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91
90화. 양금신족(量衾伸足) (2)
“화용진가요?”
“거기가 어딘데요, 지 노사님?”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이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봉문을 선언했던 가문이니까. 형우는 어디부터 설명을 해줘야 할까 고민했다.
“무림 사패주(四覇主)에 대해서 말했던 건 기억하니?”
“아! 무명 대협이요!”
한 아이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무영문의 무명 대협이 과거 무림 사패주 중에 한 분이시지.”
무극천가의 천강휘, 숭무련의 백용, 그리고.
“그리고 또 다른 무림 사패주 중 한 분이 바로 화용진가의 진웅 대협이란다.”
“화용진가? 진웅 대협?”
작금의 무림에서야 그 이름이 잊혔지만, 과거의 화용진가는 달랐다.
“지금은 봉문을 했지만, 백 년 전 화용진가는 천하제일가라 불렸을 만큼 엄청났지. 그 가문의 수장이 바로 진웅 대협이고.”
“오오!”
“그러면 그 진웅 대협은 무명 대협만큼 강했나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천강휘 대협과 사흘 밤낮을 겨뤘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무명 대협이랑은요?”
형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강하긴 했지만, 무명 대협의 상대는 아니었어. 그리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지.”
무명 대협에 대한 열등감.
“진웅 대협은 어떻게든 무명 대협을 뛰어넘고자 했어. 그래야 진정한 천하제일이 될 수 있으니까.”
사패주라고 불리지만, 당시 그 누구도 무명 대협이 천하제일의 무인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웅 대협은 무명 대협을 이기기 위해 수련을 엄청나게 했나요?”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무명 대협을 제거하고 묵혼혈룡검을 차지하면 천하제일이 될 거라고 믿었던 거야. 그래서 무명 대협이 홀로 무림행을 하고 있을 때, 그를 죽이고자 했지.”
그것이 무영문과 화용진가 간 악연의 시작이었다.
“누가 천하제일의 무명 대협을 죽일 수 있는데요?!”
“무영문에 열두 장로가 있는 것처럼, 화용진가에는 여덟 당주가 있단다.”
화용진가의 여덟 기둥, 화용팔당(化龍八堂).
“각각의 당이 현 구대문파 하나와 맞설 만큼 강하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엄청났지. 그리고 가주인 진웅 대협을 필두로 각 당의 수장이 모두 모여 무명 대협에게 협공을 가했단다.”
“결과는요? 무명 대협이 졌나요?”
“무명 대협이 죽었어요?!”
“이 바보들아. 무명 대협은 아직도 살아계셔. 이겼으니까 그렇겠지!”
저 어린 나이에 생사를 쉽게 입에 담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무림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조력자가 없었다면 무명 대협께서 힘들었을 수도 있었겠지.”
“조력자요?”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천강휘 대협이 그 계획을 먼저 알고 가내 무인들과 함께 무명 대협을 도왔기에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단다.”
“그러면 무명 대협이 화가 나서 화용진가를 공격했나요?”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시 무명 대협은 화용진가를 용서하기로 결정하셨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용진가는 선을 넘어버렸어.”
“왜요?”
“화용진가의 원신당주가 무영문의 열두 장로 중 마지막, 십이 장로를 죽이고야 말았지.”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일로 인해 무명 대협은 나머지 열 한 명의 장로를 이끌고 화용진가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단다.”
“진웅 대협도요?”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쩐 일인지 진웅 대협은 가내에 없었단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지.”
만약 진웅 대협이 가내에 있었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랐을지도 몰랐다.
“화용진가는 그 이후로 봉문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증표로 무명 대협은 아홉 개의 비도, 구금비도(九禁飛刀)를 각 당의 내원에 꽂았지. 그리고 비어 있던 가주를 대신해 마지막 비도는 그 자리에 있던 소가주에게 주었단다.”
혹시라도 그 비도를 뽑는다면 화용진가 그 어디에도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게 철저히 밟아버리겠다는 섬뜩한 경고와 함께.
* * *
“그 검이 바로 묵혼혈룡검인가 보군요.”
우희의 질문에 정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갖고 싶어?”
갖고 싶으면 가져가라는 듯 장난스레 손짓하는 정천의 행동에 우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오만하게 굴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정천이 고개를 저었다.
“오만한 건 너희들이지. 감히 봉문을 깨고 나와? 분명 사부가 경고했을 텐데?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아 준다고 말이야.”
“호호, 할 수 있다면요.”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금방 효과가 나타날 텐데.”
술병을 가리키는 우희. 하지만 정천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설마 유치하게 술에 산공분을 타고 막 그런 건 아니지?”
그러면서 바닥에 떨어진 비도를 향해 손을 뻗는 정천.
솨악!
정확히 그의 손을 향해 날아가 잡히는 비도.
“……!!”
그가 허공섭물의 한 수를 보이자, 우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최상품의 고독(蠱毒)을 이용해 만든 산공분이었다. 그것을 흡입한 이가 공력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력이 흩어지기는커녕 최상의 한 수를 보이다니!
“정말로 그렇게 고전적인 술수를 쓴 거야? 한동안 무림에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시대 풍조를 잘 모르나 보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쯧쯔.”
“…….”
정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이제 뭘 어떻게 할 건데?”
“치잇!”
우희가 재빨리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손을 뻗는 정천.
