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16
15화. 천룡검의 주인 (4)
‘현 시간부로 남궁세가는 대대로 천룡검의 주인을 받들어 모시는 종의 가문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천룡검주 종가 서약.
남궁세가의 직계 자손이라면 어렸을 적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세가사기(世家事記)가 있다. 이제는 수 대(代)가 흘렀지만, 세 자루 천룡검의 주인에 대한 무한한 충성 서약, 그 서약은 여전히 유효했다. 절대로 외부에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남궁세가의 치욕이다. 벌써 이백 년 전의 약속이다.
‘어째서…!’
심지어 묵혼혈룡검의 주인이다. 수많은 세가 선조들의 기록에 따르면 대체로 천룡검주 중 가장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대, 대주? 뭐 하십니까? 지금 저놈이 모욕적인 행동을 했는데 어째서 가만히 계신 겁니까!”
이상한 청년이 검을 자랑하듯 슥 보여주자 상태가 이상해진 남궁훤을 대원들이 불렀으나 그는 지금 답할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그래, 안 그래?] […….]위하는 척 말하는 정천의 주둥이에 검을 박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남궁훤은 참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후환을 감당하지 못하면….’
멸문지화. 천룡검주와의 조우에 대한 상당한 양의 기록이 있다. 대부분은 그들의 종으로서 성심을 다했다는 내용이었지만 간혹 야심이 가득했던 선조들의 기록도 있었다. 결과는….
무림 최고의 검법과 매 세대 최고의 재능이 태어났던 남궁세가가 중원을 휘어잡는 천하제일가가 아닌, 팔대세가의 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덤볐다가 대차게 당해 멸문의 화를 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던 것.
“대주, 뭐 하십니까? 대가를 치르게 해주신다지 않았습니까? 저 쥐새끼 같은 놈을 그냥…!”
“어, 어이, 어이. 안 돼, 잠깐만.”
검은 언제 집어넣었는지 남궁훤이 당황하여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놈이 감히 검을 뽑다 말았습니다. 저런 치욕스러운 짓을 하는데도 가만히 참아 넘길 겁니까?”
왜 갑자기 흥분하고 난리야, 이 미친놈들아!
남궁훤은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쉽게 이들의 분개심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무림인 간의 결투에는 몇 개의 금기가 있다. 개중 하나가 바로 검을 반쯤 뽑다가 다시 집어넣는 행위. 상대를 무시하거나 도발할 때 주로 하는 행위였다.
“감히 이 쓰레기 같은 마교도가…!”
채채채채챙-
심지어 검을 뽑아 드는 이들. 남궁훤이 이마를 짚었다.
“응? 아까 말했잖아? 나는 마교 출신이 아니라니까?”
“아직도 주둥이가 길구나, 이놈! 내 칠절검이 네놈의 그 못된 주둥이를 썰어버릴 것이다.”
“하룡!”
검을 뽑아 들고 뛰어들려던 수하는 남궁훤의 노기를 띤 목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기다리거라.”
뚜벅뚜벅 걸어가 정천의 앞에 선 남궁훤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의 무례함은 내 잊지 않겠다.”
[귀인께 무례한 점, 상황을 헤아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고개를 끄덕이는 정천.
“하지만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간다. 다시 한번 무림맹에 도전하려 한다면 그때는 용서치 않겠다.”
[간곡히 부탁드리니, 노여움을 푸시고, 이대로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정천. 남궁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섰다.
“현무대, 지부로 복귀한다.”
“예, 예?”
어이가 없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궁훤을 바라보는 현무대원들.
“오늘은 적기가 아니니, 근 시일 내에 다시 돌아온다.”
“코앞에 배신자를 두고 말씀이십니까?”
그때 한차례 소란과 함께 입구에 무향곡 주민들이 투기를 내뿜으며 몰려들었다. 그 수는 대략 오십에 달했다.
“멈추시오!”
선두에 선 형우가 소리쳤다.
