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34
33화. 봉황기 (2)
세상에는 여러 가지 관계 형성 방식이 있다. 만약 그 관계가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이면 대개 호의적으로, 예를 다해, 그리고 정성껏 상대를 대한다. 반면에, 딱히 이득이 될 것도 없고, 앞으로 마주칠 일도 없어 보인다면 악의는 없더라도 상대에 대한 정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처음 보는 상대가, 심지어 자신은 상대를 모르는데 상대는 자신을 잘 안다는 듯 악의를 지닌 채 시비를 건다면 어떨까?
“뭐라고? 다시 말해봐, 뿌득!”
“어? 방금 이빨 부서지는 소리 났는데…?”
“이자가 감히!”
청년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인자, 그것은 청년의 역린(逆鱗) 그 자체였다.
“현아! 그만두거라.”
“하지만!”
“이곳은 태상 장로님의 영역이니라.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중년인의 말에 간신히 화를 삭이는 청년.
“자네는 누군데 다짜고짜 다가와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인가?”
“시비? 나는 시비를 건 적이 없는데요?”
시비를 걸다니. 좋은 제안을 하려고 왔을 뿐이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련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보이는데, 잘못된 사실을 이야기하며 상대의 심기를 어지럽히는데 시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무슨 잘못된 사실이요?”
처음에는 웬 불한당인가 싶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진의 결계 안쪽이다. 태상 장로께서 허락하지 않은 인물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 시비를 걸듯 툭툭 내뱉고 있지만 분명 태상 장로와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이 아이는 잠룡무신제(潛龍武神制)에서 으뜸으로 뽑혀 태상 장로님을 뵈러 온 아이니라. 그러니 이인자니 뭐니 하는 말은 이 아이에게 해당되지 않는 수식이란 말이지.”
“아아, 그렇구나.”
맞는 말이긴 하다. 숭무련(崇武聯). 무(武)만을 숭상하는 이들의 집단에서 후기지수를 양성하는 방식이 바로 잠룡무신제였다. 개중에서도 최고의 기재로 뽑힌 이는 전(前) 련주의 진전을 잇게 된다.
“그래서 백용 어르신에게서 현무기를 전수받으러 왔다는 말이죠?”
“그렇다네.”
역시. 중년인은 이 청년이 련의 사정에 꽤 밝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왠지 미안하긴 했지만 사실은 사실 그대로 말해줘야 하지 않은가.
“한 가지 잘못된 사실이 하나 있는 것 같아서요.”
“뭐가 말인가?”
“저 애송이가 잠룡무신제에서 으뜸으로 뽑힌 건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동년배 중 이인자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이자가 감히!”
“어허,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드는 거 아니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정천이 말을 이어나갔다.
“뇌룡(雷龍). 그놈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째서 제 말이 틀렸다는 건가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현아, 가만히 있거라.”
노기 띤 목소리에 청년이 입을 다물자, 중년인이 매섭게 정천을 노려봤다.
“그 아이는 련의 철칙을 위배한 이단아네. 심지어 주화입마에 빠져 동료들을 해치고 행방이 묘연한 상태지.”
“뭐, 언젠간 돌아가겠죠.”
정천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중년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혹…!”
“관주 왔는가?”
무언가를 물으려 할 때, 멀리서 백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무관주 월인, 태상 장로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일자수(一姿手) 우현, 태상 장로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중년인, 월인과 청년, 우현이 백용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 이 아이가 이번 잠룡무신제에서 장원(壯元)을 차지한 아이더냐?”
“그렇습니다, 장로님.”
우현을 바라보는 백용의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왕좌에 앉을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 제왕의 자질을 타고난 이가 아무리 둘이더라도 왕좌를 차지할 이는 단 일인이다. 자신이 손수 가르친 ‘그놈’만 없었어도 그 자리는 이 아이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어르신, 유운은요?”
백용과 함께 동굴로 들어간 유운이 보이지 않았다.
“예끼, 이놈아. 무슨 연인이라도 되느냐?”
연인 관계보다는 주종 관계지.
“기력을 몽땅 소진하고 뻗어서 자고 있으니 걱정 말거라. 뭘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언제 걱정을 했다고.”
백용과 숭무련의 사람들.
“오랜만에 만난 것 같으니 회포들 푸셔요. 전 마실이나 다녀올 테니까.”
“오냐.”
우현에게 놀리듯 손을 흔들어주고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정천.
“대체 저 젊은이는 누굽니까?”
월인이 물었다.
정천이 누구냐? 백용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혈풍(血風).”
그렇다. 저놈은 혈풍 그 자체다.
* * *
꿈을 꿨다.
쩍쩍 갈라진 대지 사이로 용암이 흘렀고, 그 위로 붉은 암석이 들끓었다. 언제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대지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붉게 타오르는 대조(大鳥)가 그 주위로 아지랑이를 피어오르게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봉황.’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존재가 바로 전설 속의 봉황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
기억을 더듬어봤다.
백용 어르신과 함께 동혈로 들어갔고 전신으로 쏟아지는 압력을 견디기 위해 진기를 있는 대로 소진했다. 며칠을 반복했고,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존재가 정신을 지배하려 들었다. 백용 어르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기를 수십 번. 그 존재는 협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유운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더 이상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았다. 당당히 스스로의 의지를, 그리고 생생한 육체를 느끼며 대지 위에 서 있다. 봉황을 마주한 채.
