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99
98화. 대망(大蟒) (5)
어둑해진 밤하늘.
쿠우웅-
파아아앙-!
저 멀리 어디선가 연신 파공성이 들려왔다.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후끈 달아오르는 전장의 열기가 느껴졌다.
“크아악!”
“아아악!”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비명성까지.
“…….”
정천이 당도했을 때,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백색 무복의 무인들, 그리고 흑색 무복의 무인들이 뒤엉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영문의 제자들은 원칙적으로 무영문 내의 무력 집단을 거느릴 수 없었다. 문주가 되어야 비로소 무영문 최강의 무력 집단인 무영진천대(無影進天隊)의 주인이 될 자격이 부여된다. 고로, 현재 무영문에서 움직일 수 있는 무력 집단은 각 장로가 독립적으로 양성한 이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저건 무슨 상황이야?”
백색 무복의 무인들, 그리고 흑색 무복의 무인들 모두, 가슴팍에 무영문의 표식을 지닌 이들이었다. 빠르게 전장을 훑는 정천의 눈에 서로 검을 겨누고 있는 두 사내가 들어왔다. 지금 이 전장에서 가장 뛰어난 기파를 뿜어내는 두 사내. 그대로 검을 뽑아 든 정천이 두 사내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콰앙!
“쿨럭!”
“커억!”
정천의 한 수에 두 사내가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무영문 제자, 정천이 명한다. 모두 검을 멈추어라!”
내공이 깃든 웅혼한 외침. 그 거역할 수 없는 기운에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내치던 검을 멈췄다.
“소속을 밝히라.”
흑과 백, 두 사내를 번갈아 돌아보며 물었다.
“대무영문 문하 종복(從僕), 백혼대주(白魂隊主) 위승룡, 칠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백혼대. 즉, 삼장로가 양성한 무력 집단이었다.
“대무영문 문하 종복(從僕), 흑혼대주(黑魂隊主) 갈재, 칠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흑혼대. 사장로의 세력이었다.
“칠공자! 사장로와 흑혼대를 믿으셔선 안 됩니다! 저들은 무영문을 배신하고 화용진가에 붙었습니다!”
성난 백혼대주 위승룡이 소리쳤다.
“갈! 어디서 그 더러운 주둥이를 놀리느냐!”
이번에는 흑혼대주 갈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첨예하게 대립한 두 집단의 목소리.
“잠깐.”
정리를 하자면, 삼장로의 백혼대와 사장로의 흑혼대가 싸우고 있다. 그리고 서로가 무영문을 배신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고운당은? 대사형이 고운당주에게 당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건가?”
“저들이 배신하는 바람에 대공자께서 당하셨습니다!”
“칠공자께서는 저자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백혼대주, 위승룡이 선수를 쳤다. 당연스레 갈재가 반박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 정천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칠공자,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가 이적행위를 했다면 삼장로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 정천은 지금 삼장로로부터 급보를 듣고 급히 달려온 상황이다. 그런데 삼장로는 사장로의 배신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헛소리!”
위승룡이 소리쳤다.
“아닙니다, 칠공자. 대공자께 향하는 길에 저들이 급습하는 바람에 삼장로께서는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하신 것뿐입니다!”
정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란한 상황.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그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누군가는 확실히 무영문을 배신했다는 거네.”
삼장로, 혹은 사장로가 무영문을 배신했다. 그 자체만으로 정천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떤 연유로……?’
무영문의 장로다. 과거 무림 최강이었던 사부, 무명이 임명한 장로다. 심지어 화용진가를 봉문할 당시 동참했던 이들이었다. 그 누가 됐건 간에 납득이 되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없는 거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누군가는 배신했고, 나는 누구인지 찾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묵빛 검신이 두 대주를 향했다.
“깔끔하게 둘 다 죽자.”
“…….”
정천의 말에 두 사내의 눈빛에 두려움이 서렸다.
“어차피 나머지 대원들은 대주를 따른 것뿐일 테니, 다 놓아줄게.”
정천이 둘을 번갈아봤다.
“내 앞으로 오도록.”
두 사내가 무거운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나란히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
“…….”
두 사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억울할 건 없지? 제자가 내리는 즉결 처분은 어떤 경우에도 순응해야 한다는 건 알 테니까.”
무영문에 발을 들인 이상, 장로를 제외한 모든 무영문도의 생사여탈권은 제자에게 있었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라고. 배신한 이가 누구든 그쪽은 철저하게 밟아줄 테니까.”
정천이 묵룡을 높이 치켜들었다. 단 일 검이면 두 사내의 목은 떨어질 것이다.
쌔앵-
붉은 검기를 머금은 채 묵룡이 공기를 가르고 떨어져 내렸다.
번쩍!
눈을 뜬 사내. 정천의 입가에 실소가 맺혔다.
“네놈이구나.”
순식간에 품에서 비도를 꺼내든 사내. 하지만 늦었다.
푸욱!
“커헉!”
흑색 무복의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심장에 찔린 검을 바라보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
눈을 뜬 백혼대주, 위승룡. 눈 깜빡할 사이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왜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이겠어.”
정천이 뒤를 돌아봤다.
“네놈들은 오늘 여기서 모두 죽는다.”
흑혼대를 향해 발을 옮기는 정천.
“그래, 알아. 네놈들 수장이 잘못이라는 거. 그런데 말이야. 궁극적으로 네놈들이 충성할 이는 장로가 아니라.”
제자들이 무력 집단을 갖지 못하는 이유. 아니, 정확히는 갖지 않는 이유.
