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26
25화. 서막 (2)
“무림 동도 여러분, 학수고대하던 그날이 밝았습니다!”
와아아아아!
백도 무림인들의 축제가 열렸다. 진행자의 한마디에 연무장을 둘러싼 수만 백도인의 떠나갈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천의 마공으로 무림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들! 대마두들에 대한 단죄의 현장을 지켜보고자 모인 동도들의 마음은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저와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피의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되셨습니까!”
와아아아아아-!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의 열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과연 이번 정마비무대전에서는 어떤 걸출한 인재가 출사표를 던질 것인가. 한껏 부푼 기대로 열띤 논쟁을 벌이는 이들,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자 눈빛을 빛내는 이들, 틈을 비집고 상행위를 하는 잡상인들과 언제나 그렇듯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철저히 사주 경계를 하는 무림맹의 무사들까지. 각양각색의 군상이 모여 축제의 날을 즐기고 있었다.
“휘유. 역시 인간들은 싸움 구경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아해. 쩝쩝.”
“그러는 대인이야말로….”
죽립을 쓴 채 인파 사이에 끼어든 정천 일행. 마치 마실 나온 사람처럼 육포나 뜯고 있는 그의 모습에 원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걱정 마. 인생사 그렇게 긴장해봤자 더 나아질 거 없어.”
참, 말이라도 얄밉게 하지 말든가. 그녀에게 있어 이 비무는 가볍게 즐길 대상이 아니다. 오라비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중요한 날이었다.
“참, 그 제갈균인가 뭔가한테 보고는 열심히 하고 있지?”
“신경도 쓰이지 않으세요?”
“내가 신경 쓸 게 뭐가 있어? 쩝쩝.”
자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는 것. 썩 좋은 기분이 아닐 텐데도 정천은 너무도 태연했다.
“그는 현무대의 부대주라고요. 무림맹은 이미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겉보기에는 말이야. 그런데 그럴 일은 없어. 그놈은 속으로 딴마음을 품었거든. 아, 정확히는 그놈의 집안이지. 제갈세가. 거긴 이미 천마신교에 붙었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과거 유운과 왕호장의 무사들로부터 도망치다 만났던 무림맹의 재경각주, 제갈영. 당시 그 또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정천은 그를 쫓았던 이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혈영대(血影隊). 그놈들이었지.’
대사형이 부리는 암살대였다. 천마신교 부교주인 대사형이 쫓는다? 무림맹의 주요 간부 중 한 명을 척살하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재경각주가 백무각주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삼사형이 어떤 일을 벌이려는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얼마 전 삼사형에게 온 전서구를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갈세가뿐만 아니었다. 이미 많은 문파와 가문들이 천마신교 쪽에 붙었다. 마치 안개처럼 스멀스멀 그들의 앞길을 잠식하고 있었던 것.
“이따 보면 알 거야. 무림맹에서는 우리의 동선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사실 신경 쓸 틈도 없을걸? 뭐, 얼마 전에 변수도 없앴고 말이지.”
정천의 시선이 남궁소소를 향했다. 남궁세가에서도 정천의 존재를 무림맹에 전할 일이 없다. 만약 그랬다가는 자신들의 세가가 위협을 받을 텐데 미쳤다고 그럴까.
‘단 하나, 변수가 있다면….’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군중들의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맹주님이시다!”
무림맹주이자 천무오제 중 일인인 무극검제(無極劍帝) 천무현이 등장하자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여인.
‘천유화.’
“오랜만이네.”
정천이 읊조렸다. 물론 그때와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아, 성별이 바뀐 건가. 그때의 남장이 아닌, 길게 내린 머리에 긴 치마와 저고리까지.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하지는 않았어도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미모였다.
“오오….”
딱!
“죽고 싶냐?”
자신도 모르게 나온 감탄에 결국 뒤통수를 가격당한 단리우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넌 근데 왜 안 가냐? 가도 된다니까?”
남궁소소가 굳이 구태여 함께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 약조도 호북에 도착해서 세가로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저도 굳이 안 돌아가도 된다니까요?”
“아니, 인질이면 인질답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노력하고, 막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인질도 인질 나름이죠. 저는 일반적인 인질과는 조금 다르거든요.”
“오호, 참으로 신박한 인질일세.”
물론 남궁소소도 언젠간 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단리우와의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기에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것뿐이다.
“가식적인 인간….”
“누님…!”
맹주가 단 위에 서자 원영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자신의 삶, 가족, 그리고 친우들까지.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 자에 대한 처절한 원망이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들었다.
턱.
원영의 어깨 위에 따뜻한 손이 올려졌다.
“분노하고 또 분노해. 저 사람을 미친 듯이 죽이고 싶으면 그 살기를 숨기지 말고 드러내.”
원영의 시선이 정천을 향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그녀의 눈빛이 묻고 있었다.
“그로 인해 네가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정천의 말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말이야.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져야 해.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져야 해. 그래야 네가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는 거야.”
정천의 진심 어린 조언.
차츰 맹주를 향한 원영의 살기가 걷혔다. 그녀는 현명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다. 그렇기에 이 끓어오르는 살기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을 수 있다.
“그래, 그거야. 네가 지금 취해야 할 자세는.”
정천의 손길이 원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원영은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시작하려나 봅니다!”
단리우의 외침에 일행의 시선이 비무대로 향했다.
