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73
72화. 증명(3)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정천은 조용히 눈을 감고 기감을 확장했다. 하지만 반경 십 장 이내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기척.
“흐음.”
어디로 사라진 걸까. 늑대 무리로부터 사슴을 인도(?)받아 손질한 후 이곳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반 시진도 되지 않았다.
“눈도 잘 보이지 않을 텐데.”
자연의 기운을 느끼고 움직이는 그와는 달랐다. 웬만큼 내공을 쌓았으니 일반인보다야 안력이 낫겠지만…….
‘빛 한 점 없는 이곳에서…….’
그런데.
“잠깐, 빛?”
주위를 둘러보다 이제야 저 멀리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보였다.
“빛이 있네?”
정천은 지체 없이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 불빛. 그렇게 일각을 달려가자, 하나의 동굴이 나왔다. 그리고.
“모용 소저! 걱정…….”
“정천 공자! 찾았어요, 드디어 찾았다고요!”
혹시 무슨 변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며 달려온 정천.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용인혜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저 동굴 안에서 공자의 검에서 느껴지는 기파와 동일한 기파가 느껴진다고요.”
동굴 안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빛.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불빛이었다.
“노숙지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지.”
“미안해요……. 빛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와버렸어요. 언제 이 빛이 사라질지 몰라서…….”
걱정은 됐었지만, 어쨌든 찾았으면 됐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렇네요.”
정천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들을 향한 살기를. 독특한 게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어슬렁거리며 동굴에서 나오는 거구의 백호.
크어어엉-
“읍!”
장백산의 정기를 머금은 산중왕.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지는 백호의 포효에 모용인혜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이, 이걸 어쩌죠?”
그 누구라도 침입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팔뚝만 한 송곳니를 드러내는 녀석. 다행이라면 먼저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까.
“흐음.”
어떻게 해야 할까. 정천이 고민에 쌓여 있을 때, 그의 고민을 쉽게 풀어 줄 인물이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염이 덥수룩하다 못해 얼굴을 뒤덮은 사내였다.
“묵혼혈룡검…….”
무언가에 홀린 듯 정천에게 다가오는 사내. 진동하는 악취에 하마터면 코를 부여잡을 뻔했다.
“오오…….”
정천과 모용인혜에게는 어떠한 관심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묵룡에게만 꽂혀있었다.
스르릉-
“저, 저기요!”
무인에게 검은 또 다른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거리낌 없이 정천의 검을 잡아 뽑는 사내. 놀라서 소리치는 모용인혜와 달리 정천은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묵혼혈룡검…….”
달빛에 비춰 그 영롱한 검신을 들여보고자 했지만, 달빛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정천을 일별한 사내가 돌아서 동굴 내부로 들어갔다. 어슬렁거리며 그를 따라 들어가는 백호.
“뭐, 뭐죠? 지금 무슨 일이…….”
정천이 씨익 웃음 지었다.
“뭐긴요. 저 사람 나름의 초대죠. 가봅시다.”
갑자기 나타나 낯선 이의 검을 아무 말 없이 가져간 사내도 이상했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정천도 별났다.
“괜……찮은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정천.
“그럼요.”
정천이 아무렇지 않게 발길을 떼자 모용인혜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
내부는 가관이었다. 일단 덥다 못해 너무도 뜨거웠다. 또한,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의 한편에는 수많은 검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동물의 뼈들이 쌓여 있었다. 고로, 악취가 심할 수밖에.
으득- 으득-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던 듯, 백호가 한 마리 늑대의 사체를 뜯고 있었다. 그리고.
“저, 저 사람은 대체 뭘 하는 거죠?”
모닥불에 비춰 묵룡의 검신을 뚫어져라 바라만 보고 있는 사내.
“나도 모르죠.”
세상에 기인이사가 얼마나 많은데, 저런 미친 인간 하나쯤이야.
‘혼천야장이라…….’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요……?”
한쪽 구석에 뚫려 있는 화로를 향해 검을 집어넣는 사내.
“놔, 놔둬도 되는 거예요?”
“놔둬 보죠.”
그깟 화로에 넣는다고 묵룡의 검신이 녹아내린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보단.
[아직 너무도 미약하여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과거 봉황의 검령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도 너무 미약한 건가.’
과거, 전설의 대장장이로 불린 일대 혼천야장. 그가 어떤 기운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말 그대로, 미약했다.
깡- 깡- 깡- 깡-
화로에서 빼낸 검에 냅다 망치질을 해대는 사내. 정천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음냐…….”
그의 행태를 지켜보다 지친 모용인혜는 어느 순간 잠이 들어 있었다.
깡- 깡- 깡- 깡-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그녀를 꿈나라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깡- 깡- 깡- 깡-
아침이 밝아와도 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으음…… 음냐, 으응?”
잠에서 깬 모용인혜. 정천은 그녀가 잠들기 전 그 모습 그대로 사내의 망치질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시진, 두 시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크르르-”
“고, 고마워.”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백호가 그녀의 앞에 사슴의 뒷다리로 보이는 고깃덩이를 가져다 놓았다.
“정천 공자?”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불러볼까도 생각했지만, 무언가에 깊게 빠진 듯해 보이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꼬르륵-
눈치 없는 배는 어쩜 이럴 때 아우성을 치는지.
