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6
5화. 용의자 을의 헌신 (1)
“봐라. 나같이 아량이 깊은 주인, 큼. 나 같은 보호자가 어디있어? 한낱 의탁자의 말도 잘 들어주고 말이지.”
주인님이라 부르느니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하겠다는 유운의 고집에 정천은 보호자가 되어버렸다. 덩달아 존대는 절대 할 수 없단다. 물론, 정천도 존대를 받고자 했던 적도 없었다.
“그게 말을 들어주는 태도인가?”
어이가 없었다.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훼방을 놓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지금 내 귀로 들어주고 있잖아.”
“……말장난이냐?”
“지금 그 재물 상 아무런 이득도 없이 시간 낭비만 계속하는 가엾은 인간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려는 내 노력이 보이지 않아?”
“시간 낭비라니! 한평생 검을 잡기로 맹세한 이상, 도적이 설치는데 가만 놔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그걸 굳이 네가 해야 한다고? 그런 건 관에 맡기면 되는 문제 아니야?”
도적이 설치는 건 관에서 처리할 문제지, 개인이 해결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관이 제 기능을 했다면 이런 파렴치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너도 잘 알겠지만, 관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기를 꺼려한다고.”
“그런가? 그럼 무림맹에 알려. 무림맹이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거 아닌가? 무림의 평화.”
“그건….”
“왜, 무림맹이랑 껄끄러운 뭐라도 있나?”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정천이 씨익 웃더니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서약 상세 조항 하나, 을의 모든 행동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갑의 통제하에 이루어진다.”
대신 말하지 않으면 그 행동에 제약을 걸면 그만.
‘내가 왜 그런 미친 내기를 수락해서….’
원래 인간은 실패의 위험보다는 성공했을 때의 달콤한 보상에 현혹되는 법. 고위험 고수익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머리를 박박 긁어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부탁한다.”
정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게 바로 ‘갑’질이라는 거지.
“자, 그럼 정리해볼까?”
이 앞뒤가 맞지 않은, 어리숙한 무림 초짜.
“정리하자면, 넌 인신매매의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 여인들을 구출했어. 알고 보니 무뢰배들은 왕호장주의 부하들이었고. 그래서 왕호장주가 작정하고 너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 맞나?”
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너는 그런 풍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지만, 아직 고통받고 있는 여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 너도 신경 쓴다고? 그래, 알겠어. 너에 대한 풍문에 더해 고통받는, 그리고 앞으로 고통받을 여인들을 위해 한 몸 희생하겠다?”
“희생이라기보단…… 정도를 걷는 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이해가 안 가네.”
머뭇거리며 말하는 유운을 정천이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니가 왜?”
“…….”
“희생이니, 정도니 하는 좋은 말은 제쳐두고. 너보다 더 제격인 사람한테 맡길 수 있잖아?”
“하지만!”
“그 장주 놈을 두들겨 패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
“예컨대, 신천보고(神泉寶庫)의 지도를 놈이 가지고 있다든지?”
“……!!”
미세하게 경직되는 유운의 얼굴을 보며 정천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 좀 이야기가 되는 것 같지?”
전설로만 내려오는 보물 창고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야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보물의 곱절은 잠들어 있다는 그곳이라면.
유운은 고개를 돌리며 일갈했다.
“하!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 따위.”
“그래? 그럼 네 입으로 말해봐. 네가 굳이 나설 필요가 어디에 있는데?”
“나는…!”
시종 비소를 짓고 있던 정천의 표정이 한 순간 진지해졌다.
“결국, 무림은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너는 그 힘이 없고.”
너무도 직설적인 선언. 유운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를 악무는 것뿐.
“너는? 뭘 위해서 싸우는 거지?”
정천이 유운을 응시했다. 평소 같지 않은 첨예한 시선에 유운은 입만 달싹일 뿐이었다.
“나는….”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은 힘이 없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유운. 정천이 그 뒤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샤삭-
달도 구름에 가린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언뜻언뜻 비치는 달빛에 검은 복면을 한 인영이 담벼락을 넘었다.
타닥! 탁! 탁!
자시(子時)를 알리는 목각 소리가 장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근무를 교대하는 수문 무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그때, 검은 인영이 스르르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살짝 열린 사랑채 문틈 사이로 들어갔다.
회랑을 지키는 무사는 없었다. 밤마다 행해지는 장주의 은밀한 취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관 바로 앞에 위치한 방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복면인은 회랑을 따라 세 개의 방을 지나치고 마지막 방 앞에 이르렀을 때에야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악, 제발요 장주님!”
