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23
22화. 그대로 멈춰라 (3)
“이게 대체 무슨…….”
“응? 뭐가? 쩝쩝.”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정천과 그런 그의 행태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는 원영.
“아니, 지금 뭘 하시는 거죠?”
“보면 몰라? 육포 먹잖아.”
“그게 아니라…!”
“역시 싸움 구경할 때는 육포가 최고지. 너도 먹을래?”
말을 말지. 한숨을 내쉬는 원영. 지금은 적진의 한복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객잔의 뒤편 공터.
“뒷감당은 대…인께서 하시는 거죠?”
“뭔 뒷감당?”
“혹시라도 우야가 위험해진다거나 하면….”
“위험할 일 없어. 쟤 은근 실력 있거든. 제 가문의 이름발에 잡아 먹혀서 지가 얼마나 약한지도 모르는 저런 핫바지쯤은 뭐….”
하수는 절대 고수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고수는 하수의 실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그 격차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면 말이다. 남궁우용의 내공의 깊이가 결코 단리우보다 얕다는 말이 아니다. 세가에서 얼마나 많은 영약과 값진 약재들을 복용했는지, 그 내공의 깊이는 단리우에 한참 앞서고 있다. 하지만 아직 체내에 내공을 제대로 갈무리조차 못 하는 삼류일 뿐이었다. 물론 아직 무르익지 않은 단리우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겠지만.
“만에 하나, 우야가 이기더라도 위험해요.”
사실 승패는 상관이 없었다. 저들은 단리세가를 마교로 규정했고, 결투에서 지더라도 어떻게든 단리우를 잡아들이려 할 게 뻔했다. 주위에는 이들을 방해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 대결을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면 남궁세가도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남궁훤이 자하동에 침입했을 때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천을 마주하고는 물러났었다.
“그땐 도망가면 되지?”
“도망…이요?”
“응, 왜? 문제 있어?”
“아깐 뒷감당은 신경 쓰지 말라면서요? 당신이 뭔가를 해준다는 말 아니었어요?”
“응, 같이 도망쳐줄 수 있지.”
암, 도망쳐야지. 안 그러면 저놈들을 다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 이후엔 남궁세가 전체를, 그리고 백도 전체까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무너무너무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만에 하나, 그래야 할 수도 있겠지만.
우웅- 우웅-
묵룡에게서 검명이 울려왔다.
‘흐음, 확실히 문제가 있긴 있어.’
혈룡기가 중단전에 흡수된 후부터였다.
한마디로,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특히, 얼마 전 제갈균이 죽인 무림맹 놈들의 사체에서 사기(死氣)가 풍겨오자 혈룡기가 요동을 쳤었다.
‘이랬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오래된 기억 속의 그날.
‘대사형이 보낸 놈들. 천마혈령대라고 했었나?’
숫자를 세보지는 않았지만 천 명쯤이었던 것 같다. 죽이고 또 죽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 있는 사람은 그 자신뿐이었고, 피에 절은 묵룡은 끝없이 갈구하고 있었다. 더 많은 피를 달라고.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그때는 묵룡이 봉인되기 전의 일이다. 현재의 묵룡은 봉인됐고, 심지어 불안정한 자연기와 혈룡기가 섞여 버렸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차후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살인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우야!”
정천이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단리우와 남궁우용의 대결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천의 장담과 달리, 단리우는 매번 남궁우용에게 밀리고 있었다. 단리세가의 단천비영검(斷天飛影劍)과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과거부터 교류가 많았던 만큼 서로의 검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었다.
“네 형이 그립지 않더냐?”
우득!
남궁우용의 말에 단리우가 이를 악물었다.
“그 죽어가던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한때는 친우라 여겼던 이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어쩌겠는가? 마교와 내통한 네 아비를 원망해야지.”
“그 입 닥쳐.”
“기억하느냐? 둘째 형님께서 무림맹에 입단하시던 날, 함께 축하의 기쁨을 나눴던 것을.”
인연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 연이 틀어졌을 때 악연의 골은 더욱더 깊어지는 것.
“그때 네가 나한테 고백한 비밀이 하나 있었지, 하하.”
“다, 닥쳐!”
당황하는 단리우를 놓치지 않은 남궁우용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남궁세가 검법의 기본은 강검(强劍). 검속이 빠르지는 않지만 묵직하다.
천뢰일격(天雷一格).
