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20
19화.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4)
“흐음.”
처음 운기를 해 보았을 때는 섞여버린 혈룡기와 자연기가 괜찮은 조화를 이루어 놀랐었다. 그런데 조금의 문제가 생겨버렸다.
“형님, 그런데 눈동자의 색깔이… 어? 다시 돌아왔네. 어어, 또? 이, 이게 뭡니까?”
혈룡기를 사용했을 때처럼 시야가 자꾸 붉게 물들었다. 적광(赤光)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발현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별거 아냐, 신경 꺼.”
별것 아니라고는 말했지만, 정천은 속으로는 불안정하게 들끓는 기혈을 잠재우기 위해 분투를 하는 중이었다.
애써 드러내지 않으며 경공을 펼치는 도중, 눈앞에 무성한 대나무 숲이 펼쳐졌다. 동죽로, 안휘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 꼬마는?”
단리우가 보이지 않는다.
“뭐, 천천히 따라오겠죠.”
이 둘이 펼치는 경공의 속도는 감히 단리우가 따라오기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세찬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달려 나가는 중에도 둘의 호흡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하셔도 되는 겁니까?”
형우의 말에 정천이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참, 너는 어떻게 나에 대해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는 거지?”
형우와 작별한 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도 자신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삼사형에게 들었겠지.’ 하면서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아, 그런데 형우가 삼사형을 어떻게 알더라…?
“설마 잊으신 겁니까……?”
황당하다는 듯한 형우의 표정. 도통 모르겠다.
“뭘?”
“제 직책 말입니다!”
“네 직책? 뭐가 있었어?”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듯 정천이 반색을 하며 형우를 바라봤다.
“맞다, 너 비영각에 갔었지?”
너무도 오래된 기억이라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했는데 떠올라버렸다. 자신이 무영문의 정식 제자가 되었던 그날, 형우는 무영문 산하 정보 조직인 비영각에 입각했었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저 이제 비영각주입니다만…?”
“정말? 네가 각주야?”
“후우….”
물론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점조직이긴 하지만 비영각은 무림 최대의 정보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영문의 정식 제자들이 자신들의 문파를 숨기고 살아가듯 비영각의 대원들 또한 각계각층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비영각 대원이 잠입해 있지 않은 무림 내 정보 조직은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림 내의 정보 중 비영각을 거치지 않는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소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어?”
“그건…!”
삼공자의 짓이었다. 연비를 내세워 비영각 대부분의 실권을 차지해 버린 것. 그렇기에 자신은 현재 거의 유명무실한 각주에 불과할 뿐이었다.
무영문이 첫 번째로 두는 기치는 바로, 무한 경쟁이다. 경쟁 속에서 도태되면 패배자가 될 뿐이고 살아남지 못한다. 비영각은 무영문 정식 제자라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산하 조직이었지만 그 조직의 지분을 차지하는 것 또한 제자 간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삼공자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그 수완이 월등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눈앞의 괴물과 같은 절대적 무공을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그렇고, 대체 단전도 파괴되었는데 어찌 그리 평안하십니까? 혈룡기는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운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아, 이거? 그냥, 뭐 새로 만들었어.”
“예? 뭘 새로 만들어요? 단전을 말입니까?”
“응, 이번에 단전 하나 장만했지.”
물론 조금 불안정하지만 말이야.
긴 머리카락을 휘릭 뒤로 넘기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정천을 보며 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냐는 듯.
“어? 저기 있나 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어디 말입니까?”
형우의 눈앞에는 울창하게 자란 대나무밖에 없었지만, 정천은 달랐다. 자연기의 감응(感應). 전신으로 느껴지는 오행의 기운이 체화되었다.
‘목(木)과 토(土)의 기운 위에 생명의 빛이 꺼져가고 있다.’
이상함을 감지한 정천이 속도를 올렸다.
“따라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아가는 정천. 형우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따랐다.
* * *
“부대주, 나오셨습니까? 하하.”
“어떻습니까? 끝내주던가요? 낄낄.”
제갈균이 소굴에서 나오자 수하들의 농을 건네왔다. 한 치 앞으로 다가온 자신들의 차례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역시 명문가의 수신제가(修身齊家)! 차림에 흐트러짐이 없으십니다!”
거사(?)를 치르고 왔다고 하기에는 그들 앞에 선 제갈균의 의복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아, 이년이 벌써 기진맥진해서 내 수발을 못 들으면 어떻게 하나 벌써 걱정이네, 참.”
안휘성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문파인, 황산파의 이 대 제자인 구일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몸이 끓어올랐다.
“그럼, 제가 마교도에 대한 두 번째 취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형님, 너무 진을 빼놓으시면 안 됩니다!”
“예끼, 이놈아! 그거야 네가 감당할 문제고.”
낄낄거리며 제갈균 앞으로 다가선 구일담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무거운 얼굴로 그를 직시하고 있는 제갈균.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부대주…?”
그리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
서걱.
“……!”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이 그의 목이 잘려 나갔다.
“부대주!”
제갈균은 말이 없었다. 단지, 다음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 뿐.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수하들도 부랴부랴 자신들의 병장기를 꺼내 들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아무리 그 명성이 타 세가에 밀린다고 하더라도 팔대세가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제갈세가의 검법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그 급에서 너무도 차이가 났다. 순식간에 목과 몸이 분리되는 이들.
“후우, 쓰레기 청소는 언제나 불결해.”
“어어어…….”
마완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대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 대인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상황을 파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마완은 어떻게든 무릎을 꿇고 그에게 빌었다.
“살려줄 것이다, 걱정 말거라.”
“저, 정말이십니까?”
“그럼, 당연하지.”