“이년아, 돈을 빌렸으면 그 값을 치러야지, 그렇지 않느냐? 몸소 비용을 감면해 주겠다는데 어디서 반항이야?”
장주의 엄한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을 틈타 복면인은 문을 살짝 열었다. 어두운 실내는 벽에 걸린 몇 개의 초롱불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제, 제발. 아버지께서 빌린 돈은 어떻게든 갚을 테니 제발 보내주세요, 흑흑.”
“지금 나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더냐?”
침대 위에서 손을 싹싹 빌고 있는 여인의 옷고름은 헤쳐져 속살이 훤히 비추고 있었다.
“소녀가 이렇게 빕니다, 장주님. 저에게는 정인이 있어요.”
“으헤헤헤, 정인? 네깟 하찮은 계집이 어디 정인을 운운하느냐? 고분고분 내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콩고물이 입으로 떨어질 텐데 말이야.”
왕호장주의 비대한 몸이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응? 자자, 그러지 말고 이리 와보거라, 으헤헤헤헤.”
그리고.
푸욱!
“커헉!”
그 표정 그대로,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쿵!
목이 잘린 육중한 육체가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복면인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일말의 양심?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어차피 사람이기를 포기한 짐승의 목을 자르는 것이기 때문에. 추악함에 응당한 최대한의 고통을 주고자 했지만,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단번에 목을 자르고는 여전히 묶여있는 여인을 응시했다. 눈을 부릅뜬 여인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복면인은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흐읍!”
슥슥 –
네 번의 칼질로 여인을 구속하고 있던 밧줄이 풀렸다. 침묵을 유지한 채 유유히 문을 나서는 복면인. 그리고 그 뒤로 여인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소호변의 호사가들을 뜨겁게 달군 화젯거리. 왕호장주 피살 사건. 발 없는 소문은 연기처럼 급속도로 퍼졌고,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리고 역시나, 그 첫 번째 용의자로 호면마적, 혹자는 호면서생이라 칭하는 유운이 지목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의의 사도 납시셨네!”
풍월객잔으로 들어오는 유운을 보며 정천이 크게 박수 쳤다. 유운은 어두운 낯으로 정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야, 또 언제 가서 모가지를 싹둑 썰고 왔대? 역시나 정의롭지 못한 이를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을 썰어버리는 전설의 대마두!”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운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정천을 쏘아봤다.
“네가 바라 마지않던 일을 해놓고 왜 이렇게 침울해 있는 건데?”
“아니야.”
“뭐? 뭐가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그럼 대체 간밤에 왜 숙소를 벗어나셨을까?”
“…….”
뭐라 말해야 할까. 풍월객잔에 붙어 있는 이 빌어먹을 숙소라는 곳이 허름하다 못해 무너져 내리는데 뒷간이라고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온 동네방네 얼굴이 팔린 상태에서 다른 객잔을 찾기도 난감했다. 참다 참다 용변을 해결하러 깊은 산속 저 멀리 다녀왔다고 차마 입으로 꺼내기가 민망했기에 유운은 결국 변명을 포기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것 봐라? 무언은 긍정이라던데, 자백하는 건가? 네가 범인이라고?”
“아니라고! 오히려.”
유운의 쏘아보는 눈빛. 네가 아니냐고 묻고 있었다. 유운도 정천이 지난밤 숙소를 빠져나가는 것을 봤으니까. 심지어…. 유운의 눈빛이 더 깊은 의구심으로 물들었다.
“그 눈빛은 뭐야? 설마 내가 그 뚱땡이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과장된 몸짓으로 호들갑을 떠는 정천을 보며 유운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저 빈대 같은 놈이 왕호장주 암살을 시도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누굴까….’
이런 일을 벌일 만큼 왕호장주가 원한을 산 이가 누굴까? 유운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의 어두운 낯빛에 정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어차피 왕호장주가 죽지 않았으면 네가 죽이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건 맞지만….”
“그럼 네가 하려던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결해 줬으면 ‘감사합니다!’ 큰절 한 번 세게 박으면 되는 거 아니야?”
“…….”
“왜? 다른 사정이라도 있어?”
은근한 눈빛으로 약을 올리는 정천.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다.
“뭔데? 뭔데?”
유운은 입을 꾹 다물고 객잔 할매가 가져다준 식사에 열중했다.
“에이, 시시하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끼익.
객잔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면면을 확인한 유운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자연스레 손을 내려 자신의 검을 거머쥐었다. 소호오랑, 그리고 뒤편으로 왕호장의 무사들이 보였다. 이들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명백했다.
“너 설마 여기서 싸울 생각은 아니지?”
움찔.
