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27
26화. 역사는 반복된다 (1)
“저 사람!”
원영은 비무대 위로 오르는 사내를 즉각 알아봤다. 정천과 동행했던 남장 여자. 천유화였다.
“호오… 삼사형. 설계는 참 기가 막혀? 쩝, 분명 대사형이 짜놓은 놀이판일 줄 알았더니.”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삼사형과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묻는 듯한 얼굴.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
원룡 구출 작전은 별거 없었다. 원룡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를 노려 그를 낚아채 도망치는 것. 물론 그때를 맞춰 천마신교의 침입자들이 적당히 휘저어줄 것이다. 혼란 속에서 이왕이면 그가 백도인들을 더 많이 죽여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특히, 무림 맹주라든가.
하지만 삼사형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다. 당연히 최소 손실, 최대의 효과를 누리고 싶겠지. 맹의 전력 손실을 막으면서도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천마신교와 전쟁을 불사할 명분을 줄 수 있는 열쇠.
“천유화.”
맹주의 단 하나뿐인 피붙이를 죽여버린다면 삼사형이 원하던 그림이 나올 것이다. 정마대전. 물론 그것은 정천이 원했던 그림이기도 하다.
대사형을 마주할 기회.
유화를 처음 만났던 날, 삼사형이 준비했던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유화를 죽여야 했지만, 첫 번째 기회에서 그는 차마 유화를 죽이지 못했다.
“나한테 주는 두 번째 기회인가?”
환욱의 눈은 ‘그녀를 죽여.’라고 말하고 있었다. 백도 무림의 정점에 있는 사내. 그 앞에서 마교도의 손에 그의 여식이 죽는다. 모든 백도인을 분개시키기에 얼마나 좋은 그림인가.
“그럼 움직여 볼까.”
* * *
백 년 전,
중원 무림은 침체기를 맞이했고 그로 인해 오랜 기간 마도에 점령당했다.
하지만 백도 무림은 끝까지 싸웠고 결국, 처절했던 정마대전은 기나긴 혈투 끝에 정파 백도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 이후 마도의 지주인 천마신교는 천산으로 돌아가 숨을 죽였고, 중원 무림을 다시 장악한 백도는 더 이상의 마도 군림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무림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당시 정마대전의 최전선에서 백도를 이끌었던 사패주의 일인, 무극검신 천강휘가 초대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백 년 후.
‘고인 물은 썩는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항상 하던 말을 떠올린 유화는 눈앞에 선 사내를 지그시 바라봤다.
“풋, 무슨 꿍꿍이지?”
원룡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열흘은 굶은 듯 비쩍 곯은 몰골에 안광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꿍꿍이는 무슨. 그때 끝내지 못한 승부를 가리고자 하는 것뿐이다.”
백도? 마도? 대체 누가 백도고 누가 마도인지.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비무대 위에 올려 조롱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이런 게 진정 의(義)와 협(俠)을 추구한다는 백도의 길인가?
“그렇지. 내가 아무 힘도 쓰지 못할 때라면 네가 나를 압도하며 죽일 수 있겠지, 끌끌.”
“그럴 리가.”
유운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것이다.”
유운이 고개를 돌려 단상 위를 바라봤다. 무림맹주 천무현.
‘아버지.’
눈이 마주친 천무현은 무표정했으나 유화는 잘 알고 있다. 지금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 옆에 앉아 있는 환욱.
씨익.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정천, 그자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에게 물어볼 게 많으실 텐데요.’
지난밤, 환욱이 찾아왔다. 모용학은 항상 그를 조심하라고 당부했었다. 맹주인 아버지는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지만, 그는 항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그리고 그는 드디어 이빨을 드러냈다. 맹독이 잔뜩 묻은 독니를 말이다.
‘내일 청해룡이 나올 때 비무대 위에 오르시지요. 그러면 원하던 ‘그’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드러낸 독니는 치명적이지만 달콤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찔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덜미를 내줄 수밖에.
유운은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정천, 그자를 다시 만나야 한다.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만나야 할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쉬이이이익-
파공성이 들렸고 스치는 순간 유운이 몸을 틀었다.
피융-
유운의 어깻죽지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은 바닥을 뚫고 깊숙이 박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대 소란이 일었다.
