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19
18화.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3)
이 빌어먹을.
“후우.”
하마터면 젊은 나이에 요절할 뻔했다. 다행히 주화입마에 빠져 광인이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흐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불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중단전이 남아있다. 대신.
“이런 혼탁한 기운이라니!”
맑은 시냇물에 미꾸라지가 한 마리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하긴, 미꾸라지보다는 용의 기운이긴 하지.”
혈룡기였다. 중단전에 모였던 자연기가 역류하여 상단전으로 침투하려는 순간, 혈룡기가 반응했다. 외부에서 자연기를 에워싼 채 보호하던 혈룡기가 오히려 역으로 중단전 내부로 파고들었고, 융화되었다.
“흠. 난 회과육을 먹을 때도 양념장에 찍어 먹는 편이라고.”
양념장을 부어 먹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는다. 왜? 그러면 그 양념의 강한 향으로 인해 본연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바삭바삭함, 그 신선함이 사라져버린다고!
마찬가지다. 자연기는 자연기 그대로 중단전에, 그리고 혈룡기는 혈룡기 그대로 상단전에 머물러야 하는 것. 필요할 때만 융합하면 그만!
그런데 그 둘의 기운이 섞여 버렸다.
“흐음. 기분 탓인가?”
그런데 의외로 괜찮다. 운기를 해보자 융합된 기운이 오히려 예상치 못한 동반의 상승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혈룡기를 사용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시전자의 피를 담보로 할 것. 혈액에 응축된 내기와 상단전을 형성하고 있는 혈룡기를 융합해 순간적으로 강력한 힘을 폭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혈액에 농축된 진원지기를 빼앗기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 시전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 등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런데 실제로 활용을 해봐야 알겠지만, 진원지기를 빼앗기지도 않고 혈룡기를 사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꼴이랄까.
“앞으로 회과육도 양념장에 부어 먹어볼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비동 내부로 단리우가 들어왔다.
“왜?”
“대, 대인, 괜찮으십니까?”
“너, 이 씨…….”
확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놈 덕분에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마냥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단리우가 호법까지 서주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대인.”
“뭐, 알았으면 됐어.”
굳이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지. 빚을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고.
“어쨌든, 갑자기 비동으로 들어온 이유가 뭔데?”
“어, 그러니까, 그게. 일단 비동이 붕괴되는 줄 알고….”
그건 자연기를 흡수하느라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지력(地力)의 변화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오지 말랬잖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또 뭐?”
“지 노사가 무림맹에 끌려가는 바람에 원영 누님이 찾아와서….”
“뭐? 누구? 지형우?”
“예….”
형우가 무림맹에 왜 끌려가지? 머리를 굴려봤다.
그때였다. 비동 안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
“형님?”
형우였다.
“어? 어? 지 노사님? 지 노사님이 어떻게 여기에….”
“마완에게 원영이가 사라졌다는 소리를 듣고 그 아이를 찾던 중이었네. 원영이는 여기에 없는가?”
“…….”
분명 원영은 형우가 무림맹에 끌려갔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형우는 원영을 찾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한 단리우가 벙쪄 있을 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차린 정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뱀같이 생긴 놈 짓이었구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에구구구구.”
정천이 허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영이 찾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예, 예? 적어도 한 시진은 넘었습니다.”
단리우의 대답을 들은 정천은 대충 생각해봤다. 마완 혼자서 일을 저지르기에는 무공이 변변찮아 보였다. 공범이 있을 것이다. 무림맹이든, 천마신교 출신 놈이든.
“안내해. 무림맹 놈들이 지나다니는 길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유추한 형우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걸었다.
