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225)
225_[외전] 아름드리 위키 : 메리 1세
*본 문서는 ‘사이코 여왕’, ‘메리’ , ‘블러디 메리’, ‘글로리 메리’, ’망치 여왕’ 등의 검색어로도 리다이렉트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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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재위 기간
2.2.1. 청혼 거절 사건
2.2.2. 해양에 대한 관심
2.2.3. 결혼과 전쟁
2.3. 물러난 이후
-3. 가족 관계
3.1.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3.2. 해리 1세
3.3. 안나
-4. 여왕의 신하들
4.1. 토마스 와이어트
4.2. 스티븐 가디너
4.3. 존 호킨스 / 프랜시스 드레이크
4.4. 존 디
4.5. 프랜시스 월싱엄
-5. 업적
-6. 각종 음모론
6.1. 사이코 여왕
6.2. 비운의 천재
6.3. 늙지 않는 마녀
6.4. 교체설
-7. 창작물 속 여왕의 모습
7.1. 메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
7.2. 메리 여왕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8. 총평
1. 개요
메리 튜더 (Mary Tudor).
16세기 브리튼의 국왕으로, 1553년 재위에 올라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이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일해 브리튼 통일 왕조를 이루었다.
어려운 시대에 왕이 되었으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잉글랜드를 강대국화하였기에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이다.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은 지지 않는다는 신화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여왕의 치세 당시에는 미쳤다고 손가락질 당할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말이 많았으나, 현대에는 이견 없는 브리튼 최고의 성군이자, 시대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메리 여왕의 치세는 현대 브리튼의 모습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영국인들은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 여왕은 매 여론조사 때마다 브리튼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1위로 선정되곤 한다. [1]
1) 유일한 예외는 1953년의 여론 조사로, 이 때엔 007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존 디가 1위에 선정되었다(하극상). 1953년을 제외하면, 여왕은 한 번도 존경받은 위인 순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메리 여왕의 유년 시절은 꽤 불행했는데,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아버지와 사이카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메리를 사생아로 선포했고,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일하라는 굴욕적인 명령을 내렸다.
다만 메리는 그런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계모 앤 불린을 원망할지언정,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는 원망하지 않고 따스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이는 후일 정권을 잡은 메리 여왕이 이복 여동생을 박대하지 않고 대우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여왕의 대인배적인 면모. 죄없는 약자에게 동정적이던 성품은 어린시절부터 꾸준히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헨리 8세의 메리 여왕 박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린 메리를 재판대에 세우거나 수시로 감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잉글랜드 내 가톨릭 세력이 메리를 중심으로 뭉치는 걸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였다. 이 시기의 기억 탓에, 후일 메리 여왕은 종교 갈등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덕분에 영국이 당시 유럽을 불태우던 종교 전쟁을 피해갈 수 있었으니, 어찌보면 헨리 8세의 막장 행각이 영국에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셈.
어쨌건 여왕의 유년 시절은 이처럼 불행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반전된 것은, 헨리 8세가 죽고 메리의 이복 남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이후였다. 병약한 에드워드 6세는 친애하던 누이, 메리에게 왕위를 넘기고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2] 그러나 신교도인 노섬벌랜드 공작은 이에 불복하고, 제인 그레이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상황을 미리 알아차린 메리는 일찌감치 서퍼크로 피신했다가, 에드워드 6세가 승하한 이후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해 승기를 잡고, 영국 여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이후 여왕이 가장 먼저 행한 것은 죄없이 이용당하던 제인 그레이를 풀어준 것으로, 향후 여왕이 보여줄 파격적인 포용 정책의 시작점이었다.
2) 일각에선 에드워드 6세가 처음부터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후일 메리 1세를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기록이 변조되었다고 주장한다.
