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52
51화. 자격 충분조건(1)
“‘그것’을 달라고 했다고?”
대뜸 찾아와서는 ‘그것’을 달라니.
“정천 형님이 정말로 그렇게 말했더냐?”
“그렇습니다, 노사님!”
“…… 잠깐만 기다려보거라.”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형우를 보며 단리우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것’이라고 하니까 알아들으시네?”
처음에 정천이 ‘그것’을 받아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을 때는 대체 무슨 소린가 했었다. 그런데, 지 노사가 바로 그것을 알아들으니 신기할 수밖에.
대체 ‘그것’이 뭔지 단리우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형우는 천천히 허름한 창고로 걸어 들어갔다.
‘설마 형님께서 이것을 필요로 하신다고?’
창고로 들어온 형우는 삼척 정도 길이의 길쭉한 상자 앞에 섰다. 오랜 세월 이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방치된 듯 먼지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벌써 이십 년이나 된 건가?”
이곳에 보관한 지. 사실상 방치였다.
– 형우, 만약 언젠가 내가 이것을 찾으면 네가 잘 판단을 해줘. 이것을 써도 될지, 쓰면 안 될지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혈룡은 나에게 우호적이지만 묵혼은 그렇지 않아. 혹시라도 이 검에 문제가 생기면 묵혼은 호시탐탐 나를 잡아먹으려 할 거야.
그렇게 ‘이것’을 맡기고 사라진 정천. 이십 년 만에 만난 정천의 묵혼혈룡검의 검령은 봉인되어 있었다.
‘만약 지금 묵혼을 정천 형님께 넘긴다면…….’
대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는 건지……. 검령의 봉인이 해제됐다면야 그 통제력으로 인해 별 문제없겠다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 때론 합일(合一)하며, 때론 이분(二分)하니 우안의 묵혼(墨魂)과 좌안의 혈룡(血龍)은 하나이며 또 둘이다. 네가 필시 명심해야 할 것은, 우안의 묵혼을 믿지 않는 것이다. 검령(劍靈)에 종속된 때에는 이치에 순응하겠으나 언제든 쇠약한 네 혼을 집어삼킬 기회를 노릴 것이며, 이분되었을 때 혈룡의 대척점에 서게 될 것이니라.
사부의 당부가 떠올랐다.
“괜찮겠지, 뭐. 당부는 당부고,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그런 거 언제 일일이 가리고 있어. 암, 그냥 잠깐만. 잠깐만 봉인을 푸는 게 어때서. 설마하니,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검령이 봉인된 그 시점부터, 사부의 당부에 따라 혈룡과 나뉜 묵혼도 같이 봉인시켜버렸다. 물론 검령의 봉인은 그의 뜻이 아니었지만, 묵혼의 봉인은 그의 뜻이었다. 괜히 그대로 놔뒀다가 주화입마에 걸려 그대로 세상 하직할 수는 없었으니까.
“묵룡, 빨리 네가 깨어나야 이 빌어먹을 놈이 내 말을 들을 거 아니야!”
결국 원흉은 이놈이다.
“에휴.”
고목에 기대어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니, 달빛이 아스라이 빛나고 있었다.
“잘 가지고 올 수 있겠지?”
단리우가 운반 중에 괜히 어디 이상한 놈들한테 묵혼의 정수를 털리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조어(鰷魚:피라미)들이 꼬이네, 참.”
스슥- 스스스스슥-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이들. 백색 무복에 청무(靑武)라는 글자를 가슴팍에 새긴 이들이었다. 그 선두에 오만한 얼굴로 서 있는 중년인, 주진원이 있었다.
“그래, 밤 휴식은 잘 취하고 있었는가?”
“어이구야, 많이도 몰려왔다.”
촘촘하게 둘러싼 무인들. 족히 오십은 되어 보였다.