광폭하게 울려 퍼지는 우렛소리와 함께 바위도 뚫을 기세로 내질러지는 검. 하지만 아무리 대지를 가를 만큼 강한 일격이라 하더라도 상대에게 닿아야 강한 것이다. 심지어 남궁세가의 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단리우였다.
“흐음, 역시 남궁세가는 남궁세가인가? 기본은 되어 있네.”
정천의 시선은 단리우가 아닌 남궁우용에게 가 있었다.
“어어?”
쿠구궁!
“크윽!”
속도보다는 파괴력에 집중한 남궁세가의 검. 하지만 검속이 느린 만큼 그것을 보완할 만한 창궁팔영(蒼穹八影)이라는 뛰어난 보법을 가지고 있다. 극성에 이르면 여덟 잔영을 남기며 상대에게 다가선다는 쾌속의 보법. 물론 남궁우용의 실력이 그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발끝도 못 따라가긴 했지만,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히자 단리우가 당황하여 검을 마주한 것이다.
“애송이 녀석.”
남궁우용이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채 이검을 내질렀다. 단리우가 일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에 승기를 잡아놓으려는 의도였다.
“쯧쯔, 그래. 기본은 기본이고, 자질은 자질이고.”
검의 자질이 무엇일까? 탄탄한 기본기? 검술의 정교함? 빠른 성취? 근골? 물론 그 모든 재능과 신체 조건이 어우러져 무인의 실력을 좌우한다. 하지만 개중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순간적인 판단력이다.
채앵!
단리우는 잘 알고 있었다. 힘 대 힘으로 맞불을 놓는다면 절대 자신이 승기를 잡을 수 없음을. 보법 또한 따라갈 수 없음을. 하지만 불리하다고 해서 못 이길 것도 없다. 상대의 장점을 역이용하고 단점을 파고들면 되니까.
빠른 발은 쾌검으로 묶는다. 단리우의 쾌검이 남궁우용의 하단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검속이 느린 남궁우용은 몸을 돌려 피할 수밖에 없다. 그때를 노려 상단을 올려 치자, 손속이 급해지는 남궁우용. 이제부터는 단리우의 일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래, 저게 재능이고 자질이지, 암.”
물론 단리우가 우세를 점하고 꾸준히 공격을 감행한다고 해서 이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장담은 없다. 결국,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무공의 깊이니까. 지금의 단리우는 아직 내공의 수준이 턱없이 낮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남궁세가 무인들의 눈빛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음?”
두 주먹을 꽉 쥔 채 초조한 기색으로 둘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는 여인. 남궁소소. 특히, 단리우가 수세에 몰리려 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뭔가 수상했다.
“이대로는 위험해요.”
“그렇긴 하지.”
“지금 이게 재밌어요?”
심각한 자신과는 달리 장난기를 잔뜩 머금은 정천의 눈빛을 본 원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정천에게 따졌다.
“뭐야? 재미없어? 나는 싸움 구경하고 불구경이 제일 재밌던데? 이런, 육포가 다 떨어져 버렸네.”
아쉽다는 듯 툴툴거리는 정천을 보며 원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정천 형님의 무공이 그렇게 궁금하더냐? 뭐랄까…. 솔직히 말해서, 무서웠다. 원초적인 두려움을 끌어내는 강함이었고, 잔혹함이었다. 적에 대한 그 어떠한 자비도 없는 핏빛 눈빛,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손속. 그래, 한마디로 불멸의 검귀라고 할 수 있었지. 천무오제? 모르겠다. 그들의 실력을 직접 경험해 본 것은 아니니.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 때, 그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이 무림에서 손에 꼽을 게야.’
거짓말.
안 되면 도망이나 치자는 사람이 어떻게 현 천무오제에 비견될 만큼 강할 수 있겠는가. 원영은 형우가 해 준 말의 구 할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어? 야, 꼬맹이! 그게 아니지! 그때는 살짝 틀어서, 이렇게! 아, 아니! 내력이 부족하잖아! 조금 더 내력을 활용해서 공격하라고, 어휴!”
손을 붕붕 흔들며 훈수를 두는 정천. 원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헉헉…!”
단리우로서는 미칠 노릇. 자신의 검술이 결코 남궁우용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히려 우세했다. 그렇게 미세하게 상처를 늘려갔지만 결정타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역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내공의 깊이였다.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거지.’
마음이 심란해질수록 그의 검 끝은 무뎌져 갔고, 이제는 완벽한 수세에 몰려버렸다.