2.2. 재위 기간
2.2.1. 청혼 거절 사건
여왕의 외모에 대해 이런저런 가설과 논란이 존재하지만, 현대에는 대부분 여왕이 나이를 초월한 동안 미인이었을 거라고 가정하고 있다. 여왕이 즉위 직후, 에스파냐의 펠리페에게 청혼을 받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고 추정하곤 한다.
당대 에스파냐는 영국에 비해 몇 배는 강대한 국가였기에,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던 상황. 게다가 에스파냐에서는 펠리페가 직접 방문해 청혼을 하기도 했다.[3] 그러나 여왕은 펠리페의 청혼을 단칼에 걷어차 버렸다. 그것도 희대의 명대사를 남기고.
3) 이 때문에 본래는 즉위식 사절로 방문했던 펠리페가 여왕의 미모에 반해 충동적으로 구애한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곤 한다.
[백합은 순결을 상징하는 꽃, 이건 나를 모욕하는 건가?]이것이 여러 영드에서 등장하곤 하는 여왕의 청혼 거부 사건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자를 모욕한 사건으로, 사이코 여왕의 악명이 퍼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여왕이 이처럼 차갑게 청혼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많은 논란과 가설이 존재한다.
첫번째 가설은 그냥 펠리페가 마음에 안 들었을 경우로, 여왕이 말한 그대로 그의 언행과 선물을 불쾌하게 여겼거나 그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거절했다는 가설이다. 펠리페 역시 나름 당대의 미남이었으나, 기이할 정도의 동안으로 역사에 기록된 여왕에게 비견하기엔 영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왕이라면 몰라도, 파격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여왕이라면 이러한 이유로 펠리페를 걷어찼다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과연 사이코 여왕···.)
두번째 가설은, 여왕이 처음부터 에스파냐와의 충돌을 직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인데, 여왕의 신대륙 항해 준비는 즉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신대륙으로 나갈 경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중 하나와는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여왕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이용할 생각을 처음부터 하고 있었다면 충돌 상대는 당연히 에스파냐. 때문에 어차피 적대국이 될 에스파냐를 단호히 거절했다는 가설이다. 실제로 여왕은 이후 두 차례나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이기에, 꽤 가능성 높다고 받아들여지는 가설인데, 만약 이때부터 충돌을 내다보고 있었다면 여왕은 천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천재 맞잖아)
2.2.2. 해양에 대한 관심
여왕은 즉위 초기부터 해양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아버지인 헨리 8세가 신형함 ‘메리 로즈’호를 만든 것처럼, 여왕 또한 즉위 직후 함선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
4) 기껏 만든 함선의 이름이 1호선과 2호선···. 이런 여왕의 처참한 작명센스 덕에,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여왕의 정체는 사실 독일인이다.’라는 농담까지 존재할 정도다.
어쨌건, 여왕은 신형 함선을 만든 직후, 곧장 에스파냐 연안에 나타난 바르바리 해적을 토벌하도록 함선을 파견 보낸다. 순수한 선의를 내세워 에스파냐를 도운 것인데,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함선의 성능을 시험할 목적으로 지원군을 보냈으리라고 추정하곤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여왕은 바르바리 해적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곧장 신대륙으로 항해를 명령해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달하는 업적을 세우게 되었다.[5]
5) 이미 에스파냐가 도달한 지역이었지만, 영국이 상륙한 이후엔 프랑스까지 들어와 난장판이 된다. 현대 중앙 아메리카가 유럽의 지배를 받지 않고 USM(Unite state of Maya)으로 통합된 것은 어찌보면 이 항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2.2.3. 결혼과 전쟁
여왕의 결혼 상대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자, 페르디난트였다. 부부는 정략결혼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금슬이 좋은 잉꼬 부부였으며, 페르디난트는 여왕의 기행에 잘 맞춰주는 남편이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가족관계’ 문서를 참조할 것.