“감히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쪽수로 보자면 무향곡의 주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상대는 무림맹의 정예다. 아무리 지부의 작은 공격조라고 하더라도 엄연히 무림맹은 무림맹이었고, 심지어 그 우두머리가 남궁세가주의 차남이었다. 감히 도망자들의 집단인 무향곡이 비빌 수 없을 정도의 차이였다.
“두 번 얘기하지 않겠다. 돌아간다.”
하지만 남궁훤은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다.
‘저자가 만약 기록된 것처럼 용력(龍力)을 체화했다면 답이 없다. 우리 가문까지 위험해질 일.’
묵혼혈룡검의 주인.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죽여버리고 그 검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뒤돌아서는 남궁훤과 현무대원들. 무향곡 주민들이 길을 터주자 말없이 비동을 빠져나갔다.
“노사께서 어찌 이곳에….”
원영이 묻자 형우가 뒤편에서 씩 웃고 있는 마완을 가리켰다.
“이 아이가 가르쳐주더군.”
“헤헤, 누님은 내가 살린 거요.”
이제는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맞다. 저 모습이 대체적인 무향곡 주민들의 모습이다. 이곳은 도망자들, 더하자면 무림 공적들이 모인 무법 지대이다. 동질감? 의리? 그런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가치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과 통념은 이곳 현지인들의 일 순위가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이득이 최우선 과제가 될 수밖에 없고 결여된 도덕성과 공동체 내의 통념적인 의리는 개나 줘버려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형우와 함께 온 주민들? 분명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형우를 향해 미심쩍은 눈짓을 한 후 떠나는 사람들. 그에게 무엇을 보상받기로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는 길에 마완에게 들었다. 무림맹이 찾던 아이가 저 아이라고.”
비동 내에는 이제 형우를 더한 넷밖에 남지 않았다.
“무향곡에 새로운 식구가 왔었군.”
“단리우라고 합니다.”
“단리세가? 얼마 전에 멸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네. 아, 나는 이곳에서 작은 무관을 운영하는 지형우라고 하네.”
“…….”
단리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여기에 모인 이들 대부분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자네도 복수를 꿈꾸는가?”
“……그렇습니다.”
“그런가? 누구에게?”
“남궁세가입니다.”
“남궁세가라…. 남궁세가의 가주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남궁세가 전체를 멸문시키고자 하는가?”
“그건…….”
형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복수를 꿈꾸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만,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그리 뛰어난 무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네 혼자서는 조금 전에 마주했던 남궁훤의 한 수도 버티기 힘들어 보이던데, 어떤 묘수로 그들을 향한 복수를 하겠는가?”
“강해질 것입니다.”
형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강해져서 남궁훤을 가뿐히 넘어섰다고 치세. 남궁세가주 남궁환일은 무림 십 대 검수에 들 정도로 강한 상대네. 풍문으로 듣기에, 내공은 이 갑자를 훌쩍 넘겼다고 알려져 있고 말일세. 자네가 이곳에서 백 년을 수련한다 한들 그에게 대적이나 가능할 거라 보는가? 좋네, 절치부심의 노력을 해서 남궁환일을 뛰어넘는 초절정의 고수가 되었다고 치세. 그렇다면 남궁세가 전체를 상대로 홀로 대항할 수 있다고 보는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혼자서는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노사님!”
소년의 희망을 빼앗는 그의 말에 원영이 반기를 들려 했지만 형우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건 너희 남매도 마찬가지라네. 무림맹주를 상대한다? 그게 가능할 거라 보는가? 남궁세가를 상대하는 것보다도 곱절, 아니 수십 곱절은 더 어려운 일이지. 이야기는 대충 들었네. 원룡이는 무림맹으로 끌려가고 자네는 간신히 탈출하여 이곳에 왔다고.”
“그건!”
원영이 정천을 쏘아봤다. 이 남자만 아니었다면 목표를 달성하고 오라비와 함께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 남자만 아니었다면.
