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28
27화. 역사는 반복된다 (2)
탁– 탁- 탁- 탁-
어두운 회랑을 걷는 사내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회랑을 지나 거대한 철문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쿠웅-
그가 그 앞에 서자 철문이 열렸다. 양옆으로 도열한 석상, 그리고 그 끝 단상 위 태사의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칠흑의 곤룡포와 대비되는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그리고 오른쪽 눈을 관통하는 긴 자상.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 걸어가 그의 앞에 부복했다.
“마도천하(魔道天下)! 혈세무림(血世武林)! 신, 제갈영, 대천마신교의 부교주님을 뵙습니다!”
“…….”
정적만이 흘렀다. 촌각이 지나고, 일각, 이각이 흘러도 답이 없었다. 제갈영의 턱 끝에서 갈 곳 잃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가 누군가?”
심연 깊숙이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 천마신교 부교주십니다.”
“그렇지. 난 부교주 송백림이다. 교주의 혈통이 아닌.”
예로부터 교주의 혈통은 정해져 있었다. 천마신교의 삼성혈통(三姓血統)이 아닌 이상 교주가 될 수 없다. 검마종의 독고 일파와 환마종의 단목 일파, 그리고 구마종의 혁련 일파.
“독고 일파는 내 사랑스러운 사제가 잘 처리를 해줬네. 백도 무림을 이용해서 말이지. 물론 제 딴에는 본좌의 세력을 줄이려는 의도였겠지만.”
독고 일파가 몰락한 것은 천마신교 전체로 봤을 때는 큰 타격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송백림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쁠 게 없었다. 그로 인해 더 빠르게 세력 장악을 할 수 있었으니까.
“술 한잔하고 싶구나.”
송백림의 한마디에 태사의 우측 아래에 한 사내가 호리병을 든 채 나타나 부복했다. 송백림의 눈이 빛나는 순간, 호리병은 둥실 날아 그의 손에 잡혔다.
꿀꺽.
인기척 하나 없이 허공에서 나타난 사내나, 아무렇지 않게 허공섭물로 호리병을 받아 든 송백림이나. 제갈영은 이곳 천마신교의 괴물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자네도 한잔할 텐가?”
“아, 아닙니다! 교주님! 제가 어찌 감히…!”
“교주?”
“죄,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푸흡.”
쓰디쓴 독주를 들이키는 송백림.
“크으-. 좋구나. 술맛도 그렇고. 교주라….”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교주가 앉아야 할 태사의의 현재 주인은 자신이다. 하지만 교주가 될 수 없다. 그 성을 갖지 못했기에. 물론 크게 상관은 없었다. 교주, 혁련운은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고, 천마신교는 거의 장악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 ‘거의’였다. 완벽한 장악이 필요했다. 그래야 삼성혈통이 아닌 자가 천마신교 역사 최초의 교주의 위(位)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교주와 같은, 교주에 버금가는. 이런 수식어는 참으로 듣기 껄끄럽단 말이야. 교주가 되어야지.”
그렇기에 백도의 인물들을 포섭해 신세력을 구축했다. 천마신교의 구세력만 교내에 포진해 있다면 교주의 위에 오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 무림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동조도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차근차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놈이 또다시 나를 방해하더군. 끌끌.”
정천.
백도를 이용해 독고 일파의 마지막 일족들까지 찾아냈다. 백도의 무인들이 그들을 죽이기만 했으면 됐다. 다른 일족들의 반발 없이, 심지어는 그들의 분노까지 이용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백도를 통해 죽이기만 하면 됐는데 정천이 나타나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두 번이나.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지.”
이 년 전 그날. 얼굴에 새겨진 긴 자상이 욱신거렸다.
‘둘째 놈의 방해만 없었으면 그놈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그 검도 뺏어오고 말이지.’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을 살폈다. 둘째 사제가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막내를 죽이고 혈룡기를 익혀 정점에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래, 그놈은 지금 어디로 숨었던가?”