* * *
항주에서의 삶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확실한 건, 무척이나 행복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생일 선물로 진검을 받고 기뻐하던 오라버니, 음식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정 가득했던 어머니,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까지. 네 가족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독고’라는 진짜 성 대신, ‘황’이라는 성을 써야 했던 것, 무가(武家)가 아닌 상가(商家) 행세를 했다는 점이 조금 이상했지만 어린 그녀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단 하루, 그 하루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고작 여덟 살이었던 당시, 갑작스레 무인들이 장원을 덮쳤다.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고, 장원은 쑥대밭이 되었다. 모든 전각이 불타올랐고, 너무도 친절하고 자상했던 장원 무사들이 죽어 나갔다. 어머니는 오라비와 자신을 피신시키고 홀로 장원을 지켰다. 일격. 일격에 적들을 쓰러트리는 새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봤지만,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무향곡에 들어오게 되었고, 충격적인 경험을 반복했다. 서로가 서로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것은 주민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묵인되었다. 오라비와 자신, 단둘만의 힘으로 생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녀의 빼어난 용모는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다. 한층 한층 성숙해질수록, 위험의 농도는 그 배로 짙어졌다. 언제 그녀를 노리는 짐승들의 발톱에 짓이겨질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준 이가 바로, 지 노사였다. 진형과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도 편견 없이 모두를 지켜주었다.
“지 노사님까지 잃을 수는 없어.”
이미 무림맹에 붙잡혀 버린 오라버니에 이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맡아준 지 노사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무림맹 안휘지부와 무향곡이 통하는 길은 동죽로(東竹路), 단 하나뿐이다. 비도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그녀에게 있어 몸을 숨길 수 있는 지형지물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곳이 그녀의 비도술을 펼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면 대로로 이어지기 때문에 기습을 가하기 힘들다.
마완은 분명 반 시진 전에 지 노사가 무림맹 무인들에게 포박되어 갔다고 했다. 빠르게 경공을 펼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무작정 뛰었다.
‘찾았다!’
저 멀리 보이는 무림맹의 백색 무복. 재빨리 대나무 위로 몸을 날린 원영은 그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총 다섯.’
저번에 남궁훤을 따라온 현무대의 인원들이었다. 원영은 최대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관찰했다.
“음?”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지 노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무림맹 무인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한 순간, 원영은 급히 대나무를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렸다.
“크하하하하. 누님,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오?”
“마완, 이 자식!”
낄낄거리며 다가오는 마완. 그리고 무림맹 무사들. 어느새 사방이 포위되었다. 원영은 양팔 소매 속에 감춰둔 비도를 손에 쥔 채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했다.
“아이고, 지 노사가 얼마나 밤일을 잘했길래 누님을 이렇게 안달 나게 했을까? 하긴, 원래 대머리들이 정력이 좋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더러운 입 닥쳐.”
“에이, 뭐 허구한 날 홍등가에 가서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다 헌납한 더러운 년으로 소문 쫙 퍼졌는데 언제까지 순결한 척할 거요?”
이죽대는 놈의 주둥이에 비도를 박아버리고 싶었지만 원영은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키야, 진짜 끝내주게 예쁘단 말이야. 그때, 대주만 아니었어도….”
원영의 전신을 훑어보며 입술을 핥는 무림맹의 무인. 욕구에 불타오르는 그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헤헤. 정말 끝장나지 않습니까, 대인? 여태 얼마나 많은 사내를 거치면서 농익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청력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역겨운 소리를 지껄이더라도 원영은 꾹 참았다.
“시끄럽다. 그 더러운 배신자 놈에게 붙은 저년을 포박해라.”
마완까지 합세해 총 여섯의 사내가 둘러서 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다. 천잠사까지는 아니었지만, 내공의 흐름을 제어하는 무명사로 만들어진 무림맹 특제 밧줄을 손에 쥔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휘리리릭-
목을 향해 날아드는 밧줄을 피하자 한쪽에서 허리를 향해 다른 밧줄이 날아들었다. 간신히 피했지만, 마치 살아 움직이듯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밧줄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아악!”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때, 사방에서 날아온 네 쌍의 밧줄이 목과 허리, 그리고 두 팔과 두 다리를 결박했다. 그리고 이들을 지휘하고 있는 이가 원영의 앞에 서서 그녀의 전신을 훑어봤다.