[필멸의 존재여.]청력으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뇌리를 강타하는 의념(意念)이 전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그대는 자격을 갖추었는가.]심마(心魔)에 빠지려는 것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유운은 남방신(南方神), 봉황을 응시했다.
‘그 자격이 뭔가요?’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을 전할 뿐. 붉게 타오르는 신체와 대비되는 바닷빛 파란 눈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질문에 대한 답은 그게 전부였다. 동시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봉황의 마지막 의념이 전해졌다.
[혈룡을 경계하라.]* * *
껌뻑껌뻑.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깼어?”
정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유운.
“뭘 그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보고 있어?”
“여긴….”
“걱정 마, 현실이니까.”
“…….”
그래,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었다. 봉황을 대면하는 꿈.
“축하해. 드디어 봉황기를 얻게 됐네.”
“꿈이 아니었어…?”
유운이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아, 원래 처음 상단전을 개방했을 때 두통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야.”
“상단전….”
잠시 멈춰있던 뇌가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양단지체(兩丹之體). 상단전을 개방할 수 있는 신체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 신체는 사방신기를 받아들일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할 수 있지.’
동혈에 들어가기 전 백용 어르신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조금 쉬다가 오후부터는 나와 특훈을 시작할 거야.”
“특훈…?”
“당연하지. 이제 처음으로 걷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바로 고꾸라지지 않으려면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
봉황기를 시험해볼 상대도 준비해놨으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었다.
“왜, 나를 돕는 거지?”
“도와? 내가?”
유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천을 쏘아봤다.
“후우, 자꾸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정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난 너를 도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한 일일 뿐이니까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해.”
자신을 위해 하는 일. 납득했다는 듯 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찔렀던 것도….’
그 자신의 필요 때문이었을 터였다. 무언가를 얻으려 했겠지. 봉황의 의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혈룡을 경계하라.]혈룡.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혈룡은 묵혼혈룡검의 주인, 정천을 뜻하는 것이었음을.
“나는 너를 도운 적이 없어.”
“그래, 나도 알겠다고.”
정천이 품속을 뒤져 종이를 꺼내 들었다.
“내가 네 정신에 맡겨놓은 내 소유의 신체를 단련시키려 했을 뿐이라고!”
“…….”
이 개새….
빙긋.
“그러니까 빨리 강해지자.”
그렇지 않으면 금방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내 손이 닿지 않을 때가 있을 수도 있잖아.’
* * *
“이게… 맞아?”
“시끄러워.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고.”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상단전을 개방했는데 곧바로 내공을 운용해 몸을 움직였다가는 뇌로 입력되는 속도와 신체 반응 속도의 괴리로 인해 정신이 붕괴될 수도 있다.
“하단전의 내공이 체내의 기(氣)를 이용한다면 상단전은 염(念)의 힘으로 그 기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야.”
물론 하단전의 내공이 부족할 때에는 선천지기를 대신 소진할 수밖에 없다. 정천의 경우 ‘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선천지기를 소진했었다. 그것은 곧 생명을 담보로 기를 운용한다는 의미였다.
‘흐음… 염력이라….’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이었다. 어떻게 생각에 힘을 담는다는 것일까? 허공섭물? 그것은 생각에 힘을 담아 의지로 허공을 격하고 물체를 움직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극도로 잘 통제된 기의 파장을 이용한 술수이다. 이기어검? 그것도 마찬가지. 자신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만으로….’
스르륵!
눈을 감는 유운.
“얼씨구?”
유운의 몸이 화염의 막에 감싸여 떠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화에 정천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대로 뒀다간 제 몸을 태우고 말 터였다.
“정신 차려!”
유운이 눈을 떴다.
“어어…!”
콰당!
“아악!”
“야, 이 멍청아! 염력을 일으키랬지, 언제 정신을 뺏기라고 했어!”
“으음….”
주위를 둘러보는 유운. 주위의 수풀은 무언가에 그을린 듯 검게 타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정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내심 빠른 성취에 놀라고 있었다. 역시는 역시. 고작 사흘 반나절 만에 스스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봉황의 인정을 받았다고 전부가 아니야. 봉황의 검령은 언제든 너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다고. 명심해. 먹히지 말고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유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뭐. 이제 봉황기를 일으키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한번 사용해봐야지.”
“뭐? 어떻게….”
“일단, 검을 들어.”
유운은 쭈뼛쭈뼛 일어나 손에 들린 봉황신검을 바라봤다.
‘봉황의 검령.’
사실 검을 꺼내 들기가 두려웠다. 혹시라도 잡아먹히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자아를 잃고 검의 노예가 되는 것인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검의 의지대로 무참히 타인을 도륙하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검의 의지대로 숨만 붙은 채 사는 건….
“어이, 노예. 뭐 하고 있어?”
노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스르릉.
저 새끼로부터 신체 포기 각서를 뺏어서 없애버리는 게 먼저다. 검의 노예고 나발이고, 이미 자신의 신체는 저 인간의 것이었다.
“오오, 활활 타오르는 게 아주 좋아.”
유운이 어떤 야심 찬 계획을 세우는지 꿈에도 모른 채 정천은 히죽 웃으며 묵룡을 꺼내 들었다.
우우웅- 우우웅-
묵룡이 구슬피 울었다. 빨리 자신의 봉인도 풀어달라는 듯. 활개 치는 봉황처럼 자신도 얼른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다고.
“묵룡, 조금만 기다려. 금방 풀어줄게.”
검붉은 화염을 머금은 유운의 검이 정천을 향해 짓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