“세상에!”
행색만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현호, 자네는 만년한철로 제작된 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만년한철로 제작된 검이라면…….”
떠오르는 검은 단 하나였다.
“천마신검!”
그의 외침에 무당의 다른 제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지어는 천마신검을 입 밖에 꺼낸 당사자인 현호조차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 그럴 리는 없다. 천마신검은 천산 깊숙이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테니까.”
“그, 그럼…….”
아무리 떠올려도 만년한철로 제작된 검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묵혼혈룡검.”
“묵혼혈룡검……?”
혹시라도 그들이 아는 검명이 나올까 했지만,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검이었다.
“자네들은 들어본 적이 없겠지. 하지만 나의 사부께서 말씀해주신 적이 있었지.”
“광진 사조께서요?”
정사대전 이전 백도 최강의 다섯 검수 중 일인인 태무진검(太武眞劍) 광진. 이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렇네. 팔십 년 전 정사대전에서 처음 그 검을 목격한 사부께서는 충격에 빠지셨지.”
그의 말에 다른 제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사대전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런데 묵혼혈룡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무당오검의 둘째, 태을신검 현진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묵빛 검신! 설마, 무명 대협의!”
그의 말에 태극검제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 무명 대협의 검이 바로 묵혼혈룡검이지.”
무명 대협의 묵빛 검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어봤던지라 다른 제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무명의 제자. 전 무림을 통틀어 무명의 제자와 검을 견식해 보고 싶지 않은 고수가 어디 있을까.
“한 번 지켜보자꾸나. 백의쌍마와 과거의 은원이 있는 듯하니.”
그의 말에 다른 무당의 제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 * *
“어이, 형씨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벼운 어투에 백의쌍마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두 번째 놈이로구나?”
어깨에 검을 비스듬히 걸친 채 껄렁하게 걸어오는 정천의 모습에 두 사내가 피식 웃음 지었다.
“흐음,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 그쪽 형씨들 아닌가?”
“가소로운 놈이로군.”
정천이 검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저~짝에 보이죠? 무당오검이라던데.”
그의 말에 백의쌍마가 토끼눈을 한 채 고개를 홱 돌렸다. 태극검제의 얼굴을 확인한 두 사람이 경악했다.
“이런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정보가 잘못됐잖아!”
분명 백도 무림맹의 잡졸들이 흑도맹을 칠 거라고 했다.
“그놈 어디 갔어?”
“이 개 같은!”
“환욱…… 이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천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새겨졌다.
“풋. 재밌네.”
“뭐라고?”
“이 거지새끼가 우리를 놀리는 것이냐!”
셋째 사형의 이름이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오니 재밌을 수밖에.
“아, 그건 맞긴 한데. 일단 우리 결자해지가 필요해서 말이죠.”
“뭐라?”
“결자해지?”
무슨 엉뚱한 말이냐는 듯 두 사내가 미간을 좁혔다.
“나 기억 안 나요?”
“너 따위 하찮은 놈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느냐!”
“흐음…… 역시 당한 놈만 기억하는 건가.”
정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십 오 년 전 일이니까. 기억 못 할 만도 하지. 암, 알아요. 원래 아무렇게나 던진 돌에 맞아 죽을뻔한 개구리를 인간이 이해할 필요는 없죠.”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천을 보며 백의쌍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개구리가 진화해서 호랑이가 돼서 나타나 버렸네? 이걸 어쩌나?”
씨익 웃으며 정천이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끌끌, 이런 미친놈을 보게나. 무슨 소리를 그리 주저리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가지를 잘라버리면 그 주둥이도 더는 놀리지 못하겠지.”
“저놈은 내가 처리한다!”
“무슨 소리! 너는 무당파 놈들을 맡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저놈을 내가 맡는 게 이치에 맞다!”
백의쌍마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떻게든 정천을 맡겠다며 말다툼을 벌였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에 덤비셔.”
순간, 묵룡의 검신에 검붉은 검기가 맺히며 백의쌍마를 향해 쏘아졌다. 두 사내는 경악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콰콰콰콰쾅-!
