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93
92화. 양금신족(量衾伸足) (4)
늦은 밤.
“아버지.”
“그래, 윤아.”
“바람이 차요, 아버지.”
“껄껄, 이 정도는 괜찮단다.”
청년의 시선이 맥없이 펄럭이는 아버지의 오른쪽 소매를 향했다.
“네가 무림에 나갈 그날이 멀지 않았구나.”
“걱정되어 잠을 못 이루시는 거예요?”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년 사내.
“무영문의 악귀들이 우리 가문을 짓밟던 그날, 나는 고작 열 살이었어. 대체 왜 그들이 그런 끔찍한 짓을 벌였는지 당시에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
과거 천하제일가라 불렸던 화용진가. 하지만 어느새 그 명성은 과거의 영광이 되어 있었다. 무영문에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게 되면서 말이다.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진윤은 잠자코 아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그 악랄한 놈들은 가주께서 부재중이신 틈을 타 우리를 공격했어.”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그의 눈은 무영문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파르르 떨려왔다.
“그래도 나는 꾹 참고 살아왔었지. 훗날 언젠가의 복수를 꿈꾸면서 말이지. 그런데.”
그의 시선이 아직 어린 아들을 향했다. 이제 약관이 지난 나이.
“스무 해 전 네가 태어났던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봉문을 당한 채 참고 살아왔다. 그리고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늦게 본 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했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그리고 슬픈 날이기도 했지.”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의 아비가 죽었다. 그것도 바로 그의 눈앞에서.
그러다 한숨을 내쉬는 사내.
“네 할아버지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아비였다. 무림오검이라 불리며 백도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던 분이셨지.”
뿌득.
이가 부서질 듯 꽉 깨무는 아비를 보며 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무영문의 막내 제자. 그놈이 내 앞에서 내 아비의 가슴에 검을 꽂았지. 그것도 모자라…….”
손이 존재하지 않는 오른 손목을 움켜쥐는 사내.
“그놈이 그날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이미 알고 있지만, 진윤은 답하는 대신 말을 잇지 못한 채 분노를 삼키며 하늘을 바라보는 아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형씨. 다시는 덤비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손목 하나로 봐줄게.’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감히 천하제일가, 화용진가의 제일당(第一堂), 원신당의 당주이자, 무림오검의 일인으로 불렸던 그의 아비를 죽여놓고 태연하게 했던 말이었다.
“제가, 제가 꼭 무영문을 영원히 이 중원 무림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게요, 아버지.”
“부탁한다. 이 아비의 이 들끓는 한을 꼭 풀어다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검을 잡지 못하는 아비를 대신해 그를 처단해야만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들끓어 오르는 진기를 애써 억누르는 진윤. 가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완성된 이가 바로 그였다.
‘내가 해야만 해.’
진윤은 끝없이 다짐했다.
* * *
“네, 네가 죽였다고?! 무림오검의 일인을?”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뭐야?”
“어, 어째서?”
어릴 적부터 무림오검의 의협행을 수없이 들어왔던 유운이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백도 무림에서 성장하며 꿈을 키운 무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무림오검을 존경해 마지않을 것이었다.
“어째서? 뭐야 그 악인을 보는 듯한 눈빛은.”
대체 진완 대협이 그에게 어떤 잘못을 했다고 그를 죽였을까? 심지어 사패주를 제외하고 구 무림 최강자 중 한 명을 이겼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무슨 광인도 아니고 길 가다가 시비를 걸어서 죽였겠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랬지.”
“수많은 의협행을 행한 진완 대협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아직도 생생했다. 장강 유역에서 악행을 일삼던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을 홀로 깨부수고 인신매매를 당하던 아녀자들을 구했던 그의 일화.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의협행의 주인공이 바로 구천검존 진완 대협이었다.
“지나간 과거는 극단으로 미화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 극단적인 악화가 일어나기 마련이지요.”
정천 대신 유운의 말에 대답한 삼장로, 양곤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드릴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진완, 그에게 이 늙은이는 하나뿐인 혈육을 잃었지요.”
“……!!”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뜨는 유운에게 정천이 덧붙여 말했다.
“그가 무영문의 열두 번째 장로를 죽였지.”
그의 하나뿐인 피붙이가 바로 과거 무영문의 십이장로였던 양홍이었다. 정천이 화용진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삼장로를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체 왜 진완 대협은 그를 죽인 건가요?”
단리우가 물었다. 원한 관계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제 아우가 죽은 이유라…….”
양곤이 당시를 생각하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약했기 때문이었지요.”
“예?”
“원한 따위는 전혀 없었소이다.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으니 말이지요.”
그저 유희였다. 강자를 찾아다니던 진완의 눈에 띄었고, 그에게 무릎 꿇은 양홍을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
“아, 물론 무영문의 장로라는 이유도 있었겠구려.”
“그럴 수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유운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노인네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선한 인물이 아니야.”
당시 정천을 찾아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자 놈들 하나하나를 찾아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 그 첫 번째가 바로 네놈이고 그 마지막은 네놈의 더러운 사부다.’
