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17
16화.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1)
“그게… 무슨 말이세요?”
그러니까 이 한량 같은 인간이 송백림 부교주의 사제라고?
원영이 형우와 정천을 번갈아 보며 답을 구했다.
“형우, 이거 남의 사생활을 너무 네 맘대로 까발리는 거 아니야? 나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고!”
부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노사님은 이 한량…이 아니라 이분한테 형님이라고 하셨고, 이분은 자연스럽게 노사님께 하대를….”
반짝이는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형우와 정말 잘 쳐줘서 이제 약관이 넘었을 법한 정천. 눈을 씻고 봐도….
“흠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네! 그리고 이래 보여도 이립(而立)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거짓말. 원영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억울한 건 형우도 마찬가지였다. 왜 지 혼자 나이를 안 처먹는 거냐고!
믿음이 결여된 원영의 눈빛에도 형우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각설하고. 자네가 이곳에 발을 들인 지 십 년쯤 되었는가?”
“그렇습니다, 노사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무향곡에 들어왔을 때, 형우에게 많은 것을 배웠었다.
“기억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한 사내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지.”
“똑똑히 기억합니다.”
당연했다. 어렸던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갈망을 남겼으니까.
“정천. 혼천칠황신검 중 하나인 묵혼혈룡검의 주인으로 무림 지존에 가장 근접한 사내. 피를 머금은 그의 묵검은 하늘을 가르고 땅을 가르니 머지않아 무림을 평정할 것이다. 전 무림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그를 경배하게 되리라.”
과거 형우가 열의에 차 했던 말을 토시 하나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일화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그런 대단한 사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지….
“자, 잠깐….”
아까 이 한량한테 ‘정천 형님’이라고 하지 않았나…?
“헤헤. 형우, 사람을 너무 구름 위에 태우는 거 아니야?”
부끄럽다는 듯 코를 후비며 웃는 사내.
“이제야 알아보는군. 그렇다네. 이분이 바로 정천 형님이라네.”
“…….”
말도 안 돼!
어린 소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이야기 속 그 주인공이 이 한량 같은 사내라고?
코는 파지 마!
좌절하여 무너져 내리는 원영의 마음속 외침이 들릴 리 없는 정천은 열심히 코를 후비며 그녀를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자자,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서.”
형우의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정말로 복수가 하고 싶나?”
원영과 단리우.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법은 단 하나.”
형우의 시선이 정천을 향했다.
‘형님, 이제는 어쩔 수 없소. 형님도 세력을 형성하지 않으면 대공자와 삼공자의 틈새에서 이용만 당하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말 거요. 그들은 이미 형님을 잡아먹을 준비를 마친 상태요.’
* * *
“맹주.”
“오, 그래. 군사께서 오셨는가?”
‘군사.’
맹주는 평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군사라 부르지 않는다. 맹주의 집무실에는 단둘만 있을 뿐인데도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 지금 맹주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지만, 한담이나 나눌 기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백무각주를 통해 올라온 보고서는 읽어보았소. 마교의 잔당들을 잡아들였다고.”
“예, 그렇습니다. 백무각주와 함께 오랫동안 밀월효전을 지켜보며 계획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구려. 그랬어. 노부도 기억이 납니다. 이 년 전쯤에 이에 대한 보고서를 읽었던 기억이 있구려. 흐음, 그런데 참 희한하다오.”
턱수염을 쓸어 만지는 맹주. 내면으로 분노를 삭일 때 보이는 그의 습관이었다.
“이 년을 철저하게 계획하여 실행하는 날, 우연히도 제 딸아이가 그곳에 발을 들였다니 말이오.”
“그런 변수가 발생한 것에 대해 저 또한 깊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려.”
환욱은 빤히 응시하는 맹주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듯.
‘역시 초절정에 오른 자의 초감각은 무시할 수가 없군.’
신뢰를 쌓았다.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계획 또한 이 년 전부터 혼자도 아닌 백무각주와 함께 계획했던 일이었고, 맹주의 여식, 천유화의 ‘무림행’이라는 돌발 행동은 말 그대로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자신을 의심할 여지가 단 일 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물적, 심적 증거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맹주의 눈빛에는 의구심이 깃들어있다. 십 년간 무한한 신뢰를 주었던 자신을 향해 말이다.
“내, 군사에게 한 가지 실망한 점이 있습니다.”
의심이 아닌 진정 실망이라면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일 뿐이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듯싶습니다. 아가씨를 보호하던 무사도 미처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한 듯 보입니다. 모두 잘못된 인사를 붙인 제 불찰입니다.”
“아니오. 딸아이의 비행을 막지 못한 아비의 잘못이 가장 크겠지.”
빈말이다. 맹주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을 환욱은 잘 알고 있다.
‘백무각주.’
모용학에게 들었겠지. 그의 존재에 대해.
“백무각주에게 들어보니 소호변에 갔던 딸아이가 잘못된 친우를 사귀었던 것 같던데. 그 낭인에 대해 아는 바는 없소이까?”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자가 누구인지.”
“그렇구려. 노부는 그자가 군사께서 붙여놓은 심복인 줄 착각했지 뭡니까.”
환욱은 말을 아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내포하는 법. 지금 부정했다가는 더 큰 의심만 받을 뿐이었기에 고개를 숙인 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맹주의 다음 질문은 뻔할 테니까.