“가, 감사합….”
서걱!
“크아아악!”
불에 탄 듯한 고통이 마완의 뇌를 진동시켰다.
“사, 살려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고통을 잊으려는 것인지, 악에 받쳐 외치는 마완. 말끔히 떨어져 나간 왼팔에서 여전히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살려준다고 했지, 팔을 자르지 않는다고는 않았지 않느냐.”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아, 걱정 말게나. 내가 ‘직접’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본좌는 더러운 벌레를 손으로 잡아 죽이는 것이 썩 내키지 않거든.”
서걱!
“끄으으으으….”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혹시 어릴 적에 파리를 잡아 죽여 본 적이 있느냐?”
서걱! 서걱!
이번에는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도저히 정신을 차리고 있기 힘들 만큼 극심한 고통이었다.
“난 죽여본 적이 없다. 단지, 날개를 떼고 다리를 몽땅 떼어냈을 뿐이지. 이후에 살아남는 건 그놈의 몫일 뿐이니까.”
마완에게서는 더 이상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에 기절을 해 버린 것.
“쯧쯔… 쓰레기 같으니. 어쨌든 본좌는 널 죽인 적이 없다.”
* * *
정천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 살아서 움직이는 이는 단 한 명, 원영뿐이었다. 일격에 죽음을 맞이한 무림맹의 무인들, 그리고 팔다리 몽땅 잘린 채 결국, 생명이 다한 마완까지. 처참한 광경이었지만 정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림맹 무인 대 죄수들의 비무대회를 개최한다?”
원영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마비무대전(正魔比武對戰).
“형님, 이건 함정입니다.”
“나도 알아.”
“삼 공자의 계략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흐음.”
합종연횡.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군이, 오늘의 우군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이들 사형제의 관계였다. 삼사형이 언제든 덫을 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정천은 다르게 생각했다. 삼사형이 굳이 현재의 자신을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있다면.
“대사형이야.”
“예?”
“삼사형은 이 싸움에 나를 끼우고 싶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대사형이 판을 키우려고 하는 거지.”
정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정말, 정말로 당신은 강한가요?”
“뭐?”
“지 노사님께서 그러셨어요. 당대의 천하제일인 후보에 가장 가까운 건 정천 대협이라고.”
천하제일인? 아직 대사형도 넘어서지 못했는데 천하제일인에 제일 가깝다니.
“흐음, 뭐…….”
그때였다.
“원영아!”
“누님!”
원영이 정천 앞에 무릎 꿇었다.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를 살려주세요, 제발!”
그녀의 표정은 간절했다. 무림맹이 호구도 아니고, 천마신교의 잔당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비무대회를 여는 게 아니었다. 말만 비무지 사실상 천무옥에 갇힌 마인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이었다.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전혀 없다. 모인 사람들의 눈앞에서 악명 높은 마두들을 굴복시킴으로써 백도 전체의 사기를 고취시킬 뿐 아니라 무림맹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도 사 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대회였다.
정마비무대전까지 남은 시간은 이레. 지금 당장 길을 나서지 않으면 원룡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흐음.”
“약속하셨잖아요. 오라버니를 구해주시기로!”
“그랬었지. 약속은 했었지.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어떤…?”
물론 약속이니까 지키지 않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전에.
“네가 제갈 뭐시기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는 말해줘야지. 네 오라비 목숨값으로 말이야.”
씨익.
제갈균의 입장에서 구태여 정마비무대전을 알리고자 원영을 살려둘 이유가 전혀 없다. 마완을 이용해도 상관없고 말이지. 말인즉슨, 원영이 모종의 약속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말해.”
“…….”
“여기, 무향곡이야. 너도 여기서 구를 만큼 굴렀잖아?”
그동안 험한 꼴 많이 당했을 것이다. 배신도, 위협도, 절망도. 그리고 그만큼 자신이 행하는 데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거고, 경험대로 배우는 거니까. 자신의 혈육을 살려주겠다는데 무슨 짓인들 못 할까.
“내가 말해주랴?”
사실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이 판을 설계한 게 누군데. 단지, 그 입으로 말한다면 봐줄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입에서 진실이 나오는 게 아니라면….
“‘묵혼혈룡검주와 동행하며 그의 동태를 보고하라.’였어요.”
씨익.
“재밌네.”
원영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해.”
“예?”
뭘 그렇게 하라는 거지?
“내 일거수일투족, 보고하라고. 그놈한테 말이야.”
“……?”
“뭘 그렇게 얼빠져 있어? 그러지 않으면 네 오라비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대인….”
“뭘 감격씩이나.”
사실 정천의 입장에서 나쁠 게 없었다. 오히려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
“적에게 자신을 보임으로써 적의 행동 범위를 예측한다라. 좋은 전략이로군요.”
역시나 형우는 정천의 뜻을 간파했다.
“그놈한테 전해, 내가 무림맹으로 갈 거라고. 판을 깔아줬는데 어디 한번 신명 나게 놀아봐야지, 낄낄.”
정천이 미친놈처럼 혼자 웃고 있을 때, 단리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단리우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무릎 꿇는 게 요즘 유행이야?”
얘나 쟤나 다 무릎을 꿇고 그래.
“꼭, 꼭 강해지고 싶습니다! 대인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얼씨구, 어디 놀러 가는 줄 아나 보네?”
“죽음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결연에 찬 얼굴. 정천이 턱을 쓸었다.
“그래?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원영과 단리우를 슥 둘러보는 정천.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정천이 품에서 두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뭐긴, 여기 쓰여 있는 거 보면 몰라?”
〈신체 포기 각서.〉
대체 그딴 게 품속에 왜 있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