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38
37화. 포식자가 살아가는 법 (1)
반면, 같은 아름다움에 매료됐지만 청풍은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유화가 저렇게 강했다고?’
자신과 겨루면 어느 정도일까? 과연 자신이 유화를 이길 수 있을까? 청풍은 생각해보았다.
물론 천가의 피를 이은 만큼 그 타고난 천재적 재능은 알고 있었지만, 기껏해야 여인이었다. 팔봉(八鳳), 즉 여 후기지수들 중에서야 으뜸으로 인정했지만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청풍. 여인이라 경시했던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내공이 상당하고, 정교한 검식 또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내력을 조절하는 데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미숙했다. 항아리에 물이 아무리 가득 찼더라도 바닥에 구멍이 나 있다면 금방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어떤 천하제일의 심법으로 축기(築氣)를 했더라도 그 절대적인 기간은 무시할 수 없다. 심지어.
“항아리에 물이 든 게 아니라 기름이 들어있었군. 기름 위에 불을 지른 꼴이야.”
청풍의 판단은 정확했다. 저 강력한 검파(劍波)에 휩쓸렸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삼류가 아닌 이상 저기에 뛰어들 엄두를 낼 무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맞아, 맞아. 아직 많이 미숙하지.”
정천도 동의하는 바였다. 물론 멀리 있던 청풍은 그의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뭐 다 태워 없애버리고 물로 다시 채우면 되는 거지, 암.”
숭무련의 우현과 비무를 했을 때와는 다르다. 비무와 실전의 차이. 일류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이들 중 실전에서 유운의 봉황기를 정면으로 꽝 하고 받아줄 우둔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화산의 삼 대 제자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수재들이 그리 쉽게 당해줄 리 만무했다. 이따금 거리를 벌리며 시간만 끌어도 제풀에 지쳐 쓰러질 텐데 굳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들의 목적은 둘을 맹으로 끌고 가는 것이지, 생사결을 치르려는 것이 아니다.
“헉헉….”
확실히 시간이 지날수록 유운의 검 끝은 미세하게 떨렸고, 호흡은 무척 가빠졌다.
“유운! 유운~ 유운? 유운~!”
“왜! 헉헉, 말 걸지 마!”
“힘들면 그만하고 도망쳐도 되는데?”
유운이 쌍심지를 켜고 정천을 노려봤다.
“나를 경시하지 마.”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아주 그냥, 흘러내리는 땀으로 웅덩이도 만들겠어.”
“네놈 주둥이에 먼저 검을 쑤셔 넣어주랴?”
“어이쿠.”
봉황기가 아주 사람 하나 개차반 만들겠어.
“불이 가장 뜨거울 때 어떤 색을 띠는지 알아?”
“갑자기 무슨 개소리….”
“청(靑).”
불은 붉게 타오른다. 하지만 그 불이 정점에 달하면 청색 빛을 띤다.
“지금 너는 너무 붉어.”
붉은 화염은 화려하게 활활 타오른다. 하지만 갈무리된 파란 불꽃은 조용히 타오르며 닿는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
알아들은 것일까? 유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음, 그나마 좀 나아졌네.”
갈무리된 유운의 기운은 더욱 예리해졌고 더욱 응축되었다. 검격은 무척이나 빠르고 간결해졌고, 한 보폭에 쓸데없이 사용되던 진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잘 알아들으니 가르치는 맛이 있다.
“그나저나.”
유운은 얼마 가지 않아 어렵지 않게 화산의 제자들을 제압할 것이다.
정천의 시선이 여전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한 사내를 향했다. 허공에서 마주친 두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순간에 대체 어떻게 사람을 바꿔 놓은 거지? 네놈은 정체가 무엇이냐? 무영문에서는 대체 무엇을 배우는 것이더냐?’
그렇게 묻고 있었다. 굳이 육성으로 듣지 않아도 그 의혹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에헴. 뭐, 그렇게 감탄할 거 없어. 그냥.”
과거가 떠올랐다.
“지옥을 경험해보면 알게 되어 있어.”
물론 살아서 자기 발로 걸어 나온다면 말이지.
“왜? 덤비려고?”
청풍이 다가왔다. 마교도라 멸시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다. 무인으로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눈빛만이 서려 있었다.
“좋네, 그 눈빛. 이제 무언가 좀 깨달은 게 있나 봐.”
진정한 매화를 꽃 피우려면 그 정도 눈빛은 보여줘야지.
“와봐. 그 눈빛이라면,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씨익.
땅에 박아두었던 묵룡을 뽑아냈다.
* * *
뚜벅뚜벅.
깊은 밤, 적막한 능선 위에서는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얼마나 걸릴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기는 정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성취가 깊어질수록, 시야가 더 넓어질수록 점점 더 깨닫고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그곳에 정천이 서 있음을.
‘매화검룡이….’
대결? 그런 말은 오히려 청풍에게 실례였다. 그것은 대결이 아니었다. 정천의 일방적인 가르침이었고 청풍에게는 배움이었다. 한 수? 두 수? 아니다. 적어도 열 수 위에 있는 이가 아랫사람을 가르치듯 정천은 그를 가르쳤다. 심지어.
‘맞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어.’
자신과 계약(?)을 맺을 당시에는 분명 무당의 무공을 사용했었다. 심지어 천가의 무공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때 얼마나 식겁했는지. 그리고 이번에는 화산의 무공을 사용했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했다.
