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37
36화. 화고(火庫) (2)
구룡의 일인이자 화산의 미래, 매화검룡 청풍.
“네가 어째서….”
“처음 뵙소, 천가 유운이라 하오.”
처음 뵙는다고?
청풍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남장을 하고 있지만, 어찌 봐도 천유화가 분명했다. 남장을 한 채 정마비무대전장 위에 올라왔을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너무도 명확했다.
[유화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더냐?]전음을 보냈지만, 유화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착하고 순수하기만 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반항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모습. 낯설기만 했다.
“처음 뵙겠다는데 왜 아는 사람인 척하고 난리일까? 오지랖은 그냥.”
“그러고 보니, 납치되었다던데….”
납치는커녕 사이가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그게 청풍의 속을 더 긁어놨다. 무림 최고의 기린아라는 태극신룡을 꺾은 후에 최고의 남자로서 유화를 자신의 품에 안고자 했다. 그런데.
“얼씨구? 나는 그냥 없는 사람 취급이네?”
쒸익-
파공성이 들려온 순간, 정천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잘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호오, 발검술이 대단한데?”
청풍의 손은 검병을 쥐고 있을 뿐 검은 검집 안에 고스란히 있었다.
“실력이 없는 자는 아니었군.”
명경지수(明鏡止水).
최대한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려 했지만, 마교 놈의 태연자약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더러운 입을 계속하여 놀린다면, 원시천존의 가르침에 따라 태초의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만들겠노라.”
“뭐야, 그 신박한 살해 협박은?”
청풍이 다시 검을 뽑으려는 순간, 유운이 제지하고 나섰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대로 우리를 보내주시오. 이자는 마교의 인물도 아니거니와 맹에 척을 질 일을 한 적이 없소.”
“제 입으로 마교 부교주의 전언을 전하러 왔다 했거늘.”
유운이 정천을 돌아봤다.
“정천, 그게 무슨 말이야?”
유운은 이미 정신을 잃은 후라 그 이후에 정천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역시나.”
청풍이 이마를 짚었다.
“유화, 너는 모르고 있었구나?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동행을 했겠지. 저자가 바로 마교 부교주의 심복이니라! 간악한 술책으로 너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란 말이다!”
“그럴 리가….”
유운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천이 무명 대협의 제자라는 것을.
“네가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한다. 저자가 무명 대협의 제자라는 것을 너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이미 무영문은 마교와 손을 잡았다. 아마 숭무련도 마찬가지겠지.”
유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개를 돌려 정천을 바라봤다.
“푸흡.”
“정천.”
“재밌네, 재밌어.”
생각해보면 참 웃기다. 숭무련은 아니지만 무영문이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말은 틀렸다고만 볼 수는 없는 말이다. 대사형은 현재 무영문 계승 일 순위이고 그가 천마신교의 부교주 자리에 있으니 말이다.
“보거라. 저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역천의 무리와 한패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천, 직접 네 입으로 말해. 네가 정말 마교도인지 아닌지.’
유운은 정천에게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미 쓰라린 배신감을 한 번 느꼈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오해였고, 비 온 뒤 땅이 굳듯 정천에 대한 신뢰는 자신도 모르게 더욱 두터이 쌓였다. 그런데 마교도였다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에게 보인 호의는 무엇인가? 백용 대협은? 만약 청풍의 말대로 백용의 숭무련까지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이라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뭐 이리 심각해?”
그 간절한 눈빛에 정천이 얼굴을 찌푸렸다.
청풍의 입가에 비릿한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역시 유화는 지금껏 저 간교한 자에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쐐기만 박으면 된다.
“자꾸 답을 회피하지 말고…!”
“아니?”
“뭐라?”
“나 마교도 아닌데?”
유운의 얼굴에 작게나마 화색이 돌았다. 역시 아니었어. 단 한마디였지만 의문이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그녀에게 정천은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청풍이 납득할 리는 없었다. 특히 유화의 안심한 표정이 정천을 향한 불신에 불을 지폈다.