파아앙!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콜록! 콜록!”
단리우가 기침을 연발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척들.
“대인! 저들이 도망치고 있어요!”
“놔둬.”
“예?”
“잔챙이들 잡아서 뭐 해. 오늘은 경고만 하려고 이곳에 온 거야.”
어차피 화용진가의 진정한 실세들은 지금 이곳에 없다. 그들 또한 그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자 일을 꾸몄던 것뿐일 테니까.
“그래도 술맛은 좋았으니 다행이야.”
공짜 술도 맛나게 먹었으니 이득이라면 이득이었다.
화용진가의 끄나풀과 대적하고도 여유롭다 못해 느긋하기까지 한 정천을 단리우가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아침.
“…….”
두 사내가 그들 앞에 마중 나온 여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정천 공자.”
천가의 정문 앞. 마중 나온 여인, 천유화가 정천을 향해 요조숙녀인 양 고개를 숙였다.
“흠흠, 들어오세요. 제 오라버니는 바쁜 사정이 있어 부득이하게 제가 모시게 되었어요.”
그녀의 얼굴 또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녀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여인. 갓 소녀티를 벗은 앳된 여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화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영령이라고 해요.”
그녀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계속 정천과 단리우를 힐끔거렸다.
“영령, 가만히 있지 못하겠느냐?”
그런 영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유화가 핀잔을 주었다.
“예예, 아가씨.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가.씨 라서.”
“…….”
유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쪽 분이 정천 공자님이신가요?”
“그런데? 왜? 나를 아니?”
“오오. 그렇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킥킥.”
“이야기……? 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키득거리는 영령. 유화는 어떻게 이 말괄량이를 떼어 놓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아, 아가씨한테 말고, 유.운.공.자님한테서요.”
“영령!”
그때, 외원으로 한 중년의 여인이 나왔다. 곱게 늙었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몸소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 자애한 미소를 띠며 정천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고모…….”
유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 뵈어요. 유화의 고모, 천화영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정천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리우입니다.”
살갑게 그들을 맞이하는 천화영.
“어젯밤 유화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들어와서 차 한잔하지 않겠어요?”
천화영의 제안에 정천과 단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언제든지요.”
“그럼, 가시죠.”
그녀의 시선이 유화를 향했다.
“유화, 너도 함께 가야겠지?”
“…… 예.”
도살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소의 표정이 이러할까.
[유화 누님이 왜 저러는 걸까요?] [난들 아나.]하나 확실한 건, 천가의 내부에서 유화가 유운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 * *
“차 맛이 좋네요.”
진한 용정차의 향을 음미하며 홀짝이는 정천. 그런 그를 천화영이 빤히 바라봤다.
“먼저, 제 오라비와 조카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의 인사를 드려요.”
“해야 할 일을 했던 것뿐입니다.”
조카를 바라보는 천화영의 눈은 마치 물가에 내놓은 자식을 바라보는 것처럼 걱정이 그득했다.
“이 아이가 일찍이 어미를 여의고 제가 어미의 역할을 대신해왔지요.”
“고모…….”
걱정만이 아닌, 사랑이 그 눈빛에 한가득이었다.
“제 어미를 닮아 어렸을 때는 얼마나 조신했는지. 글쎄, 하루는…….”
“고모!!”
빽 소리치는 유화.
“얘가 이렇다니까. 그 얌전하던 아이가 이렇게 왈가닥이 되어버려서…… 아이고,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그러는 건지. 응?”
“…….”
“어허, 또 눈 그렇게 뜬다. 그 예쁜 눈을 그렇게 뜨면 돼? 안 돼? 몸과 마음이 항상 조신하고 정갈해야지.”
“…….”
폭풍 잔소리에 유화뿐만 아니라 정천과 단리우까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천을 향해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는 천화영.
“우리 아이와 연정을 나누신 사이인가요?”
“푸웁!”
“고모!!!”
훅 들어오는 천화영의 질문에 정천이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어냈다.
“아이고,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남녀가 오랜 시간 동행하다 보면 연정도 쌓고 그런 거지. 글쎄, 나도 예전에 무림행에서 얘 고모부를 만났지 뭐예요. 호호. 그때 뭐가 그리 좋았는지. 글쎄…….”
“고모, 제발……!”
“알겠어, 알겠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리 안절부절을 못할까? 응?”
고모가 부끄러운 유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호호, 제가 이래요. 요즘 사람을 자주 못 만나다 보니, 주책이야, 주책!”
정신없이 몰아치는 그녀의 수다 끝에 눈빛이 돌변했다.
“어젯밤 화용루에서의 일은 그대들이 벌인 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정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조양은 무극천가의 영역이었다. 가주를 대신해 가문을 돌보는 그녀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어젯밤 대략의 이야기는 이 아이에게 들었답니다. 우리 가문을 돕고자 오셨다고.”
“정확히는 과거 제 사부를 도왔던 천가가 당시의 도움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무영문의 일이었고, 도움보다는 보답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네요.”
“말씀하십시오.”
그녀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영문이 우리를 돕고자 하는 건가요? 아니면 막내 제자인 그대만 우리를 돕고자 하는 건가요?”
“무영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다른 사형제들도 우리를 도우려 하나요?”
“그렇습니다.”
무영문의 문칙 중 하나. 결초보은(結草報恩). 무영문의 모든 문도는 천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도움 거절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