‘대체 당신에게 닿으려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응?”
무슨 생각을 하면서 웃고 있을까? 새로운 깨달음이라도 얻어 기뻐하는 것일까?
“왜 그렇게 히죽히죽 웃고 있는 거야?”
“아아, 한 가지 깨달음이 있어서.”
역시.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무슨…?”
“왜? 궁금해?”
그 발자취라도 조금 듣는다면 성취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단 한 단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 이리 대봐.”
귀를? 둘뿐인 이 공간에서? 유운이 귀를 가져다 대자 정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기에, 똥 싸.”
“응?”
갑자기 무슨 말? 정천이 손을 들어 한쪽을 짚었다.
“쟤 저기서 똥 싼다고.”
“쟤?”
유운의 눈에는 수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음이라며?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지.”
그럼, 그럼. 엄청난 깨달음이지.
“착하게 봐주면 아주 호구로 안단 말이지.”
그대로 땅을 박차고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급하게 바지를 올리며 도망치는 복면인.
아오, 똥 냄새.
퍽!
발차기 한 방에 나가떨어지며 이물질(?)을 흩뿌렸다.
“똥 싸다 말고 어디 가. 아오, 그런데 그 손에 묻은 똥 좀 닦지?”
복면 뒤로 비친 눈빛에는 두려움과 치욕감,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하물며 똥을 싸는데!
딱 그런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왜 똥 냄새를 흘리고 다니는 거야? 조용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잖아.”
유운이 코를 막으며 다가온 순간, 정천이 그를 잡아채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슈우우욱-!
“대, 대주! 컥!”
목에 비도가 꽂힌 채 쓰러진 사내. 즉사였다.
“무섭네.”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냉철하게 빛났다.
“아이고, ‘우린 무시무시한 천마신교다!’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똥 좀 쌌다고 사람을 그렇게 쉬이 죽여버리나.”
그 무엇보다 대의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무림맹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칠공자.”
대주라 불린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뭘 오랜만이야? 반년 전에 소호변에서 봤잖아. 아, 사실 얼마 전에 나는 봤는데 말이야. 네가 나를 못 봤지.”
낯이 무척이나 익은 얼굴이다. 꿈틀대는 미간. 아쉬워하고 있을 거다. 만약 자신을 발견했으면 팔장로와의 대결 이후 기진맥진한 자신을 끝장낼 수 있었을 테니까.
“혈영대주, 음, 그러니까….”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크흠. 혈영, 칠공자께 인사드립니다.”
아, 혈영대는 이름 없는 유령의 조직이었다. 당연히 이름이 기억이 날 리가 없지. 대주는 편의상 혈영이라 부른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저번에는 꽁지 빠지게 도망치더니 말이야.”
“부교주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그래?”
대사형의 전언이라. 혈영의 입이 열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기회.
‘검을 넘겨라. 네 목숨을 뺏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사형이 주구장창 하던 말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절대 지켜질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있겠는가.
“‘사제에게 진심이 전해지기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소리는, 끌끌.”
어차피 대사형은 자신이 그 말인지 방구인지 모를 제안을 거절할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당연히 죽을 각오로 왔겠지?”
자신의 면전에 얼굴을 드러냈으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암.
“물론입니다. 하지만.”
혈영의 손이 유운을 가리켰다.
“저 여인, 그리고 백도의 유망한 후기지수들이 죽임을 당해도 좋다면 말입니다.”
“물건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인은 아닌….”
유운의 손이 검으로 갔다.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제쳐두고.
“다른 후기지수들?”
파사사삭-
파삭-
수풀에서 튀어나오는 인영들. 족히 백은 되어 보였다.
“물론 저희를 모두 죽이고 가신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백도의 후기지수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테고요. 칠공자께서 친절히 사전 작업을 해주셔서 일이 한결 수월해졌으니 말입니다.”
뇌리에 스치는 인물들. 화산의 매화대와 자신들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맹 소속 암행 요원들. 맹 소속의 암행 요원들은 은신에는 능하나 전투 실력은 보잘것없는 이들이었고, 매화대는….
정천의 시선이 유운을 향했다.
“물론 칠공자께서는 알 바가 아니라고 하실 겁니다.”
그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그런데 과연 동행분께서도 같은 생각이실지.”
매화대는 현재 전투 불능의 상태였다. 물론, 그들이 죽든 말든 정천으로서는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유운은 분명 그들을 도우려 할 것이고, 또한 교활한 대사형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자신을 그들의 몰살 주범으로 몰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를 모두 죽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살리시겠습니까?”
진퇴양난의 상황. 정천의 결정에 따라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산다.
“그런데, 확실해?”
뜬금없는 말. 확실하다니, 뭐가?
“내가 정말 두 선택지 중에 하나의 선택지만 선택 가능하다고 생각하냐고.”
“하하, 세 번째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스스로도 세 번째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혈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길래 실실 쪼개고 있어?”
“……?”
찬물을 끼얹는 정천의 물음.
“세 번째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네 가정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
“유운.”
“응?”
“아까 내가 말했지? 큰 깨달음.”
그랬지.
유운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 자꾸 착하게 봐주면 아주 호구로 안단 말이야.”
정천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자, 여기 모인 놈들 중 딱 한 명만 살려 보낼 거니까, 가서 전해.”
정천의 전신에서 짙은 살기가 퍼져나갔다.
“헛지랄 그만하고, 엿이나 까 잡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