“자네도 큰 착각을 하고 있군. 자네들의 계획은 애초에 성공을 거둘 수 없게 설계되었어.”
“아닙니다! 비록 저희가 미약하지만…!”
원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형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희들을 사주했던 인물이 누구지?”
원영의 머릿속에 자신을 ‘연비’라 소개한 여인이 떠올랐다.
“자네들은 무림 사패주(四覇主)에 대해 아는가?”
원영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단리우는 무언가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마대전 이전 과거 네 명의 절대 강자를 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네는 들어본 적이 있구만.”
단리우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해주셨던 이야기에 대해 떠올렸다.
“무극천가의 천강휘, 숭무련의 백용, 화용진가의 진웅, 그리고 무영문의 무명까지. 네 명의 절대자를 사패주라 부른다네.”
무림인이라면 당연하게도 무극천가를 알고 있다. 현 무림맹주의 가문이니까. 하지만 나머지 세력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자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네.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무극천가는 지금도 백도 무림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잘 알고 있겠지만 숭무련이나 화용진가, 그리고 무영문에 대해서는 생소하겠지. 그런데 말일세.”
그럴 만도 했다. 현재의 무림은 백도의 구파일방과 팔대세가, 그리고 천마신교와 흑도맹의 대립 정도가 드러난 전부이니까.
“진정한 무림의 정세는 사패주가 이끌었던 네 개의 세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네.”
“그들이 백도 무림맹이나 천마신교보다 강하다는 말씀이신가요?”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네. 그들은 이미 자네들이 알고 있는 세력 속에서 깊이 관여하고 있지. 가령, 천마신교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이가 누군지 알고 있는가?”
“송백림 부교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천마신교 출신인 원영은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었지만, 그 압도적인 위세며 풍채는 가히 절대자라 할 만했다. 행방이 불분명한 교주보다는 그가 실질적인 천마신교의 일인자라 여겨질 만큼.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무명의 대제자란다.”
“무명이라면….”
“그렇지. 아까 말했던 무영문의 문주란다.”
형우의 시선이 정천을 향했다.
“여기 계신 정천 형님의 대사형이기도 하고.”
* * *
꿈을 꾸었다.
밝게 웃으며 다가오는 사내. 햇살보다 따뜻한 눈빛이었다.
‘안녕. 그동안 즐거웠어.’
그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짜릿했다. 그 순간이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짜릿한 시간은 잠시였다.
‘어, 어째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검이 복부를 찔렀다. 고통은 극심했다. 찔린 상처가 아닌 가슴을 파고드는 저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정천……!’
“아가씨!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간신히 눈을 뜬 유화의 두 눈에 익숙한 얼굴이 잡혔다.
“아가씨! 흑흑,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영령…….”
영령이었다.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괜찮아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아이고, 이걸 어째. 침상이 다 젖어버렸네.”
그렇지 않아도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온몸이 축축했다.
“무슨 일이니?”
“무슨 일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비명 소리에 놀라서 왔는데 아가씨께서… 어휴, 말도 마세요. 제 멱살을 움켜쥐고는 놓아주지를 않으셔서….”
“미안하구나, 영령아.”
영령이 유화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또 악몽을 꾸신 거지요?”
유화는 아무 말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왜….’
정말 악몽이 맞을까? 악몽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기억이다.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그의 검에 찔린 상처가 여전히 쓰려왔지만.
‘아가씨를 찌른 놈은 도주했고, 청해룡이라는 마교도는 잡아들였습니다.’
치료를 받던 와중 모용학이 찾아와 이야기해 주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정천이 마교도들의 도움을 받아 도주했다는 것이다.
그 어떠한 접점도 보이지 않던 이들이 사실은 한패였다?
만약 처음부터 자신을 해칠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무수히 많았다. 그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는 것.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을 찔렀고 무림맹을 피해 도망쳤다. 답 없는 고민에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어떻게 해야 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지.
‘만나야겠어. 그리고 들어야겠어. 네가 정말 나를 해치고자 했던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