“독고가의 계집이 소호변의 객잔에서 정천, 그자를 만나기로 했답니다. 정천은 현재 맹주의 여식과 동행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복수에 눈이 먼 독고 일파의 여식은 자신의 발목을 옭아맨 사슬이 점차 스스로를 조여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 조사께서 내린 기회인 것인가?”
눈엣가시 같은 정천, 자신의 교주 자리를 넘볼 새싹, 그리고 무림일통에 방해가 될 적의 가장 큰 약점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마리 토끼를 한자리에 모았으니, 이제 토끼 사냥을 나설 사냥개만 보내면 되겠구나.”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비(非).”
송백림의 부름에 그의 좌측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하십시오.”
“첫 번째 사냥개를 풀어라. 토끼들을 찢어발길 수 있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송백림.
‘묵룡검은 내 것이다. 사부의 실수였을 뿐. 원래의 주인인 내가 곧 되찾으러 가겠다.’
* * *
무림맹으로 떠나기 전.
“형님, 혹시 천가의 여식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형우는 정천을 지그시 바라봤다.
“형님이 말씀하셨죠? 이번 정마비무대전은 삼공자가 아닌 대공자가 판을 벌이려 하는 것이라고요. 맞습니다. 대공자는 원룡을 죽이려 할 겁니다. 교주 위(位)를 이을 수 있는 독고가의 마지막 핏줄이니까요.”
물론 원영도 남아 있지만 교주의 자리에 여인은 앉을 수 없다.
“구마종의 혁련 일파는 행방불명, 그리고 환마종의 단목 일파는 대공자에게 붙었습니다. 정체가 드러난 독고가의 원룡을 죽이고 혁련 일파의 마지막 핏줄까지 제거한다면 천마신교는 대공자의 손에 떨어지겠죠. 천마신교의 첫 번째 목표는 내부 다지기일 겁니다. 그 이후에야 무림 지배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겠죠.”
“그러면 더더욱 원룡을 구해야겠군.”
대사형이 그 자리에 앉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맞습니다. 원룡은 절대적으로 살려야 합니다. 천마신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공자에 맞서는 형님을 위해서요. 그런데 한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뭐? 어떤 변수?”
“천유화.”
형우의 말을 듣자마자 정천은 슬쩍 딴청을 피웠다. 한숨을 내쉬는 형우.
“삼공자는 분명 천유화를 죽일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지금껏 억지 평화를 유지해온 맹주입니다. 십 년 전 자신의 부인과 가신들이 죽었음에도 그 분노를 참았지요. 그런데 만약 자신의 마지막 핏줄인 여식마저 죽는다면 이성을 잃고 천마신교와 정마대전을 벌이려 하겠죠.”
백도의 힘을 빌려 대사형의 세력을 줄이려는 삼사형의 계획은 꽤 오래된 일이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천가의 여식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
마음에 두고 있냐고? 뭐라 답해야 할까?
정천은 또 한 번 회피를 선택했다. 형우의 눈빛이 냉철하게 빛났다.
“그냥 죽게 놔두십시오. 그게 형님께도 득이 될 것입니다.”
“만약 죽게 놔두지 않는다면?”
“백도와 마도 모두의 표적이 될 겁니다.”
“오호, 그거참 재밌겠구만.”
형우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형님은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절대로, 혼자서는 말이죠.”
“호오. 그래서?”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단지 정천의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
“형님 스스로도 무엇이 답인지는 잘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 * *
끼이이익-
녹이 슨 경첩으로 인한 불쾌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 소리마저 반갑네. 이게 얼마 만이냐!”
고향에 돌아온 느낌.
“할멈! 나 왔어!”
언제나 그렇듯 풍월객잔은 손님 하나 없이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먼지뿐인 바닥을 쓸고 있던 객주 할멈이 깜짝 놀라 돌아봤다.
“이, 이런….”
“하하, 너무 반갑지?”
딱!
“아악!”
“이 써글 놈이! 시방, 이놈이 뭔 짓거리를 하다 이제 온 겨!”