짧은 인사와 함께 맹주가 단 위에 마련된 귀빈석의 중앙에 자리하자 그 주위로 무림맹의 주요 인물들이 착석했다. 천유화가 아무리 맹주의 여식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고, 자연스레 정천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없어졌네.’
원영을 진정시키는 사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자, 첫 번째 마두가 등장합니다!”
쿠구구구궁-
무대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쇠사슬에 칭칭 묶인 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자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삼 년 전 귀주에서 양민들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수많은 무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귀주검귀(貴州劍鬼)! 귀주검귀를 상대할 용감무쌍한 고수께서는 나와주십시오!”
진행자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오르는 한 사내.
“내가 하겠소.”
“오오, 화산파의 매화검룡이다!”
우와와아아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 터져 나오는 함성. 구룡의 일인인 화산의 매화검룡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야, 아주 아주 놀랍네~ 구룡이라니! 너~무 놀라워.”
정천의 입가에 비웃음이 머물렀다. 사실, 이 비무는 짜고 치는 도박판이었다. 무림맹의 인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나 비무대 위로 올릴 수는 없었다. 막말로 죄수에게 백도의 인물이 지기라도 한다면 어쩌겠는가? 무림맹의 위상은 추락하고 아주 골치가 아파질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사실 비무대에 오를 수 있는 인물들은 사전에 미리 정해놓는다. 형식적인 절차만 있을 뿐, 죄수들을 상대로 압도할 수 있는 인물들만 올리는 것이다.
“간악한 네놈을 단죄하기 위해, 나 청풍이 이곳에 왔다. 그 죄악은 내 검으로 씻어주겠노라.”
웅혼한 내공을 실은 매화검룡의 외침이 장내 군중들에게 선명하게 들려왔다.
“오우, 등골에 닭살 돋았어.”
정천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화검룡과 귀주검귀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묶고 있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진 귀주검귀가 팔을 붕붕 돌리며 그의 발 앞에 주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위선으로 가득 찬 놈들. 네놈들이나 나나 다를 게 뭐지? 어차피 사람 죽이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간악한 마두는 그 입을 다물라.”
“그래그래, 그렇게 위선을 떨어야 더러운 백도 놈이지.”
“그 입, 다시는 놀리지 못하게 하겠다.”
“본좌도 알고 있단다. 여기가 내 묫자리라는 거, 끌끌.”
매화검룡과 귀주검귀의 격돌은 싱겁게 끝났다. 아무리 과거 악명을 떨치던 대마두라고 하더라도 삼 년을 심법 한번 제대로 수련하지도 못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귀주검귀가 매화검룡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몇 번 검을 받아내던 귀주검귀는 결국 다섯 합 만에 매화검룡의 검에 심장이 뚫려 죽음을 맞이했다.
와아아아아-!
학살극의 시작을 알리는 대결과 함께 군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 * *
“군사.”
“예, 맹주.”
맹주의 시선은 비무대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이 언제쯤 이빨을 드러내겠는가?”
“그건 미지수지만 아무래도 얼마 전 밀월효전에서 잡혀 온 인물들이 무대 위에 오를 때 움직일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청해룡. 청해룡은 그들에게도 중요한 인재이니 말입니다.”
물론 그 자체라기보단 그가 무대에 올라섰을 때 나타날 인물이 훨씬 중요하겠지만.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백무각의 인원은 연무장의 동북쪽에, 적무각의 인원은 서남쪽에 배치되어 있고, 청무각과 황무각의 인원은 예상 퇴로에 매복 중입니다.”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맹주.
“수고가 많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지, 계획대로만 진행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유화가 보이지 않는군.”
사실 맹주는 유화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이곳이 전쟁터가 될 것을 알면서 딸아이와 동행하고픈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여식이라도 맹의 기밀 정보를 누설할 수 없었고 유화의 강한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백무각주가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가 아이를 신경 쓰고 있다면 그나마 안심이로군.”
마교의 잔당들이 목표로 노릴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유화였다. 이번 소요에서 그들에게 맹주의 여식만큼 달콤한 먹잇감이 없을 테니까. 물론 스스로의 몸을 지키지 못할 만큼 약한 아이는 아니다. 좀 전에 비무대 위로 올라온 매화검룡보다도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다. 하지만 객관적 전력은 딸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에 의미가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불상사는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맹주를 움직일 수 있다. 환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천, 네놈이 나설 차례가 곧 올 것이다. 어떻게 할 테냐?’
군중 속 어딘가에 있을 정천. 그가 취할 행동에 따라 판도는 바뀔 것이다. 대사형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그가 할 행동은 하나다.
‘그 아이를 죽이든지, 아니면 죽도록 놔두어라. 그래야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환욱이 상념에 빠진 사이에도 계속해서 비무는 이어졌다. 점차 무르익는 분위기 속에서 쇠사슬로 온몸이 묶인 한 사내가 나왔다.
“밀월효전! 그 피에 젖은 잔혹한 살육 놀이의 정점에 서서 천 명의 무인을 도륙한 남자, 청해룡이 등장했습니다! 그 누가 이자의 피를 향한 광기를 멈추겠습니까?”
진행자의 진부한 안내와 함께 군중들의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 후기지수의 정점에 서 있는 사내, 태극신룡. 그를 기다려온 군중들의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그자는 내가 상대하겠소.”
누군가의 외침에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중성적인 목소리, 훤칠하다 못해 아름다운 외모의 사내가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누, 누구…?”
당황한 진행자가 물었다. 사내가 군중들을 향해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유운이라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