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224)
224_[외전] 원점에 서다 (6)
조선은 왜의 변화를 파악하고 태도를 바꿨다.
왜의 이변은 조선이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일왕이 내쫓기고,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과 그 수하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라는 자가 권력을 잡았다고 합니다. 무척이나 호전적이라고 하더군요.”
왜의 이변을 알게 된 뒤,
조정은 회의 끝에 영국 여왕의 조언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일국 왕의 발언이란 건 그만큼의 무게감이 있었다.
해군의 전체적인 강화가 진행되었고,
태만하던 균율을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다만 조선이 해군에 투사할 수 있는 지원에는 한계가 명확했는데, 사림이 지나친 군비 확장에 부정적이었을 뿐더러 조선 자체가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던 탓이 컸다.
“영국이 동맹에 호의를 베풀도록 하지.”
이때 나선 건 뜻밖에도 영국이었다.
조선에 원병을 요청할 줄 알았던 영국의 여왕은,
되려 조선에 군수물자를 지원해주었다.
희한하게도 지원의 대부분은 전라좌수영으로 향했는데,
이는 영국 여왕의 강력한 사심 덕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국이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다는 말인가?”
조선은 대가없는 호의를 의심했다.
하지만 여왕은 공동의 적을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그들을 설득했고, 조선에서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공짜 군수물품을 거절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영국 여왕이 주상에게 직접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이 주효했다.
하성군은 전부터 영국에 호의적인 이들을 그의 파벌로 삼으려 했는데, 막상 영국의 여왕이 그를 통하지 않고 왕을 직적 상대하니, 하성군의 꼴이 우스워졌기 때문이었다.
평소 하성군을 견제하던 이들에겐 속이 시원한 결과였다.
‘비록 야인이라 하나, 도의를 아는 자들 같군.’
조선의 어린 주상 역시, 영국에 호의를 품게 되었다.
골치 아픈 사촌형 견제를 도와주고 군수품을 지원해준 국가를 싫어하기란 어려웠다.
이렇게 영국은 조선에 빚을 지워두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국의 손해가 막대해보이는 거래였으나,
사실 내부를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었다.
우선, 영국은 동양에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했다.
포르투갈과 동양에서의 상권 경쟁을 하고 있는 지금,
영국이 조선과 더욱 친밀해지는 건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포르투갈은 왜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번에 지원한 군수품의 규격 문제도 있었다.
영국은 현재, 도량형 개량이후 독자적 규격을 쓰고 있었다.
여왕이 도입한 이 도량형은 무척이나 효율적이었으나,
타국의 군수품 규격과는 영 다른 것이 문제였다.
군수품의 규격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대포의 규격을 하나 바꾸면, 포탄이 호환되지 않는다.
규격이 크게 변화하면 숙련되는데 시간도 걸린다.
때문에, 영국은 현재 군수품에 한해 이원체계를 유지 중이다.
해외에 군수품을 판매하려면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때문에 영국은 조선에 신규격 군수품을 지원했다.
아직 대포 등의 수량이 충분히 많지 않은 조선에,
영국제 신규격 군수품이 대거 자리잡게 되면 어찌될까.
자연스레 조선의 군수품 규격을 영국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되면 후일 조선에 군수품을 판매 할 때,
영국은 타국 대비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
그런 장점들을 다 차지하고라도,
조선에 빚을 지워둔 것만해도 나쁘지 않았다.
조선은 깐깐한 성리학자들이 많았으나, 그런 그들이기에 더더욱 영국에서 지워둔 빚을 외면 못할 가능성이 컸다.
나아가, 젊은 학자들이 영국에 호의적일 가능성도 컸다.
조선은 한결 거부감 없이 영국에 문을 열게 될 것이다.
‘뭐, 꼭 그런 걸 노리고 조선을 지원한 건 아니지만.’
여왕은 갖가지 명분으로 본심을 숨기며 웃었다.
여왕의 진심은, 이미 페르디난트에게 얘기했던 대로.
이건, 과거를 떠내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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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한참 벗어난 외곽 지역.
논과 밭. 그리고 강뿐인 이곳에 이질적인 외국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영국의 여왕 부부.
영국과 조선의 사이가 한결 부드러워진 지금,
조선에 허락을 구해 나들이를 나온 이들이었다.
조선에선 이 별 볼 일 없는 시골을 둘러보려는 여왕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여왕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들에겐 말해줄 수 없는 이유였으니까.
“무척 넓고 긴 강이군요.”