일각에선 여왕이 결혼 이후 성품이 누그러질 것을 기대했으나, 실제론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왕은 오히려 보조해주는 남편을 만나 더 호전적으로 전쟁에 임한 것처럼 보인다. 결혼 이후, 여왕은 네덜란드-에스파냐 독립 전쟁, 포토시 점령 전쟁, 1-2차 스코틀랜드 통일 전쟁 등 역사에 기록된 굵직굵직한 전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승리를 이루어낸다. 이 같은 승리는 지금의 영국을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자세한 행적에 관해서는 메리(업적) 문서를 참고할 것.
2.3. 물러난 이후
메리 여왕은 맏아들인 해리 왕자가 장성한 이후, 그에게 섭정을 맡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이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행보였으나, 그 당시 신하들의 반응과 여왕의 행적을 보면 턱없이 활동적인 시기에 물러난 것은 분명해보인다. 아마 자신의 사후, 아들의 통치를 걱정해 일찍 양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아들 사랑이 지극했다고 보면 될 듯 하다.
여왕은 아들에게 섭정을 맡긴 이후, 무려 배를 타고 동방으로 떠난다. 그 와중에 마카오를 완전히 확보하고, 조선과 우호를 든든히 했으며, 호주를 정벌하기까지 한다. 수 년의 세월이 흐르고 영국에 돌아온 뒤, 여왕은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재임 시기보다 더 자유롭게 파격적인 사건을 벌인다.
아일랜드 가장 행렬에 21세기에나 입을 법한 파격적인 옷을 입고 참가하거나 순행 재판 중 칼등으로 영주를 내리치는 등[6] 현대에도 유명한 여왕의 사이코 행적은 이 시기에 비롯된 것이 많았다. (아들 속을 엄청나게 썩였다.)
6)들고 다니던 망치가 없어져 칼등을 썼다는 설이 있다. 여왕은 재위 이후 언제나 망치를 가지고 다녔으나, 해리 왕자에게 섭정을 물려준 뒤에는 어째서인지 여왕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망치가 없어졌다.
3. 가족 관계
3.1.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여왕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자 지지자. 예술가들의 후원자이자 영국에서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인물이다. 페르디난트는 원활한 사교술로 여왕의 부족한 점을 덮어주었다. 무척이나 금슬이 좋은 부부로, 여왕과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오직 둘만 아는 비밀 이야기를 속삭였다고 한다.
후일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1세가 사망한 이후엔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어 보헤미아로 가야했으나, 늘 영국의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잊지 않았다고 한다. 후일 보헤미아 상황이 안정된 뒤에는 영국에서 살다시피 해, 오죽하면 보헤미아 귀족들이 ‘왕에게 부탁할 게 있으면 보헤미아 왕성이 아니라 런던으로 서류를 보내는 게 빠르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페르디난트는 여왕과 함께 장수하여 많은 중손자를 보았고, 후일 수많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여왕과 같은 날 눈을 감았다고 한다.
3.2. 해리 1세
메리 여왕의 후계자로, 메리 여왕 무척이나 닮은 아들이었다. 여왕이 영국을 높이 올려놓았다면, 해리 1세는 그 영국의 아래에 탄탄한 반석을 깔아 안정시켰다.
청년기 해리는 어머니와 같이 파격적이고 성급한 행보를 자주 보였으나, 시일이 지날수록 안정적이고 평온한 정치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철이 들었다고 평할 수도 있으나, “내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어머니를 따라잡을 수는 없으니, 차라리 얌전히 있는 게 낫겠다.”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여러모로 메리 1세의 가족관계는 다정하고 평탄했던 것처럼 보인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리 1세(영국) 문서를 참고할 것.