그는 정천을 약자로 얕봤다.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나를 죽이려는 인물을 내가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
심지어 사부를 모욕하기까지 했다.
“…….”
“네가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의 시선이 단리우를 향했다.
“지금쯤 그 손자가 네 나이쯤 됐겠네.”
“그런……데요?”
무언가 불안한 눈빛.
“무영문을 대표해서 네가 그놈을 박살 내면 되겠어.”
“호오, 이번에 제자로 거두신 아이 인가요?”
그러면서 단리우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는 양곤.
“에이, 제자는 무슨. 난 그런 거 안 키워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양곤을 바라보는 정천.
“설마…….”
“이 기회에 이 녀석도 제대로 배우게 하려고요. 무영신검의 기본 요결만 배운 상태예요. 다시 말해.”
씨익 웃는 정천.
“아주 신선한 상태라는 거죠.”
“…… 제가 무슨 갓 잡은 생선도 아니고…….”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대전까지 얼마나 남은지 아십니까?”
“이제 뭐, 달포 정도 남은 거 아닌가요?”
“이제 무영신검의 기본 요결만 배운 아이를 달포 만에 무관대전에서 우승시키라는 말입니까?”
왜 안 되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정천.
“뭐, 이 녀석 그래서 내실은 탄탄하게 만들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셔요. 모르긴 몰라도 동년배 중에서 이 녀석보다 괜찮은 놈은 많지 않을 거예요.”
사지의 세맥을 뚫지 못해 한동안 고생하긴 했었지만, 문제를 해결한 이후 급격히 성장 중인 녀석이었다.
“칠공자께서 그 실력을 보장하신다면 이 늙은이도 당연지사 걱정할 게 없겠지요. 허나…….”
그의 표정을 읽은 정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삼장로께서 애써 키운 제자가 있나 보군요?”
“허허,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키운 아이들이야 많지만, 그 아이들이 설마 칠공자께서 보장하는 저 아이보다 뛰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말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럼, 한번 붙여보면 되겠네요.”
“일단, 무관 당 할당된 무관대전 출전 인원은 총 다섯입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자신보다 뛰어난 이와 겨뤄보고 그 부족함을 깨닫게 하기에는 좋을 듯 하군요.”
장황한 말이었지만, 결국 한번 대결을 붙여보자는 말이었다. 그들을 이긴다면 단리우에게도 출전 기회가 생길 테고.
* * *
널찍한 연무장에 종영관의 관도들이 모두 모였다.
“이야, 엄청 많네.”
족히 백 명이 넘는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 중 몇 명이나 무영문에 입문하는 건가요?”
“하하, 보통 기수 중 일 할의 인원도 되지 않습니다.”
정천과 양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유운은 이 종영관이라는 무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무영문도를 양성하는 곳이었구나.’
무영문은 점조직이다. 무림 전역의 각 조직에 무영문의 문도가 없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무관대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이들 대부분은 이곳, 종영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말인즉슨.
‘무관 출신의 무림맹 일원들은 대부분이 무영문도겠구나.’
무영문의 규모가 대단하다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중원 곳곳, 여러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을 하나 보군요.”
정천이 흥미롭다는 듯 연무장 중앙으로 나서는 소년을 바라봤다.
“음?”
이들을 관주실로 안내해주었던 그 소년이었다.
“너무 어린아이가 아닌가요?”
“하하, 그렇게 보이십니까?”
“발육이 조금 느린 건가요?”
양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유운이 탄성을 내질렀다.
“왜? 뭔데?”
“잘 봐봐.”
유운의 말에 다시 소년을 봤지만, 정천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비쩍 마른 소년이었다.
“바보네, 아주.”
“저 아이, 연진이의 행색이 사내아이 같아서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하하.”
“엥? 여아였다고요?”
어딜 봐도 사내아이였다. 그런데 또 이름은 딱 들어도 여인의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방년(芳年)의 여인이지요. 올해 스물쯤 되었겠네요.”
“……말도 안 돼.”
정천의 반응에 삼장로가 슬쩍 유운을 일별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밖에 없겠군요.”
“예?”
“하하, 아닙니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군요.”
단리우와 연진이 목검을 들어 올렸다.
* * *
“단리세가의 아니,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리세가.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소속이 있었다.
“무영문의 단리우입니다.”
“아직…… 종영관의 연진입니다!”
긴장한 얼굴이 역력한 연진. 그녀의 이름을 들은, 정확히는 이름과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단리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진?”
사내아이에게 붙일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도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본산에서 오신 높은 분의 귀한 검을 마주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예? 무슨…….”
그녀가 꿈에서만 그리던 본산 출신의 인물이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
그러나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두웅-
북이 울리고 둘의 비무가 시작된 것.
‘흐음.’
연진의 눈은 당장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처럼 불타올랐다. 반면.
“먼저 들어오시지요.”
단리우는 상대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구대문파도, 팔대세가도 아닌 무관 출신이었으니까.
“…… 그럼, 사양치 않겠어요.”
연진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리고.
“……!!”
단리우의 눈이 깜빡하던 순간.
그녀의 검이 단리우의 목에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