페르디난트가 강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한양이란 도시에서 여기까지 이어지는 것 같은데, 제가 지금껏 본 강들 가운데도 독보적으로 넓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왕은 한강 변을 둘러보면서 이야기했다.
21세기엔 이 넓은 강변의 주변으로 건물들이 가득 들어차 미처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이 시대에 보는 한강은 무척 광활하고, 또 황량해보일 정도로 넓었다.
그럼에도 고고히 흐르는 저 푸른 물살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지금과 같아,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여름에는 종종 여기에 놀러오고는 했어.”
여왕이 담담히 말했다.
“강변에 앉아 친구들과 떠들고, 치킨을 먹었지.”
“런던 궁에서 즐겨 드시던 그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곁에 페르디난트가 있음을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여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때엔 이 동네도 서울에 포함되어 있었어. 온통 거대한 건물이 가득했고, 이 앞엔 마차가 8 대는 동시에 지날 수 있을만큼 넓은 도로가 있었지. 그 길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내가 다니던 대학교가 있었어.”
“대학교요? 학자였나요?”
“아니, 내가 살던 시대에는 누구나 대학교를 갔으니까. 뭐, 나는 졸업하진 못했지만.”
그때는 그렇게나 씁쓸했던 현실의 고난이,
이제는 그립기만 한 추억이었다.
“그래, 그 좁다란 기숙사. 아직도 생생히 기억 나. 엄하던 사감 선생과, 같이 기숙사를 쓰던 친구들.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면,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함께 한강을 보러 왔었지.”
추억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페르디난트는 종알대는 여왕을 그저 바라보았다.
지금의 여왕은 여왕이 아니라, 평범한 소녀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여왕의 이야기가 잦아질 때쯤,
페르디난트가 가만히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했다.
“수백 년 뒤면 이 논밭이 그렇게 변한다니, 신기하군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희한한 이야기였다.
지금 이곳은 황무지처럼 벌판이 펼쳐져 있는데, 여왕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공원이 보이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은 탑과, 말없는 마차가 다니는 검은 길과, 수천수만 명의 사람이 돌아다니는 거리가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였다.
“미래에 정말 그렇게 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글쎄, 미래에 그리 될지 어쩔지는 나도 모르지.”
여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미래는 같을 수 없어. 이미 역사는 변화했는걸.”
여왕은 전라도에서 올라온 보고를 떠올렸다.
사심을 담아, 거북선에 지원품을 실어보낸 곳.
그곳에서 거북선에 영감을 받은 배를 만든다고 들었다.
이 조선 해협의 특성을 살린 대함선이 만들어지리라.
그러나, 그 배는 여왕이 기억하는 거북선일까?
‘아마, 아니겠지.’
보고 겪은 것이 다르지 않나.
서양 함선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지는 그 배는,
기억 속의 함선과는 분명히 어딘가 다른 함선이리라.
거북선이 기억 속의 거북선과 다른 것처럼,
수백 년 뒤의 미래 또한 기억과 다를 것이다.
“내 기억이 재현되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기억하는 거리와 비슷한 거리가 비슷한 위치에 생길지언정, 결코 똑같지는 않겠지. 내 기억은 말 그대로 나만의 기억이 되는 거야.”
페르디난트는 여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왕이 즐겁게 떠들어대던 이야기는 분명 존재하던 과거였으며, 동시에 결코 오지 않을 미래였다.
그러므로 여왕은 고향을 잃었다.
이곳은 여왕의 고향이었으되, 고향이 아니었다.
“···후회하십니까?”
조금은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그 날 이후 수십 년이 흐를 동안,
그저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질문.
“이곳에 돌아온 것을 말입니다.”
페르디난트에게만은 말해주었던 비밀.
그 날, 여왕은 고향으로 돌아갔었다.
어쩌면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말로, 여왕은 돌아온 걸 한 치의 후회도 하지 않을까.
페르디난트의 물음에, 여왕은 그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말이지, 페르디난트.”
아직은 논밭 뿐인 조선을,
볼품없는 강과 황량한 하늘을 바라보며,
여왕은 꿈꾸듯 눈을 감았다.
“나는 현재가 마음에 들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인 21세기.
동시에 오지 않을 미래가 된 21세기.
그리고 퀘퀘묵은 역사서에 적혀있는 16세기.
여왕이 살아가는 건 그런 과거도, 미래도 아니었다.
오직 현재.
지금 여왕이 살아가고 있는,
아들과 남편, 신하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제 그녀조차 미래를 쉽사리 예측할 수 없어져버린,
바로 이 순간의 세상이 좋았다.