“거짓말하지 마라!”
“아깐 뭐 말 안 한다고 뭐라 하더니, 이제는 대답을 해도 믿질 않으니, 쯧쯔.”
굳이 이 말코도사 놈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은 없지만.
정천의 시선이 유운을 향했다.
옜다.
“천마, 개새X.”
“……?”
“부족해?”
부족하다면야 뭐.
“천마, 이 천하의 호로새x. 병x. 개x 같은 새x. 고자 x끼. 아, 미안, 유운. 널 욕할 생각은 없었어. 네 선택은 존중해.”
유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어때? 이 정도면 만족하나?”
아, 물론 천마를 욕할 생각은 없다. 심지어 천 년 전 사람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을 수도 없고.
“뭐, 혹시 내가 물에 빠져서 둥둥 뜨면 마교도고 가라앉아 뒈지면 결백하고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지?”
“…….”
“아니면 뭐, 불구덩이에 집어넣어서 살아 나오면 마교도고 불타 뒈져버리면 결백한 그런 결말을 바라는 건 아니지?”
표정을 보아하니 은근 그쪽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무슨 말을 해도 네놈 좋을 대로 들을 거잖아? 그래서 굳이 얘기하지 않은 거야. 아, 물론 내 사문의 일이 조금 얽혀있기도 하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그리고 말이야, 무림은….”
과연 무림에서 이따위 말 한마디가 중요할까? 결백? 그런 게 의미가 있을까?
어디에 속해 있든, 어떤 사상을 지니든, 어떤 신념에 사로잡혀 있든지 간에, 무림은.
“강자존이야.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지랄발광을 하든 상관없어. 센 놈이 법이고 센 놈이 정의거든.”
“뭣이?”
“그렇잖아? 네놈들도 강하지 못했으면 무림의 질서니, 뭐니 하면서 깝치고 다닐 일도 없었을걸?”
“갈!”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아니면 불편한 진실을 듣고 싶지 않은 걸까? 정말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
“…….”
청풍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언은 곧 긍정. 그런고로 진정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 확실히 밟아놓지 않으면 언젠가 또 마교도니 뭐니 하면서 설치고 다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놈이, 아니면 네 뒷배경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지금 나와 내 문파를 모욕하는 것이더냐!”
“지랄하네.”
정천의 눈빛이 변했다.
“나와 내 문파를 모욕한 건 네가 먼저일 텐데?”
“뭣이?”
“그럼 뜨든가? 어때? 무영문 대 화산파. 한판 떠볼까?”
스르릉-
척!
묵룡을 꺼내 땅에 박았다.
“이놈이 무영문 계승의 신물이거든? 너도 화산에서 한따까리 하잖아? 뭐, 어차피 한 이삼십 년 지나면 네가 화산 거기, 다 해 먹을 건데 미리 좀 당겨쓴다고 장문인한테 말해봐.”
저급한 언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청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영문이 마교랑 붙어먹었다며? 네놈들의 적이잖아, 한판 떠보면 되겠네? 우리가 네놈들 정의에서 벗어났으니 우리랑 싸워보면 되겠네. 어때? 괜찮지?”
“…….”
화산파는 강하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무림의 문파가 있음에도 아홉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패(四覇) 중 하나인 무영문과 일대일로 붙는다? 아마 구할 구푼 구리의 확률로 화산파는 멸문당할 것이다.
“왜? 쫄려? 다른 구파나 팔대세가 없이는 못 이기겠어?”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몹시나 화가 난 듯 보인다.
“예전에 그쪽 말코도사 하나와 친분도 있고 하니, 적당히 충고 하나 해줄게.”
오랜만에 그 노인네가 생각났다. 진정으로 매화를 가슴에 품었던 이.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화산의 제자들도 냉혹하지만 진정한 현실을 배우고 조금 더 겸손해졌겠지.