3.3. 안나
메리 여왕이 뒤늦게 얻은 늦둥이 딸로, 어머니를 닮은 미인으로 유명했다. 여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얻은 딸인데, 시기를 생각해보면 동방으로 여행을 떠난 지 얼마 안 가 임신한 것으로 보인다. 안나 공주는 호주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험한 항해를 견딜 수 없었기에 호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후일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호주의 자연 환경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런던의 궁정에선 예술을 즐기며 수많은 예술가들의 뮤즈가 되었으나[7], 성년이 된 뒤에는 해리 1세와의 의논 끝에 호주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 호주와 영국의 지리적 거리 때문에 해리 1세가 호주를 직접 다스리기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다정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호주 이민자들을 큰 갈등 없이 다스렸으며, 호주의 식생이 파괴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해 외래동물로 인한 자연 파괴를 막았다.
7)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대표작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는 안나 공주와 메리 여왕을 모델로 삼아 그려진 것으로, 르네상스적인 섬세한 미적 표현으로 이름이 높다.
4. 여왕의 신하들
4.1. 토마스 와이어트
토마스 와이어트는 여왕의 충신으로, 여왕의 즉위 초기부터 그 곁을 지켰다. 이후 윌리엄 남작 반역 사건이나 첩자 습격 사건 등, 여왕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여왕을 보호한 충신 중의 충신.
또 신대륙 항해에도 직접 참가하고, 여왕을 대신해 군 내부구조를 파악해 알리는 등 여러 위험하고 중요한 일에 가장 앞서서 움직인 여왕의 오른팔이다. 현대까지도 와이어트는 충성의 대명사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한, 와이어트는 16세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동정적인 도덕 관념의 소유자였다고 알려져있다. 그는 여왕의 관용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모리스코와 유대인,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을 차별하지 않고 자주 어울렸다. 여왕이 은퇴한 이후, 와이어트는 에든버러로 거처를 옮기고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완전한 통합을 위해 힘썼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그를 연모했다는 야사가 있으나, 진실은 확실치 않다.
4.2. 스티븐 가디너
그는 헨리 8세 시절부터 왕의 비서로 일했던 노회한 주교로, 종교적인 신념은 굳건했으나 왕실에 대한 존경과 친애 역시 그와 쌍벽을 이루는 수준이었다. 일각에선 메리 여왕에게 헨리 8세가 해주지 못한 아버지 역할을 주교가 해주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주교가 왕실 일가와 가족처럼 지낸 것은 분명하다. 그는 별다른 후계자 교육을 받지 못한 여왕이 제대로 된 왕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여왕을 헌신적으로 보조했으며, 후일 해리 왕자가 태어난 이후에도 그 교육을 도맡았다.
그러나 인자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꽤 호전적인 성품도 존재했던 걸로 보이는데, 사이코 여왕의 파격성은 주교의 작품이 아니겠냐는 설도 존재한다. 당장 여왕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망치 또한 주교가 선물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4.3. 존 호킨스 / 프랜시스 드레이크
이들은 해양에 관심을 기울이던 여왕을 위해 최선두에서 해양을 개척했던 인물로, 뛰어난 모험가이자 해상 지휘관으로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오늘 날 유명한 ‘호킨스 해협’이나 ‘드레이크 아일랜드’ 등은 이들의 이름을 따와 지어진 것이다.
호킨스는 여왕이 직접 발탁한 인재로, 젊었을 때는 혈기가 넘쳐 실수가 잦았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에스파냐 전쟁 당시 독단적으로 함선을 진격시킨 일. 그러나 여왕은 대범히 그를 용서했고, 이후 관록이 쌓인 뒤에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노장으로 거듭났다.