“감히 마교도 따위가 대 무림맹을 우롱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큭큭, 마교도? 우롱? 내가 언제 네놈들을 우롱했지? 아주, 물에 빠져 죽어가는 놈들 살려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건가?”
심지어 그때 살아 돌아간 매화검룡이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어줬을 텐데 말이다.
‘나에게 낙인을 찍고 싶은 거겠지.’
원래 인간이란 동물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동물이니까.
“닥쳐라.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 놓고 그런 말이 나오느냐!”
“풋.”
그럼 그렇지. 어떻게든 지들의 과오를 덮으려면 희생이 필요할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정마비무대전에서 깽판 치던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흐음.”
생각해보나 마나이다. 뻔했다. 누가 자신의 위치를 밀고(密告) 했는지는.
“역시 이 세상은 인정머리 같은 게 불필요한 세상이야. 괜히 인정을 베풀어봤자 이렇게 돌아온다니까.”
꿈틀대는 지렁이라도 한 번 더 제대로 밟아야 제 목숨 아까운 줄 알고 넙죽 엎드린다는 교훈. 이제 와 따져봐야 뭣 하는가. 단지.
‘나중에 내가 꼭 찾아가 줄게, 남궁세가.’
발에 힘 빡 주고 제대로 밟힐 기회, 꼭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래, 이렇게 몰려오면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한 거야? 고작 낭왕이란 자도 제대로 상대 못해서 벌벌 떨던 것들이 말이야. 아, 혹시 토끼도 상처 입은 호랑이를 사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정천의 비웃음에 주진원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닥쳐라, 네 이놈! 감히 마교도 따위가 어디 그 가벼운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그러니까, 지금 형씨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인 거지?”
“뭐라?”
“아니, 자꾸 마교도가 어쩌고 앵무새처럼 재잘재잘 똑같은 말 반복하지 말고 행동을 하라고 행동을. 왜? 쫄려?”
정천이 천천히 일어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포위하고 섰던 무인들이 한 발 짝 뒤로 물러선다. 그가 검병에 손을 올리는 순간, 무인들이 눈에 띄게 긴장했다. 이미 한 번 그의 무위를 목격했던 이들이라 그를 업신여길 수 없었던 것.
“뭐 이리 다들 겁쟁이인가? 어이, 형씨. 그러지 말고 빨리 한판 제대로 붙는 게 어때? 몸도 근질근질한데 말이야.”
비웃음을 날리며 주진원을 쏘아보는 정천. 이에 반해 주진원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보통 놈은 아니었군.’
낙일비천검(落日飛天劍)이라 불리며 무림백대고수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진원에게 감히 이런 도발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이 무림에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청무각의 무인들이 빼곡히 그를 포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당철은 청무각 무인들과 동행하며 정천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산군(山君)이 자리하고 있는 느낌.
씨익.
물론 그렇기에 당철은 웃을 수 있었다.
‘저렇게 위협적인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것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반증.’
호랑이가 고작 토끼를 사냥하는데 털을 곤두세우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시간을 벌고자 한다. 왜?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더냐?’
얼굴은 매우 앳되어 보이고, 시정잡배들이나 쓸 법한 껄렁껄렁한 말투에 심지어 성격도 더러워 보인다. 고수의 풍모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매우 부족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속에는 수천 마리의 능구렁이가 숨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지만 허장성세로 조급함을 감추려는 것뿐.
‘그 어린놈에게 무엇을 시킨 것이냐?’
동굴 안에서 청무각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적무환진을 겪었고 큰 내상을 입었다는 것까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궁소소가 따라다니던 애송이 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라도 기다리는 것이냐?’
당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사천 당가의 일원이다. 이 무림 그 어느 문파도 사천 당가보다 많은 의약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상을 치료하는 약?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였다.
정천의 입가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선혈. 동시에 그의 살을 엘 듯 짙은 살기가 당철을 향했다.
‘설마! 아닐 것이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본능은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살기를 뿜는 이유는 단 하나.