깡- 깡- 깡- 깡-
하루가 저물어갈 때쯤, 모용인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닥불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침샘을 폭발하게 만드는 구수한 육향이 동굴 전체로 퍼졌다.
‘이 정도면 반응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동굴 야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깡- 깡- 깡- 깡-
그렇게 동굴 내부는 망치 소리로만 가득했다.
* * *
꿈을 꾸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잊은 채. 깊은 바닷물에 몸을 던진 듯 오감(五感)이 둔해졌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어둠 속에 꿈틀거리는 무언가. 그 진신(眞身)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묵룡?”
[계……약……자…….]묵혼혈룡의 염(念)이 들려왔다. 귀로 들려오는 게 아닌 뇌리를 강타하는 소리.
[……잊……었……는…….]“내가 뭘 잊었다는 거야?”
물 밖에서 하는 말을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소리에 정천은 바짝 귀를 기울였다.
[…… 계……약…….]“계약? 내가 어떤 계약을 잊었다는…….”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설마…….”
지난 대사형과의 결전.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너무도 이기고 싶었다. 대사형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말도 되지 않는 약속을 묵룡과 해버렸다.
* * *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대사형만 이길 수 있다면. 그러니,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줘, 묵룡.’
[필멸자의 육신은 언젠간 흙으로 돌아가는 법, 그러나 그 영혼은 영원히 구천을 떠돈다.]‘크윽…… 그럼 내 영혼을 가져가든가!’
[계약은 성립되었다.]* * *
그 이후, 눈을 떴을 때 묵룡은 봉인되어 버렸다. 검주(劍主)가 모든 힘을 잃었으니 어쩔 수밖에.
“잠깐, 그런데 뭔가 잘못된 게 있어.”
[말……하……라.]분명히 마지막 순간, 계약하긴 했다. 그런데.
“대사형을 못 이겼잖아?”
[…….]“이 자식, 이거 사기꾼 아니야? 계약을 언급하려면 계약의 내용을 준수했어야지!”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계……약……은 아……직……유……효…….]“웃기는 놈일세.”
기회는 원래 한 번뿐이라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대신, 네 봉인이 풀리면 다른 걸 선물해 줄게.”
[무……엇……을…….]뭐긴.
“현 무림 절대자의 영혼과 피.”
대사형은 강하다. 단순히 그에 대한 호승심만으로는, 그 어린 치기만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만큼. 사부가 없는 지금, 그는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지금까지 네가 맛봤던 그 어떤 영혼보다도 맛있을 거야. 그 어떤 적혈(赤血)보다도 달콤할 거고.”
물론 당장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 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먹여줄게. 그 피와 영혼을.”
대사형을 뛰어넘는 그날.
우우우우우우-
굉음과 함께 어둠 속 붉게 빛나는 두 개의 구체.
[광오한 검주여, 증명하라, 그대의 의지를.]묵혼혈룡이 두 눈이 번뜩인 순간, 정천은 무아지경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 * *
혼천야장의 망치질이 멈췄다.
“어?”
이제는 꽤 친해진(?) 백호를 쓰다듬으며 반쯤 누워 있던 모용인혜가 몸을 일으켰다.
“…….”
혼천야장은 묵혼혈룡의 검신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천을 향해 돌아서는 그. 그의 얼굴에는 열망이 서려 있었다.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묵혼혈룡검을 건네는 혼천야장. 검을 받아 든 정천의 만면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가득했다.
깡- 깡- 깡- 깡-
그의 망치질이 시작되었다. 선대가 남긴 위대한 유산에 대한 집착이 아닌, 자신만의 족적을 남기기 위해.
“가시죠, 모용 소저.”
“끄, 끝난 건가요?”
끝난 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다. 이제는 증명의 시간이 시작됐으니까.
“벌써 손님이 찾아왔네요.”
“손님이요?”
“뭐, 불청객일 수도 있고. 어쨌든, 밖으로 나가시죠.”
깡- 깡- 깡- 깡-
여전히 끊이지 않는 망치질 소리. 작별 인사는 불필요했다.
동굴 내부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정천. 그리고 그런 그를 모용인혜가 뒤따랐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내…….’
그는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내였다. 고로, 그저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동굴밖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무영문 문하 종복(從僕), 일장로(一長老) 목진, 칠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백발의 노인.
“오랜만입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이들.
침묵뿐이었지만, 모용인혜는 어쩐지 둘 사이의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감지하며 정천 뒤로 물러나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띤 노인에게서 어딘지 께름칙한 기운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먼저, 감축드립니다.”
“별말씀을.”
일장로의 축하 인사에 정천은 씁쓸히 웃음 지었다.
“단순히 제 얼굴을 보고 축하나 하자고 오신 건 아닐 텐데.”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공자.”
급하진 않다. 단지.
“굳이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요.”
정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눈앞의 일장로를 바라봤다.
장로 중 그 누구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노인.
“천명에는 반항할 수 없고, 인과에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법이지요. 소노(小老)가 공자님을 뵙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 또한 순리이니 그 뜻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순리, 여유. 좋네, 좋아.”
그렇다면.
“어떻게, 순리대로 여유롭게 그 숨을 끊어드릴까?”
더 이상 헛소리 못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