들고 있던 빗자루로 찜질을 하는 할멈과 도망 다니는 정천. 한바탕의 육탄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멍하니 서 있던 유운이 뻘쭘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잉? 그 곱상한 놈도 같이 왔구먼.”
“객주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어유, 그동안 뭔 고생을 한 겨? 왜 이렇게 수척해졌대? 이 써글 놈이 얼매나 고생을 시킨 겨?”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어르신.”
왠지 정겨운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던 유운이 깜짝 놀랐다.
‘내가, 웃었어?’
대체 마지막으로 웃어봤던 게 언제였던가.
“어이, 뭘 그리 멍하니 있어? 밥 먹으라고, 밥.”
“어? 어어.”
얼떨결에 자리에 앉자, 따뜻한 국수가 놓였다. 따뜻한 온기였다. 마치 집에 온 듯. 사실 며칠 전 집을 떠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집에 온 듯 편안했다.
“우적우적. 근데 할멈, 우리 애들 안 왔어?”
“네놈이 애새끼인데 어디서 애를 찾아? 쯧쯔.”
“우이씨! 그러지 말고!”
“시끄럽고, 일단 그거나 처먹어. 뭔 어린 연놈들은 진즉에 와서 잘 쉬고 있응께. 넌 뭔 일이 있길래 이리 늦게 왔어? 그 연놈들 온 지 벌써 달포가 지났구먼.”
“다행이네.”
정천을 바라보는 객주 할멈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그런데 네놈 옷은 왜 그 모양이냐?”
흙먼지와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정천과 유운의 옷가지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 이거? 그냥 조금 사고가 있었어.”
유운과 눈이 마주친 정천이 히죽 웃자 유운은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 * *
“몸은 이제 좀 괜찮은 건가? 봉긋하게 솟은….”
“제발 좀 닥쳐 줄래?”
여전히 몸이 성치 않은 유운이었지만 계속 몸져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유운은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밤, 정천은 그녀가 잠든 사이에 그녀의 어깨에 뭉친 고름을 짜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흐음, 잠깐 이리 돌아봐.”
“흡!”
정천이 두 어깨를 감싼 채 얼굴을 들이밀자, 유운이 질끈 눈을 감았다.
“너, 뭐 하냐?”
“뭐, 뭐가?”
살포시 눈을 뜨자, 정천은 면밀히 그녀의 왼쪽 어깨를 살피고 있었다.
“으음, 상처는 꽤 차도가 있는 것 같네. 이리 와봐.”
이번에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다른 한 손은 자신의 이마에 대면서.
“흐음, 열도 꽤 내린 것 같고.”
그리고는 손목. 기혈을 살피던 정천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이제 걸을 만하겠네. 자, 일어서봐.”
유운이 깨어난 지 벌써 사흘. 사흘간 정천은 정성을 다해 그녀를 간호했다. 그래서 유운은 그동안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묻고 싶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유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원망일까? 슬픔일까? 아니면 아쉬움일까. 복잡한 감정을 담은 유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속 고민했어. 대체 왜 나를 찔렀을까? 내가 이성을 잃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 네가 좋은 놈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적어도 나쁜 놈 같지는 않았거든.”
자신을 해치고자 했던 게 아니라는 것쯤은 유운도 알고 있다. 왜 찔렀는지, 그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보다.
“꿈속에, 아니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어. 확실히… 꿈이 아니야. 널 다시 보는 순간 또 한 번 확신했어.”
붉은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는 유운.
“너….”
정천은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다. 왜 무슨 소리냐고, 대체 무슨 꿈을 꾼 거냐고 묻지 않는 거지? 대체 왜 다 알고 있다는 듯 웃고 있는 거지? 정말 꿈이 아닌 거야?
“너…!”
“자자, 해몽은 조금 이따가 하시고. 일단 손님을 맞아야겠는걸?”
“뭐?”
쉬이이익-
탁!
어느새 유운의 눈앞에 정천의 주먹이 있었다. 그녀를 노리고 날아든 피처럼 붉은 비도를 움켜잡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