“본좌는 제갈균이라고 한다. 네가 순순히 그 배신자 놈에 대한 정보를 발설한다면 큰 화는 면할 수 있을 터이다. 허나, 입을 닫는다면 어떤 해가 네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원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제갈균을 노려봤다. 배신자에 대한 정보? 그녀 또한 단리우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만 알 뿐, 정보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 사내들이 모를 리 없다.
‘백도라는 놈들이… 하는 짓은 홍등가를 전전하는 흑도와 다를 게 전혀 없구나.’
“경계할 필요 없단다. 네 백옥 같은 피부를 조금도 망치고 싶지 않으니 순순히 우리가 묻는 질문에만 답해준다면 네게 해가 될 것은 없다.”
말은 점잖게 하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음심에 가득 찬 역겨운 눈빛. 팔을 휘저어보지만, 그녀를 옭아맨 밧줄을 풀 수는 없었다.
“후우.”
원영은 두 손을 길게 늘어뜨렸다. 싸울 의지가 전혀 없다는 자세. 제갈균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들과 겨뤄봐야 몸만 상할 뿐이라는 것을 눈앞의 여인은 잘 알고 있음을 확인했다.
“여기는 사방이 너무 개방적이에요. 조용한 데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미를 살짝 좁히며 얼굴을 붉히는 원영.
“부대주!”
그 모습에 안달이 난 사내들의 시선이 제갈균을 향했다.
“흠흠, 듣던 대로구나.”
마완에게 듣던 대로 쉬운 여인. 정보? 그딴 게 어디 있겠는가? 몸으로 때우려 하겠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방법뿐이니까. 안휘에서 으뜸가는 미모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튕기지도 않고 이리 쉽게 자신의 몸을 내준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언제 저런 여인을 품어보겠는가.
“그럼….”
“대인, 저쪽 개울 뒤편에 아주 작은 굴이 하나 있습니다, 헤헤.”
제갈균이 턱짓을 하자 마완이 앞섰고, 그 뒤를 원영이 따랐다. 그의 말대로 작은 개울 뒤편에 둔덕이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굴이 뚫려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소녀는…… 단둘이 은밀한 대화를 하고 싶어요.”
“하하, 본좌도 저 검은 놈들과 함께 네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단다.”
제갈균이 수하들을 돌아봤다.
“저쪽으로 물러나 있거라.”
“흠흠. 부대주, 너무 힘을 빼지는 마시오. 저 계집이 축 늘어지면 뒤 순번들이 곤란하오.”
“낄낄. 맞소, 우리 몫도 좀 남겨주시오. 마지막엔 힘겨워서 신음도 흘리지 않으면 재미가 없지 않소? 그렇지 않더냐, 막내야?”
무림맹. 정도를 걷고 협을 행한다? 이들이 바로 그 무림맹의 자랑스러운 무인들이다.
수하들을 뒤로한 채 제갈균은 원영과 단둘이 굴 안으로 들어왔다.
‘방법을 찾아야 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제갈균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좀 전까지의 음심에 가득 찼던 눈빛이 아니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것. 사내의 음심을 파고들어 원하는 바를 얻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빼어난 미모는 어린 그녀에게 저주였다. 하지만 성숙해진 그녀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지금껏 통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록 이 때문에 위기에 빠졌지만, 또한,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몸이… 뜨겁습니다, 대인.”
톡 하면 터질 듯, 아찔한 미음(美音)이 제갈균의 남심을 흔들었다. 원영이 의복을 슬쩍 끌어 내렸다. 흔들리는 눈의 초점.
원영의 눈빛에 확신이 찼다.
“어서… 소녀를….”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는 원영. 한 발자국 더. 둘 사이의 간격이 사라졌을 때, 원영의 체향이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부탁드립….”
원영은 말과 동시에 품속에 숨겨둔 비도를 꺼내 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의 가슴께로 내질렀다.
턱!
“헉!”
하지만 그녀의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제갈균.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