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84
83화. 세 번째 관문(1)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고목들 사이로 들려오는 참새의 맑은 노랫소리까지.
쿵- 쿵- 쿵-
대지를 울리는 흡사 대웅(大熊)의 발걸음 소리만 아니었다면, 바위 위에 누워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고 있던 정천의 귀를 거슬리게 할 방해요소는 없었을 것이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한걸음에 그에게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 효룡이었다. 고개만 살짝 틀어 힐끔 그를 일별한 정천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쌀쌀맞은 태도에 섭섭할 만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 노사로부터의 전언입니다!”
미간을 찌푸리는 정천. 비영각 무인을 시켜도 될 일을 왜 굳이 이 인간에게 맡겼을까?
“그런데, 할 일 없어요? 낭인들의 왕이면 이것저것 해야 할 일도 많겠구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말씀 거두어주십시오! 낭인들의 왕은 주군 한 분뿐이십니다!”
정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또 받아쳤다가는 끝도 없을 게 분명했기에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형우가 뭐라던가요?”
“천마신교의 진격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한동안 주춤하던 천마신교의 동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거야 당연히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지금 전한다는 건.
“대사형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거군요.”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천. 효룡이 내심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뭐 할 말 있어요?”
잠깐 눈치를 보던 효룡이 결심을 했다는 듯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못난 충신을 부디 주군의 칼로 써주십시오!”
“얼씨구.”
정천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와 흑랑회(黑狼會)는 언제든 주군의 앞길을 헤쳐 나갈 첫 번째 검으로 쓰이기를 주저치 않고 있습니다!”
약간 과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언제든 정천을 위해 쓰이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물론 정천이 그리 원하지는 않았다.
“혹시 제가 떠나기 전에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나요?”
정천의 부탁. 효룡이 시선을 회피했다.
“크, 크흠, 그게 저…….”
마침 그가 부탁했던 인물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대인!”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은 웃음과 함께 뛰어오는 청년, 단리우였다.
“앗! 어르신께서도 계셨습니까?”
“…….”
단리우를 찬찬히 둘러보는 정천.
“흐음, 제가 떠나기 전이랑 크게 달라 보이진 않는데요?”
효룡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게는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능력이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어, 어르신……! 아닙니다, 저의 재능이 어르신의 눈높이에 맞추기에 한참이나 부족한 걸요!”
“아, 아니다! 네 재능은 충분하다! 모두 내 탓이다!”
“아니에요, 어르신! 제가……!”
서로 눈물을 글썽이며 자책하는 이들.
“아주, 놀고들 있네.”
정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능은 충분한데, 만개하기가 어렵단 말이지.’
정천이 보기에 단리우는 언젠가는 크게 될 놈이 확실했다. 물론, 그러려면 꽃을 피워줄 충분한 양분이 필요한데 그게 너무 부족했다.
“잠깐.”
그러다 문득 단리우의 손을 본 정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그 손 뭐야?”
“예? 제 손이 왜…….”
손등 위에 울룩불룩 솟아 있는 무언가. 핏줄은 아니었다.
“아아, 이거요? 헤헤, 객잔 일을 하다 보니까 손이 좀 투박해지긴 했죠?”
정천이 효룡을 쏘아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효룡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호, 혹시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후우.”
한숨을 내쉬는 정천.
“너, 신발 벗어 봐.”
“예? 아, 예예.”
역시나. 똑같이 기혈이 울룩불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아이고, 두야.”
단리우가 지금껏 성취가 없었던 이유를 단박에 파악한 정천이 이마를 짚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 겁니까?”
“아니, 낭왕씩이나 하시는 분이 이런 것 하나 잡아내지 못했다고요?”
그가 했던 말대로 그는 스스로의 성취는 이룰 수 있겠지만, 좋은 스승은 절대 될 수 없었다.
“너, 이리 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봐.”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는 단리우.
“네가 익힌 심법이 뭐라고?”
“저희 가문의 형운공(形澐功)입니다.”
“그래, 그 심결대로 운기행공을 해봐.”
단리우의 등에 손을 대고 기의 흐름을 느끼는 정천. 단리우가 그 심결에 맞춰 기의 운용을 시작했다.
‘역시.’
단리우의 운기행공이 끝나기를 기다린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단리우의 질문에 정천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너, 정말 심공을 제대로 배운 거 맞아?”
“그럼요!”
단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스스로 터득한 거 말고, 배웠냐고.”
“그, 그건…… 어릴 적에는 아버지께 심결의 초반을 전수받았지만, 커서는 심법서를 통해 마지막 요결을 깨우쳤습니다.”
그게 문제였다.
“물론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도 나쁘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스승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이거야.”
정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홀로 떠나는 길에 어떤 목적지가 있다고 치자. 일정 거리까지야 지도를 보고 갈 수 있다지만, 먼 거리를 가는데 지도에만 의존할 수는 없어. 중간중간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누가 알아? 가령, 계절에 따라 그 길이 잘 포장된 길일 수도, 진흙으로 덮인 길일 수도, 혹은 눈에 덮여 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될 수도 있는 법이잖아?”
“그, 그렇죠.”
“가끔 무슨 동굴에 떨어져 벽에 그려진 초절정 무공을 자득(自得)한다느니 하는 개소리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기연은 없어.”