“그러니까 후회하진 않아. 다만···.”
“다만?”
“과거와 끝을 맺을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야.”
고향 아닌 고향의 끝에서, 여왕은 망치를 매만졌다.
“페르디난트, 잠깐 자리를 비켜줄 수 있어?”
“혼자 계시려고요?”
“으음, 아니.”
익숙한 나뭇결을 매만지며,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는 아닐 거야.”
페르디난트는 잠깐 여왕을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잘 정리하고 오시지요.”
이제, 강가엔 한 명의 여인과,
그 그림자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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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무심하게.
그런 강을 들여다보며,
여왕은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나는, 아무래도 떠나보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아.”
처음 영국을 떠날 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영국을 떠나며, 여왕은 아들을 믿기로 했다.
지금껏 쌓아온 것을 믿었고, 앞으로 이어져나갈 것을 믿었다.
그렇게 여왕은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덜어냈다.
영국을 떠난 뒤에, 여왕은 통제되지 않는 미래를 맞이했다.
어쩌면, 더 이상 미래 지식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불안했지만, 분명 그랬지만, 그래도 새로운 미래가 반가웠다.
기억하던 역사보다 더 긍정적일 미래가 반가웠다.
이제 여왕은 미래의 변화를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변화할 미래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책임감을 덜어냈다.
조선에 도착한 뒤엔, 위기를 맞을지 모르는 조선을 도왔다.
조선은 이제 흐릿해진 뿌리였고, 고향 아닌 고향이었다.
외면할래야 외면할 수 없는 곳을 도우며,
그리고 한국이 아닌 조선의 모습을 돌아보며,
여왕은 실향을 체감했고, 그 미련마저 떠나보냈다.
“떠나보내지 않은 미련은 이제 오직 하나뿐이야. 나는 이곳에서, 그대와의 작별을 고하려고 해.”
주교는 알고 있었을까.
그 자신이 여왕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는 이 16세기 영국의 관념 같은 존재였다.
나름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보수적이었고,
끝내 여왕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동시에 친애히 여겼다.
그리고 그는, 이제 시대의 뒤편으로 사라질 존재였따.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미래를 안다는 메리트는 사라진다.
사람들은 여왕에게 익숙해져버렸다.
새 시대가 열리고, 새 사람들이 이끌 것이다.
그 안에서 여왕은,
어쩌면 더는 유별나게 특출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구태의연해져, 뒷물결에 밀려날지도 모른다.
주교가 스러진 것처럼, 여왕 또한 언젠가는 그리 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난 여왕일 것이야.”
그러니 나아갈 것이다.
기억 속에는 없는, 미래를 향해서.
그러려면 바쁘게 앞으로 향해야겠지.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젖어버리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그대와 이별하겠어.”
하지만 그게 과거를 잊어버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여왕은 주교를 기억할 것이고, 오지 않을 미래를, 과거를,
그 모든 것을 기억하며 걸어갈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여왕은 망치를 꺼내들었다.
반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던, 망치였다.
주교가 선물한, 여왕의 상징.
“이게 나의 이별이야.”
모든 미련을 담아,
여왕은 망치를 던졌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강을 향해서.
-풍덩!
거센 소리를 내며, 망치는 가라앉아간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여왕의 손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거운 망치는,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진 않는다.
망치는 천천히 가라앉아, 강의 밑바닥에 자리잡을 것이다.
닻이 되어, 닳아 없어질 그때까지 그곳에 있을리라.
“안녕.”
여왕은 그렇게, 과거와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왕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이별했군요.”
망치를 던지는 걸 본 페르디난트가, 여왕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망치가 없어져 허전한 팔을 채워주었다.
그라면 역사의 물결에 물러날 때까지 함께해주겠지.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는 말게.”
그래서 여왕은 기운을 찾았다.
페르디난트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이코 여왕의 일대기가 여기서 끝나진 않을 테니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서부터 익숙한 전령이 달려왔다.
방해하지 말라고 명했는데도 오는 걸 보니,
여간 급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상하이에서 급보입니다! 드레이크 경이 호주의 원주민 집단에 대패하고 도움을 요청했답니다! 그, 그런데 그 원주민 집단이라는 것이···, 날지 못하는 거대한 새라고 합니다!”
여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감상에 젖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군. 내 신하가 여왕의 도움을 필요로 하니, 친히 도우러 갈 수밖에.”
여왕은 기꺼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녀 앞으로 펼쳐진 미지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