‘이대로는 안 돼.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가 초조해하면 할수록 더욱 밀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공심환(功心丸)만 있었더라면…!”
공심환은 내공 수련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단리세가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심법의 깊이를 더해줄 영약이다. 단리세가의 희망이고, 미래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남궁세가에 짓밟혀 꽃 한번 못 피워보고 지게 되었다.
“꼴사납게 변명하지 마, 꼬맹이.”
어느 때보다 차가운 정천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울분을 토해내려던 단리우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
“네 검은 상대보다 정교하고, 네 순간순간의 판단력은 상대를 압도하고 있어. 내공? 물론 누군가와의 대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 하지만 내공이 조금 부족하다고 상대를 못 이길 것도 없어. 없는 것에 억울해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을 활용해.”
정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송곳같이 단리우의 뇌리에 꽂혔다.
“네가 익힌 검술이 단리세가의 것만은 아닐 텐데?”
“무영신검!”
자하동의 전인이 새겨놓은 검학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일성(一成)에도 다다르지 못했는데….”
“물이 깊지 않으면 배를 띄울 수 없다. 한 잔의 작은 물을 작은 웅덩이에 붓고 겨자씨를 띄우면 배로 삼을 수 있겠지만 잔을 그곳에 띄우면 곧바로 바닥에 닿을 것이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어느새 검과 검의 뜨거운 춤사위는 멈춰 있었다. 마치 정천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힘이라도 있는 듯.
“깊이가 깊어 큰 배를 띄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만, 네 내공의 깊이가 웅덩이에 불과하다면 겨자씨를 띄우면 그만. 그 겨자씨가 황금빛이 나는 새싹일지, 거무죽죽한 쭉정이가 될지는 네가 정하는 것.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부딪히면 되는 거야.”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단리우. 흔들리던 검 끝이 곧게 섰다. 가빴던 호흡은 안정을 되찾았고, 그의 눈빛에 어렸던 불안감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킥킥, 역시 재능이 있단 말이야.”
평정심을 되찾은 단리우의 모습에 놀라기는 원영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몇 마디 조언을 해줬을 뿐인데.’
단리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야의 확장. 인간은 가지고 있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때가 있다. 상황에 따라, 감정 상태에 따라 그것을 볼 시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단리우가 그랬다.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자신이 가진 패가 얼마나 더 많이 있었는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척!
단리우의 검이 남궁우용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이, 이건 단리세가의 검술이 아니야. 이놈! 마, 마교의 검술을 익혀놓고 부끄럽지도 않느냐!”
씨익. 단리우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진심이냐?”
“…….”
“물었잖아. 진심이냐고. 진심으로 이 검법이 역천의 마공으로 보여?”
그 어디에도 역천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
‘이겼다.’
몰락한 가문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자신이 안휘 최고의 명가이며 중원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남궁세가의 직계를 이겼다. 자신의 가문을 멸시하고 핍박한 그 남궁세가의 검을 처음으로 꺾었다. 드디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막막하기만 했던, 까마득히 높아 도저히 올려다보기 힘들었던 그 벽을 기어오를 발판이 될 못을 하나 박았다. 또 박고, 또 박아 그 정상에 올라 벽을 깨부수면 된다. 이제 희망이 생겼다.
단리우는 희열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갈망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그때.
“그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라. 어차피 네가 이곳에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다.”
건조한 장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공자의 패배는 뼈아프고, 수치스럽지만 그 원흉을 없애면 세상에 드러날 일은 없다. 여유롭게 검을 뽑아 드는 장양. 남궁가의 피를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남궁가에서 태어나고 사냥개로 살아온 지 서른 해다.
단리우와 장양의 거리는 오 장(五長).
“그 검이 공자님의 목을 꿰뚫는 속도가 빠를까, 내가 네게 다가가 목을 쳐내는 속도가 빠를까? 우리 내기 한번 해볼까? 목숨을 걸고 말이지.”
장양은 여유로웠다. 비록 남궁세가 무력의 핵심인 창천단에 들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성취를 이룬 그에게 있어 약관도 되지 않은 애송이 따위, 일검도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변수를 계산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오, 그 내기 재밌겠는데? 그럼 나도 동참할게. 네 검이 저 꼬맹이한테 닿는 게 빠를까? 아니면 이 검이 이 아가씨의 목에 꽂히는 게 빠를까?”
씨익.
정천이 있었다. 남궁소소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