쓰려오는 어깻죽지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시야는 점차 흐려졌다. 둘러싼 군중이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아버지….’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뛰어오던 아버지는 복면을 쓴 누군가에 의해 막혔다. 아버지의 일검에 복면인의 몸이 두 동강 났다. 또 한 명, 두 명, 연달아 수십 명이 달려들었지만, 아버지는 막아서는 이들을 거침없이 뚫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아버지의 몸이 느려지는 게 보였다. 아버지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만….
‘뒤…?’
유화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검이 높이 들린 채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아…. 역시 목덜미를 내주지 말았어야….’
달콤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함정이었다. 독사에 목덜미를 물려 죽음을 기다리는 한 마리 생쥐가 된 꼴이었다.
촤악-
그 순간, 햇빛을 반사하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검을 들고 있던 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안녕, 오랜만이네. 내 노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유운의 두 눈이 커졌다.
그다. 그가 나타났다.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결과인가. 독사의 맹독을 견뎌낸 것인가.
그런데.
“누가… 노예야…, 이 개새x야…….”
그 말을 끝으로 유화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 * *
정천은 서늘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화살 하나가 유화의 어깻죽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원영.”
“예.”
“네 오라비는 네가 책임져. 이제 곧 난장판이 될 거거든.”
마치 정천 자신이 난장판을 만들 것처럼 말한다고, 원영은 생각했다.
“알겠어요.”
“그럼 시작해 볼까?”
그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얼마 안 가 그의 말대로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군중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마교도들이 날뛰자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채로 격돌이 벌어졌다.
‘그 화살 니네 편이 쏜 거 아냐, 바보들아.’
마교도 입장에서는 신호탄 정도로 생각했겠지. 정천은 소란한 군중들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위험.’
시선은 유화를 향해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필시 독화살에 맞았을 것이다. 유화가 휘청거리는 가운데 단상에서 뛰쳐나온 맹주, 천무현이 보였다.
‘저 아저씨도 상태가 안 좋은데?’
마찬가지로 중독된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난 범처럼 돌진하는 천무현. 천무오제의 일인다웠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
정천이 결정해야 할 차례였다.
유화의 머리를 향해 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와의 거리는 오 장. 정천의 왼쪽 눈이 붉게 빛났다.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은 착각. 오랜만에 온몸으로 느끼는 음속의 돌파.
느릿하게 떨어져 내리는 검을 바라보며 정천은 발을 놀렸다. 자객의 검이 유화의 목에 닿기 직전, 묵룡의 묵빛 검신이 자객의 몸을 갈라버렸다.
핏빛 사이로 그녀의 멍한 얼굴이 들어왔다.
“안녕, 오랜만이네. 내 노예.”
무너져 내리는 가녀린 몸을 받아 들었다. 입술을 움직여 뭐라 말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으니 넘어가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유화를 한 차례 바라본 정천의 시선이 단상 위를 향했다.
“흐음.”
아쉬워하는 삼사형의 눈빛. 정천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가씨!”
모용학이 뒤늦게 비무대 위로 올랐다.
“또 네놈이냐!”
“또 한발 늦으셨네?”
“네놈, 정체가 뭐냐!”
정체? 뭐긴 뭐야.
“대천마신교의 부교주 송백림의 전언이다!”
‘삼사형, 방법은 하나가 아니라고.’
“버러지 같은 백도의 쓰레기들아, 듣거라. 우리 대천마신교가 중원 무림을 다시 지배하기 위한 위대한 첫발을 내디뎠으니, 그 목을 깨끗이 닦고 기다리거라. 네놈들의 피로 성을 쌓고 마도천하의 초석으로 삼을 것이리라.”
웅혼한 외침에 군중 모두의 시선이 정천을 향했다. 슥 돌아보니 자신이 시선을 끌 동안 원영은 이미 원룡을 빼돌렸다. 원영의 임무는 완수다. 그렇다면.
“이 자는 그 첫 번째 제물로 바칠 것이니, 그리 알도록.”
“네놈이 감히!”