“군사께 부탁드려도 되겠소? 그 쳐 죽일 놈을 잡아 노부 앞에 꿇어 앉혀 달라고 말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잡아들인 마교도를 강도있게 심문하는 중입니다.”
“그렇소이까? 조금 더 힘써 주시오.”
무형의 기운이 그를 강하게 압박해 왔다.
“명심하겠습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그를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졌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는 의미다.
맹주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집무실 밖으로 나온 환욱의 표정이 굳어졌다.
‘후우. 정천, 이 자식. 그곳에서 죽여버렸어야지.’
천유화를 죽이지 못했다. 분노에 찬 맹주가 전격적으로 움직이기를 바랐지만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힘이 많이 약해졌을 줄이야.’
아무리 묵혼혈룡검이 봉인되고 신체에 제약이 가해졌다고 하더라도 고작 모용학 따위에게 무기력하게 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계획만 준비한 것은 아니기에 환욱은 평정을 유지했다.
자신의 집무실에 당도한 환욱은 낯익은 기척을 느끼며 집무실 내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재경각주.”
제갈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대인, 제발 저를 받아주십시오!”
“아, 싫다고! 그만 쫓아와!”
귀찮게 정말. 다 형우 자식 때문이었다. 이상을 좇던 이가 현실의 높은 장벽에 마주하고, 그 장벽을 훌쩍 뛰어넘을 희망을 발견했을 때, 그것에 집착하는 법. 지금의 단리우가 딱 그랬다.
“제발 부탁입니다! 대인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저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아니야. 열심히 수련하면 미래가 있을 거야. 자하동에 쓰여 있는 비문만 잘 읽고 깨달음을 얻으면 너도 절정의 고수가 될 수 있어.”
이건 진심이다. 깨달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굉장한 기연이 될 수 있다. 남궁세가주에 비빌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
‘무영신검(無影神劍)의 검학이라니.’
어째서 사문의 검학이 이곳, 자하동에 적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사형 중 누군가가 다녀갔다는 것이다.
‘누굴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이사형.’
대사형과 삼사형의 따까리로 전락한 넷째와 다섯째, 그리고 죽어버린 여섯째를 제외하면 단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워낙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이라 그 의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밖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시죠?”
어느새 도착한 원영의 거처. 그녀가 쌀쌀맞게 그를 맞이했다.
“네가 데려왔으니 네가 책임져야지.”
암, 그렇지.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요? 무향곡 출신이시라면서요. 과거에 살던 거처가 있으신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해도 벌써 이십 년 전 일이었으니, 정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엇보다.
“여기가 내가 살던 곳인데?”
“거짓말!”
“진짜야. 나 원래 여기 살았었어. 나도 깨어났을 때 신기했다니까? 분명 내가 이십 년 전에 자던 방에서 이십 년 만에 깨어나다니 말이야. 키야, 이거 운명 아니야?”
실제로 그가 이십 년 전에 썼던 방이 현재는 주인이 부재중인 원룡의 방이었다. 분위기라든가, 보수의 흔적이라든가. 바뀐 점은 많았지만.
“…….”
‘그러고 보니.’
원영의 머릿속에 과거 형우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원룡, 현재 네가 들어와 있는 그 방이 바로 정천 형님의 거처였다.’
그때 그 방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오라비와 실랑이를 벌였는지 생각하던 원영은 이마를 짚었다.
“누님, 저는 저쪽 방을 사용하면 되는 겁니까?”
이제는 자하동에 숨어 지내기 힘든 단리우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원영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래, 마음 편히 지내렴.”
한없이 부드러운 반응.
“왜? 뭐요?”
“이야, 마완이라는 놈이 통찰력이 있는 건가?”
영계를….
원영이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아하하, 장난이야, 장난.”
“……그런데.”
원영이 머뭇거렸다.
“왜? 할 말 있어?”
“그 약속, 아직 유효한 건가요?”
그 약속?
“제 오라비, 구해주시기로 했잖아요.”
고민이 많았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내뱉는 말.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열여덟 소녀다.
정천이 씨익 웃어보였다.
“당연하지. 구해줘야지.”
그의 말에 안심하는 원영.
하지만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지금은 힘들고.”
“예? 그러면 언제?”
지난 밀월효전에서 무리하는 바람에 다시 몸이 망가져 버렸다. 그것 때문에 형우에게 내내 잔소리를 들었지.
‘형님, 설마 혈룡기(血龍氣)까지 소진하신 겁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곧 진원지기를 갉아먹는 행위입니다. 그러다가 종국의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혈룡에게 잠식당하거나 진기가 고갈해 세상 하직하거나!’
형우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단서를 잡으려면 꼭 필요했던 일이다. 묵룡이 봉인되고, 단전은 진즉에 파괴됐으니까 말이다.
정천은 알면서도 혈룡기를 사용했다. 심지어 삼적(三滴)이나. 급전이 필요해 고리대금을 당겨쓴 것이나 마찬가지랄까. 해결 방법? 시간이 약이다. 차근차근 진기를 회복하는 데 전념하는 방법밖에. 물론 얼마나 걸릴지는 알지 못한다.
“에이, 차라리 단전을 새로 만들고 말지.”
자신도 모르게 상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예? 단전을 새로 만들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무리 무림지존이라도 그건 어려울 거예요.”
원영은 황당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반응이었지만, 정천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게? 왜 새로운 단전을 만들 생각은 못 하고 있었지?”
이 년간이나 끙끙대며 풀지 못했던 난제가 명쾌하게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원영이 경악한 얼굴로 그런 정천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