일단 목적지까지는 한 번 가 봐야, 그 가는 길에 대한 충분한 조언과 경험을 통한 교시(敎示)를 받아봐야 이 길에 어떤 변수가 있고, 어떤 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법이다. 물론 혼자서 찾아갈 수도 있지만, 까딱 잘못하면 비명횡사하기 딱 좋을 수도 있는 길인지 어찌 알겠는가.
“네 대맥의 융통은 문제가 없어. 다만, 사지의 몇몇 세맥이 막혀 있어.”
“그, 그래서…….”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수준에 이른 공력이 더 이상 자연스러운 흐름을 잇지 못하고 막혀 있는 거지.”
그러니 날로 성장하던 단리우의 성장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르자 멈춰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 필요한 스승의 조언이 없었던 것.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주군!”
그렇다고 효룡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부탁을 했을 뿐이니까.
“엄연히 말해서 이건 제 잘못이에요.”
효룡, 그는 그야말로 야생마였다. 생사의 기로에 서서 간신히 살아남으며 벽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며 그 벽을 무너트린 경우. 천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발전은커녕 이미 죽어 나자빠졌을 사내였다. 그러니, 이런 기본적인 문제 또한 발견하지 못한 것.
“그쪽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제 알게 됐으니,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 거고요.”
탓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주군……!”
효룡의 눈에서 무한한 존경과 신뢰가 뿜어져 나왔다.
“…….”
그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정천은 하늘을 바라봤다.
‘하긴, 이 문제가 비단 이 아이의 문제만은 아니지.’
“이제 문제를 파악했으면, 다들 할 일 하러 가시죠.”
축객령이었다. 그의 단호한 얼굴을 본 두 사내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산을 내려갔다.
혼자 남은 정천. 품에서 천무현이 그에게 쓴 서신을 꺼내 들었다.
– 먼저 이 편지를 자네가 받았다면 자네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겠지. 이렇게 편지로나마 자네에게 감사를 표한다네. 내 딸아이도…….
첫 장에는 고마움의 표시가 담겨 있었다.
– 자네와 만났던 지난날, 자네의 눈에서 한 줄기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네. 그건 비단 자네만의 고민은 아니었을 거야. 내 오랜 친우이자, 자네의 사형인 환욱 그 사람에게도 느껴졌던 고민이었으니까. 자네를 만나고 나서 확신할 수 있었지. 그건 아마 자네들의 대사형은 이미 얻은 무엇일 거야. 그가 가진 것에 대한 자네들의 초조함과 갈망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으니 말일세.
천무현은 정천과 환욱을 지켜본 것만으로 단박에 그것을 파악했다. 역시 연륜과 그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법.
– 내 아버지께서는 종종 과거 무명 대협과 무영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시곤 했지. 아직도 생각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었어.
꿀꺽.
‘사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 무영신검(無影神劍). 그 검을 창안한 이가 바로 자네의 사부라는 거야.
그게 흥미로운 이야기인가?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사실에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그다음 문장을 읽은 정천의 표정이 굳었다.
– 그런데 그 전대(前代) 무영문주의 무공은 또 달랐다고 하더군. 전전대도 마찬가지고 말일세. 말인즉슨, 무영문주에 오른 이들은 각자의 무공을 창안했다는 말이야. 자네의 대사형, 송백림이라는 자는 그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네.
문득 떠오르는 무영신검의 검학.
〈자연(自然)은 무위(無爲)로 행하고 말없이 가르친다.
모든 것을 만들면서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생겨나도 가지지 않고 모든 것을 위하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루고도 머물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으니 떠나지도 않는다.
무극지도(無極之道)에 이른 검(劒) 또한 이와 같으니 창(創)과 성(成)이 무위(無爲)에서 그 뜻을 펼치리라.〉
비로소 세 번째 관문에 대한 실마리가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자네가 말했었지. 타 무공의 법(法)과 식(式)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기의 운용을 받아들인다고. 무명 대협은 자네의 그 능력을 보셨을 거야.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겠지.
정천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 ‘이 아이의 투안(透眼)이야말로 진정한 천고의 재능이구나’하고 말일세.
무공 창안, 그리고 그의 재능. 정천은 스승의 뜻과 천무현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 * *
해가 지고, 또다시 해가 떴다.
해가 다시 지고 달이 떠오를 때.
“천유화.”
어느새 그의 앞에 유화가 서 있었다.
“아버지의 서신을 읽은 거야?”
유화의 물음.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르릉-
“처음에는 태극검법을 구사하는 너를 무당의 제자로 오해도 했었지. 그다음에는 내 사부의 유성화우를 구사하더군.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더 이상 ‘유운’과 ‘유화’를 구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신을 읽어봤어. 어렴풋이 알겠더라고. 네가 가진 놀라운 능력을.”
그는 타인의 무공을 흡수한다. 형식이 아닌, 그 요결을.
스르릉-
유화가 검을 뽑아 들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어. 너에게 결초보은(結草報恩)해야 한다고. 그래서 미약하나마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주려고 해.”
정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이 여인은 그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웠다.
“잘 봐둬. 내 가진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펼칠 테니까.”
그녀는 그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선보일 건, 가문의 무극검이야.”
월하가인의 검무가 시작되었다. 정천은 단 하나의 몸짓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창안할 무(武)의 대지에 뿌릴 첫 번째 비료가 되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