‘무형독(無形毒)을 알아차렸다고?’
어떻게?
무형독은 무색무취, 말 그대로 색도, 향도 나지 않는 독이다. 독중제왕이라는 현 사천당 가주 당양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용독의 존재를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손버릇이 나쁜 형씨가 하나 있네?”
소매로 입가의 피를 슥 닦은 정천이 정확히 당철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본능이 맞았다.
“흐음, 남궁세가만 조지려고 했는데, 조져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생겨버렸네. 쩝, 귀찮아도 할 일은 해야지, 암.”
정천의 말에 당철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차분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지금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기혈이 들끓어 한 발짝 떼기도 힘들 정도일 것이다. 허장성세일 뿐, 얼마 가지 못해 제풀에 쓰러질 게 뻔하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다.
[자네, 나와 거래를 해볼 생각이 없는가?]당철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 * *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중독 증상으로 벌써 진탕되는 기혈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혼미해지려고 하는 것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아직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전날 보여줬던 무위가 꽤 효과가 있었던 듯 보인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아차린 이가 단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끝장이었다.
그때.
[자네, 나와 거래를 해볼 생각이 없는가?]하마터면 박수를 쳐줄 뻔했다. 상대를 사면초가의 형국으로 만들어놓고 거래를 제안한다라. 얼마나 좋은 전략인가.
[본인은 사천 당가의 당철이라고 하네. 어떤가? 자네가 내 제안을 수락만 해준다면 나는 여기서 자네를 살려줄 수도 있다네.]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단리우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거니와 도착한다 한들 ‘그것’을 가지고 우안을 개방한다면 육장로와의 싸움을 기약 없이 미뤄야만 했다.
‘흐음, 한 이 년만 뒤로 미뤄볼까?’
‘설마 이 년 뒤에도 육장로가 자하동을 지키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생각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제일 먼저, 그 스스로는 천명신공이 보관되어 있는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사부는 장로들의 시험을 통해서 그곳으로 진입할 수 있게 안배해놨음이 분명했다. 이에 더해, 만약 여기서 도망친다면 장로들의 전력이 대사형에게 급격히 쏠리게 될 게 뻔했다. 목숨을 온전히 부지하겠다고 꼬리 말고 숨는 제자를 따를 이는 없을 테니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로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란 기대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 보니 아직 그 기회는 여전히 열려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것’을 낭비할 게 아니라 사천당가의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달콤한 유혹. 심지어 자신은 알고 있었다. 당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말이다.
[추혼비접의 마지막 장이 필요한 건가요?]열망에 가득 찬 눈빛.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잘 알아들으니 좋군. 어때, 나와 거래를 해 보겠는가?] [흐음, 형씨. 혹시 아들이 있나요?]뜬금없이 아들이라니? 당철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아니, 아들이 어렸을 때 놀아줬을 거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한 다섯 살쯤에 말이에요.]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장성하여 얼마 뒤면 약관에 들어서게 될 아이지만 말이다.
[그때, 아이 손에 진검을 쥐어주고 놀았나요? 아, 당가니까 뭐 암기 정도 되려나? 어쨌든 다섯 살 아이의 손에 독이 묻은 암기를 쥐여주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게 지금 중요하게 나눌 대화인가?]물론 당가의 자제라면 어렸을 적부터 암기를 가지고 놀긴 했지만 적어도 목재로 만든 훈련용 암기일 뿐 실전용 암기를 쥐어주진 않았다.
[아니, 생각해봐요. 아직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위험한 물건을 쥐여주겠어요. 그렇죠?]당철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무언가 깨달은 것.
[왜 우리 사부가 그걸 뺏어갔겠어요? 당연히 그 위험한 물건을 아이 손에 쥐여줬다간 큰일 나니까 그랬겠지.]한마디로.
[애새끼랑 어디 위험한 거래를 합니까, 하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