천무현의 살기가 폭발했다. 온몸을 저며오는 중압감. 쏘아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심장을 터트려 죽일 것 같은 눈빛. 여타의 무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백도 무림의 정점에 선 자의 무게는 역시나 달랐다.
‘그렇게 철저한 삼사형이 만독불침(萬毒不侵)에 가까운 맹주에게 아무런 독이나 먹였을 리가 없는데…. 역시 아비의 힘은 대단한 건가? 아니면 천무오제가 대단한 건가?’
죽음의 위험을 감지한 혈룡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거기까지. 더 다가오면 큰일 나요.”
역시 아직 불안정한 중단전과 봉인된 묵룡으로 천무오제의 일인을 상대하는 것은 버겁다. 하지만 무공의 조예만이 싸움의 승부를 가리지는 않는다. 누가 더 약점을 잘 파고들 수 있느냐, 그런 면에서 정천은 우위를 선점했다고 할 수 있다.
“내 딸의 손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네놈은 물론 네놈과 관련 있는 그 모든 것을 모조리 씹어 먹어 줄 것이다.”
“오우, 얼마 전에도 누군가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때와는 그 느낌이 차원을 달리했다. 심살(心殺)의 경지에 오른 것인지 이대로 있다간 살기에 온몸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론 정천의 입가는 그 어느 때보다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맹주, 유화 아가씨를 그자와 함께 보내십시오.]천무현이 고개를 홱 돌려 환욱을 쏘아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냉정을 되찾으시고 저자의 검을 보십시오.]검? 다시 고개를 돌려 딸아이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묵빛 검신. 일반적인 검신과는 다르지만 드물게 묵철을 이용해 검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강철에 비해 그리 뛰어날 것도 없는데도 희귀성 때문에 비싸기만 한 묵철검을 선호할 이는 많지 않다. 물론 그것이 묵철이라면 말이다.
“서, 설마….”
햇볕이 스며들자 검붉은 핏빛이 검신을 감쌌다. 바로, 만년한철(萬年寒鐵)의 오묘한 빛깔이었다.
[그렇습니다. 과거 사패주 중 일인인 무명(無名)의 묵혼혈룡검입니다.]무명.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최강자의 검이다. 가슴이 철렁였다. 무인의 피가 끓어올랐다. 딸아이가 인질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이 뒷전이 될 만큼.
[그렇다면 저자는 누구란 말인가?] [현(現) 묵혼혈룡검주이자, 무명의 제자입니다. 그리고.]환욱이 텀을 두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천, 꾀는 제법이었다만… 뒤처리를 나에게 던져두다니.’
환욱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정천을 맹주의 적으로 만들어놓는다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 게 뻔했으니까.
‘정천, 네놈은 나에게 빚을 진 것이다.’
[천마신교 부교주, 송백림의 하수인이 아닌, 그와 겨룰 인물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맹주.]* * *
졸졸졸졸-
시냇물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어렴풋이 밝게 뜬 해가 비쳤다.
“으윽!”
“여어, 일어났어?”
익숙한 목소리. 꿈에서나 듣던 그 목소리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그가 씨익 웃으며 반기고 있었다.
“여긴….”
“아까 약초꾼이 말해줬는데, 뭐라더라? 기산이랬나?”
시원한 바람이 살결을 스쳤다.
‘시원….’
“헉!”
어깻죽지에 헝겊이 칭칭 감겨 있었다. 상의가 벗겨진 채. 소스라치게 놀란 유운이 두 손으로 몸을 감쌌다.
“봐, 봤어?”
“뭘?”
“그, 그….”
유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그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정천. 유운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봉긋하게 솟은….”
“그, 그만!”
봤다. 봐버렸다, 자신의….
“그만? 뭘? 고독(蠱毒)이야, 고독.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그래서 네 어깻죽지가 봉긋하게 올라왔지.”
유운은 부풀어 오른 왼쪽 어깨를 확인했다.
“대체 누가 그걸 그딴 식으로 표현하는데!”
“치료를 해줘도 뭐라 그러냐?”
한숨을 내쉬는 유운. 현실로 돌아온 유운은 그동안 꿈속에서 보정되었던 정천에 대한 심상(心象)을 단박에 깨버릴 수 있었다.
진짜 정천이, 그의 실물이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이야, 유운.”
그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