“우리, 제자들이라고.”
모든 무영문도는 문주와 그 제자에게 충성한다. 어차피 그것이 무영문의 법도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배신자들을 처단한다.”
순식간에 흐릿해지는 정천의 신형.
솨아아악-
그의 신형이 나타난 순간, 흑혼대의 대원들은 혼비백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
푸욱!
정천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러니까 왜 배신을 해. 어차피 이렇게 죽을 거.”
정천은 단 하나라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듯 그들의 뒤를 추격하며 모든 흑혼대를 척살했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정천을 따라 모든 흑혼대원을 전멸시킨 백혼대와 대주, 위승룡.
“대사형은?”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충성에 대한 신의를 보여준 칠공자에게 감격한 위승룡이 답했다.
* * *
야산의 작은 동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무인들이 정천을 향해 고개 숙였다.
“대사형은?”
“안에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동굴 내부로 들어가는 정천. 내부는 약 향과 혈 향이 뒤섞여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한 사내.
“끌끌, 어떠냐? 내 꼴을 본 소감이.”
“…….”
작은 횃불에 비친 송백림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원체 창백했던 얼굴이 심한 내상으로 인해 퀭하다 못해 푸르죽죽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송장의 몰골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요?”
“크하하,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보면 모르겠느냐? 그저 약하기 때문에 당한 것뿐이다.”
무영문 제자 중 월등한 무재를 뽐내던, 언제나 자신이 넘치던 과거의 대사형이 아니었다. 육신의 피폐함이 정신의 나약함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던가.
“고운당주에게 당한 거요?”
“끌끌, 왜? 복수라도 해주게?”
정천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막내야, 너는 그를 이기지 못한다.”
송백림의 단언.
“그는…….”
그날을 회상하는 송백림의 눈빛에 짙은 패배감이 서려 있었다.
“……화용진가는 달라졌다. 우리가 반목하는 사이, 그들은 한 단계 더 올라선 것이지.”
대체 어떤 싸움을 겪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를 이렇게 회의적인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그는 대망(大蟒)이야. 언젠가 용으로 승천할 대망이다.”
오면서 위승룡에게 대강의 이야기는 들었다. 대사형을 구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무영문도가 그 목숨을 다했다.
퍼억!
정천의 주먹이 송백림의 복부에 꽂혀 들었다.
“꺼억! 네…… 이놈!”
혀를 차는 정천.
“아니, 이렇게 누워서 병신같은 소리나 지껄일 거면 내 묵룡은 왜 노린 거요? 아니 그리 나약해 빠져 가지고 무슨 대의를 이룬다고.”
묵혼혈룡검. 사부의 신물이자, 상징이었다.
“이 검을 뺏고 무영문 최고의 자리에 앉으려 한 거 아니었소? 차라리 그때의 탐욕스러운 대사형이 더 나은 거 같은데 말이지.”
“네놈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버텼는지 말이야.”
“지랄도 풍년이오.”
정천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송백림.
“끌끌끌끌, 크하하하. 쿨럭! 쿨럭!”
그에게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지금 이 상황이 재밌소?”
“오랜만에 네놈의 그 싸가지가 실종된 욕지거리를 들으니 왜인지 기분이 좋구나.”
“변태인가.”
한참을 더 웃던 송백림이 얼굴을 굳혔다.
“모두 네놈 탓이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요?”
“자연검이라 했던가?”
광극지관(光極之關)에 도전하기 위해 창안했던 그 검.
“나의 파천마검(破天魔劍)을 박살 냈던 그 검 말이다.”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네 검을 보며 벽을 느꼈지.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광극지관을 통과할 자격이 있구나’ 하고서 말이야. 끌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그때부터였다.”
벽을 느끼기 시작한 것. 왜 사부가 자신이 아닌 막내에게 묵혼혈룡을 하사했는지 깨닫게 된 순간.
“그런데 둘째가 나타났지. 하하, 네놈도 그놈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더군.”
걷는 도중 뛰는 놈을 만났는데, 날아다니는 놈까지 연달아 마주했다.
“그때부터 수렁이 시작되었어.”
후회가 되었다.
“천명신공을 더 깊이 파야 했을까? 무림행에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해야 했을까? 무수히 많은 후회가 내 정신을 지배했지. 네놈은 알까?”
모든 이의 극찬과 기대, 그리고 염원을 한 몸에 받던 그가 벽을 느낀 순간 찾아온 위기.
“너는 그에게 덤비지 말아라. 아직은 말이다. 아직은.”
처음이었다. 대사형으로서 진심 어린 걱정을 하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저 높은 창공에서 맨몸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는 건 그 자신 하나로 충분하다고, 송백림은 생각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정천 또한 그의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오랜 기간 쌓인 증오심이 한순간에 흩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안 된다. 자연검을 완성해야 해. 그래야만 그에게 대적할 수 있다.”
송백림도 알고 있었다. 정천이 창안한 자연검은 아직 미완이라는 것을. 하지만 정천은 픽 웃음 지었다.
“대사형 몸이나 걱정하쇼. 난 이만 갑니다.”
돌아서는 정천.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
정천이 멈춰 섰다.
“걱정 말고 한잠 푹 자고 일어나쇼. 지금 가서 완성할 거니까.”
– 서로 화(和)하여 극(極)에 이르면 무(無)의 오의(奧義)를 깨우치리라.
무(無). 사부가 말한 그 ‘무’가 무엇인지 조금은 와닿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