“네가 그렇게 설치고 다닐 수 있는 것도 다 힘이 있기 때문 아니야? 네가 화산파가 아니고 어디 저 야산 위에 이름 없는 도관 출신이었어 봐. 그렇게 당당하게 나를 잡으러 올 수 있었을까? 자꾸 의가 어쩌고 협이 어쩌고 하는데, 힘이 없었으면 그게 가능했겠냐고.”
무림은 절대적인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건 당연한 자연의 이치야. 개구리가 토끼를 불쌍히 여길까? 그럴 리가. 뱀을 무서워하겠지. 그럼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뱀이 의와 협을 부르짖으면서 막을까? 아니야. 지 놈들 사냥거리나 찾아 나서겠지.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네 뭐네, 자꾸 헛소리하면서 남의 먹잇감에 이래라저래라 그만하고 네가 포식자로서 사냥할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만 파악하고 덤벼들라고. 그게 곧 무림이니까.”
그리고 그게 곧 무영문의 기치(旗幟)다. 적자만이 생존하고 힘 있는 자가 승리하는, 소무림이 무영문 안에 있다. 그렇기에 대사형이 다른 사제들을 짓밟아도, 삼사형이 야욕을 드러내도 거부감은 없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를 원할 뿐 남의 먹잇감에는 전혀 관심 없다.
‘서로 화(和)하여 극(極)에 이르면 무(無)의 오의(奧義)를 깨우치리라.’
물론 사부는 정반대로 이야기했지만, 뭐 반어법이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 할래? 막아설 거야? 아니면 저쪽으로 짜질 거야?”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든가.
스르릉-
청풍을 위시한 화산의 제자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무림맹 집행단 매화대 제일 대주이자 화산의 삼 대 제자 청풍. 본인의 안위를 보존코자 맹의 명을 어기지 않는다. 그리고, 사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
그의 눈빛이 사뭇 매서웠다.
“매화대!”
“예! 대주!”
“집행을 시작한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총 열두 명의 대원들이 정천과 유운을 둘러쌌다. 이에 맞서 검을 뽑아 드는 유운.
“유화, 진심으로 맹에 반기를 들겠다는 것이더냐?”
“…….”
정천의 말은 옳다. 무림은 강자존의 세계. 힘이 곧 정의이고 법이다. 검을 든 이상 상대보다 강해야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또 틀렸다. 인간은 호랑이도, 토끼도, 뱀도, 개구리도 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토끼가 근육을 키운다고 호랑이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든 힘을 키운다면 다른 인간보다 강해질 수 있다. 그걸 증명해내야 한다. 인간은 포식자가 될, 혹은 피식자가 될 운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청풍, 그리고 자신은 그 누구보다 특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극검신이라 불리는 조부께서는 고아였고 스스로 절대자의 위치에 올랐다. 결국, 올라갈 위치를 정하는 것은 자신이다. 먼저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네게 증명하겠어. 네게는 기껏 늑대일 뿐인 내가, 자칭 산왕(山王)이라 여기는 너를 능가하는 모습을.’
지금 검을 드는 이유는 무림맹에 반기를 들기 위함이 아니다. 이 남자를 꺾을 때까지 그 옆에 있고자 함이다.
“자꾸 혼동하시는 것 같은데.”
유운의 두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천유화가 아닌 유운이오. 다시 한번 나를 계집으로 오해하면.”
봉황신검에 열화의 검기가 입혀졌다.
“그 입을 찢어버리겠소!”
봉황검무(鳳凰劍舞). 아름다운 검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 * *
적빛 검파(劍波)가 잔상을 남기며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날아들자 화산의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거리를 벌렸다.
“아오, 뜨거워.”
거리를 벌리기는 정천도 마찬가지였다. 후끈후끈한 열기에 멀찍이서 그녀의 검무를 감상했다.
“쯧쯔, 사내인 척하려면 좀 더 박력 있게 할 것이지. 저건 누가 봐도 계집이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정천. 하지만 그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아름다운 몸짓을 감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