십 보나 밀려나며 정천의 검기를 간신히 막아내는 백의쌍마. 단 일격으로 정천을 경시하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대체 무슨……!”
“뭐긴, 이제 시작이지.”
정천의 신형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허진이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눈 한번 깜빡할 찰나에 정천은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
씨익.
퍼억!
“커헉!”
정천의 주먹이 복부를 강타하자 허진의 허리가 새우처럼 휘었다.
“이 자식이!”
정천의 뒤를 잡고 검을 휘두르는 허강. 백색 검기가 정천의 등으로 쏘아졌다.
차앙!
그러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그의 검은 묵빛 검신에 가로막혔다.
“재촉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갔을 텐데 말이야, 형씨.”
돌아선 정천이 허강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허강이 검을 들어 올렸다.
츠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크기의 마찰음.
쩌-적-!
쩌-적-!
검신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
그가 든 검은 더 이상 검이라 불릴 수 없었다. 검의 손잡이 부분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퍼억-!
“커헉-!”
그의 복부에도 정천의 주먹이 꽂혀 들었고, 그 또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우, 기분이 어때?”
정천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심정 말이야. 어때?”
두 사내는 복부를 부여잡은 채 간신히 일어섰다.
“대, 대체 누구……!”
여전히 그들은 그를 기억할 수 없었다. 정천에게는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계기였지만, 저들에게는 한낱 유희거리에 불과했을 뿐이니까.
“무향곡.”
“무향곡……?”
기억을 더듬는 사내들.
“그때 말했잖아. 내가 나중에 죽이러 찾아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정천이 나직이 내뱉은 말에 두 사내의 동공이 더없이 확장되었다.
“너, 너, 너, 너……!”
“무, 무명의 제자?!”
씨익.
정천은 입을 다문 채 미소 지었다. 무언은 곧 긍정이었다.
“자, 그럼 이제 그때의 약속을 지켜야겠죠?”
“자, 자, 자, 잠깐만. 우, 우리가 도와줬잖아.”
허강이 급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도와? 뭘?”
“우, 우리가 그 쓰레기통에서 쓰레기 같은 놈들을 치워주지 않았다면 너는 무명 대협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마, 맞아! 우리가 도와준 거잖아!”
정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형씨들, 고마웠어요.”
정천의 반응에 두 사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이 환해진 것과 대조적으로 정천의 낯빛은 어두웠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그. 그…….”
슈욱-!
묵룡이 허공을 갈랐다.
푸욱!
“커헉!”
허진의 심장에 정확히 정천의 검이 꽂혔다.
“내 목숨을 가지고 논 죄는 받아야지?”
저들은 그저 사냥꾼이었고, 그는 사냥감이었다. 아직도 당시 저들의 장난 어린 얼굴들이 기억난다.
쑤욱-
“끄아아…….”
검을 뽑아내자 허진의 입가에서 선혈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감히 내 목숨을 취하려 했으면, 그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잖아.”
허강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그 앞에 빌기 시작했다.
“너, 너도, 아, 아, 아, 아니 공자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놈이 죽이려 했습니다. 제가 아니라 저놈이었어요!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백도의 무인들이 지켜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지만, 정천의 두 눈은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 한 목숨 부지하겠다고 평생을 함께해 온 동료도 팔아버리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정천은 그대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데굴데굴-
몸에서 분리된 그의 머리가 지면으로 떨어졌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눈으로 그의 시체를 일별하고는 정천은 돌아섰다.
“그대의 검은 잘 보았소. 복수는 그걸로 끝인 거요?”
뒤에서 정천의 발걸음을 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수는 아니고, 응징 정도로 하죠.”
“허어……. 본도는 무당의 현무라 하오. 중원 사람들은 본도를 태극검제라 칭하지요.”
“정천입니다.”
“무명 대협의 제자이시오?”
정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겠소?”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정천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현무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혹, 그대는 검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오?”
씨익.
정천이 미소 지었다.
“천하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