“자, 지금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
“첫 번째, 객주 할멈의 이마에 주름살이 저렇게 자글자글하기 전부터 홀로 지키고 또 지켜오며 수십 년을, 아니, 거의 한평생을 함께하다시피 한, 그야말로 할매 삶의 본산이자 그 한이, 그 얼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풍월객잔을 개박살 내며 저놈들과 싸운다. 어때? 첫 번째 선택지가.”
“…….”
지금 그게 선택지냐!
“두 번째.”
소호오랑이 유운을 발견하고 병장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튀어!”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말만 튀라고 했지, 유운은 소매를 잡아끄는 힘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미안해, 할멈! 이건 나중에 얘가 변상할 거야!”
와장창창!
창문으로 탈출하는 두 신형, 그리고 그 뒤를 소호오랑이 쫓았다.
“야, 이노무 시키들아!”
그리고 그 뒤로 할매의 앙칼진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 * *
“헉헉… 헉헉…….”
적막한 산길을 내달리는 거친 숨소리. 아직 햇볕이 스며들지 않은, 키 큰 나무들로 빽빽한 산속은 아직 어스레했다.
스슥- 스슥-
옥죄어오는 압박감 속에 연신 뒤를 돌아보며 무거운 발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는 사내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더 이상 경공을 펼치기에는 내공이 바닥을 친 지 오래였다.
스슥- 스슥-
샤아아아악-!
순간적으로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사내. 머리 위로 박쥐 한 마리가 스치듯 날아올랐다.
“…헉헉!”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사내는 발길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정면을 응시한 순간!
“으아아악!”
“아, 깜짝이야!”
하마터면 충돌할 뻔했다. 갑자기 수풀에서 튀어나온 두 청년을 본 사내, 그리고 아침부터 웬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뜀박질을 하고 있는 아재를 본 정천이 동시에 놀라 나자빠졌다.
“헉헉! 네 이놈들! 그러고도 무, 무림맹이 좌시할 것 같더냐!”
스릉!
“이 아저씨 왜 이래?”
뜬금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정천과 유운. 검을 겨눈 중년 사내가 두 청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적의가 없어 보이는 두 청년의 모습에 중년 사내가 한숨을 거뒀다.
“두 소협은 누구시오?”
“그러는 아저씨야말로 누구시길래 갑자기 칼을 들이대요.”
“나는….”
중년 사내는 말을 급히 멈췄다.
“좀 전에 얼핏 듣기로 대협께서 무림맹을 언급하시던데, 혹,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굳은 얼굴로 정중하게 묻는 유운을 자세히 살펴보는 중년인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얼굴이 익숙한데….’
유운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중년 사내.
“대협…?”
중년 사내가 말이 없자 유운이 재촉했다. 정신을 차린 사내가 포권을 해왔다.
“여기서 내 정체를 밝히기 곤란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어쨌거나, 지금 본인은 악도들에게 쫓기는 중이오. 두 분 소협도 괜히 해를 당하기 전에 한시 빨리 이곳을 피하시오.”
“흐음… 그렇군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뭐가 말이오?”
“우리도 튀는 중이거든요.”
파사삭- 파사삭-
뒤편에서 일단의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새 소호오랑과 왕호장의 무사들이 지척까지 쫓아왔다.
“형씨는 어느 방향으로 튀고 계셨어요?”
“그게….”
굳이 물음에 답을 해주려던 것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도망치던 방향을 쳐다봤을 뿐. 하지만 이에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조, 좋다니 무슨 말….”
부스럭부스럭!
“저기 있다! 호면마적이 저기 있다!”
“호면마적…?”
마적이라 함은 악을 행하는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자신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추악한 이.
“이런….”
“마적의 부하가 늘었다!”
“마, 마적의 부하?”
중년 사내는 어안이 벙벙해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무사들이 뒤쫓고 있었다.
“그건 오해….”
손을 내저으려는 중년인을 향해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오해를 풀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형씨.”
“……?”
“튀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천이 먼저 내달렸다. 그 뒤를 굳은 얼굴로 뒤따르는 유운까지.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정천의 말대로 오해를 풀고 자시고 할 시간 따윈 그에게 없었다. 그렇기에 중년 사내 또한 도망쳤다.
‘풋.’
열심히 도망치던 정천이 조소하며 뒤편의 높이 솟은 나무를 일별했다.
* * *
무성한 나무의 가지 위에서 두 청년과 중년 사내의 조우를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있었다.
“대주.”
대주라 불린 선두에 선 사내는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십여 명의 흑의 무복을 갖춘 이들이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간다.”
“하지만!”
“……칠공자다.”
“……!!!”
칠공자.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의 왼편에 자리잡고 있던 이가 멀어지는 정천의 뒷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