후일 호킨스가 나이가 들어 전선에 서기 힘들어지자, 여왕은 호킨스를 영국 국립 은행의 장으로 앉혀두었다. 파격적인 결정에 모두가 반발했으나, 뜻밖에도 호킨스는 이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돈 관리에 민감했고, 주변 사람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위협적인 기세의 소유자였다. 호킨스의 가문은 이후 대대적으로 은행업에 종사하여, 아직도 호킨스 가는 역사와 전통있는 금융가문으로 군림하고 있다. 젊은 날, 부와 명예를 꿈꾸던 호킨스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호킨스의 조카로, 그의 추천에 의해 발탁된 인재였다. 그러나 결코 낙하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실력자였는데, 그는 호킨스와 함께 성공적으로 아메리카 항해를 이끌었고 포토시 전쟁이나 1,2차 에스파냐 전쟁 같은 굵직한 전쟁에도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메리 여왕 시대에 이어 해리 대왕 시대에도 중요하게 기용되었으며,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으로 이름을 높였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드레이크는 한 번 패배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거대한 새에게(···.)[8]
8)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에뮤 대전쟁이다. 드레이크가 단독으로 토벌을 실패하여 여왕의 도움까지 요청한 사건. 이 사건은 결국 여왕이 에뮤 대장을 제압해 그 등에 오르며 끝을 맺었다.
4.4. 존 디
007 시리즈가 워낙 유명해 존 디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건 모르는 경우가 많다. 더 놀라운 건 영화 속 수식어들 중 대부분이 실제 존 디의 수식어였단 것이다. 무슨 만화 속 등장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식어가 많은 인물이다. 대표적인 것만 해도 노스트라다무스와 쌍벽을 이루던 영국 최고의 점성술사,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라고 불리던 연금술사, 날아다니는 딱정벌레를 만든 기계장치의 마법사, 여왕의 첩보원, 그리고 세계 최초의 과학자이자 천문학자까지.
존 디는 스파이로서도, 과학자로서도 여러 굵직한 업적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손 꼽히는 것은 지동설의 증명이다. 목성의 위성 메리를 발견한 뒤, 존 디는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를 직접 증명하여 과학 혁명의 시작을 열었다.
공의회 당시, 존 디의 이론은 부족함이 많았으나, 노년에 그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와 합작으로 발표한 논문은 보다 완벽했다. 그야말로 과학 혁명의 선구자이자, 천체 역학의 창시자라고 불릴법한 인물.
4.5. 프랜시스 월싱엄
존 디의 뒤를 이어 정보부를 맡은 인물이다.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성격이었다고 알려져있으며, 상대의 심리를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여왕에게 깊은 영감을 받아 독자적인 첩보 기술을 키우려고 노력했으며, 존 디의 자문을 구해 지문이나 발자국 등을 사용해 범인을 체포하는 과학 수사 기법을 창시해냈다. 다만 여왕에 대해서는 언제나 ‘나보다 뛰어난 분’이라며 겸손한 태도 보였다고 함.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해리 1세는 그만큼 존중하지는 않아,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한다. 덕분에 말년에는 고생께나 한 모양.
여담으로, 소개한 신하들 중 ‘존’과 ‘프랜시스’는 희한한 연이 있다. 여왕의 치세 중 해양에 대한 책임이 ‘존’ 호킨스에서 ‘프랜시스’ 드레이크로 넘어갔으며, 정보에 대한 책임이 ‘존’ 디에서 ‘프랜시스’ 월싱엄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창작물에서 ‘존’과 ‘프랜시스’라는 성을 쓰는 인물이 같이 나오면, 언제나 관련된 농담이 나오곤 한다. 둘은 당연하다는듯 친밀한 관계가 된다던가, ‘프랜시스’가 ‘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외, 노퍽 공작이나 랄프 호게, 챈슬러 등의 인물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서인 메리 여왕(인간관계)를 참고할 것.
5. 업적
여왕의 업적이 너무 많아, 문서를 분리했다.
자세한 건 메리 여왕(업적)을 참고할 것.
6. 각종 음모론
6.1. 사이코 여왕
여왕의 별명인 ‘사이코’는 현대에 생긴 별명이 아니다. 메리 여왕은 당대에도 파격적인 행보로 미치광이란 소리를 듣곤 했는데, 펠리페의 혼인 거절 사건, 스스로 암살자를 맞상대한 사건, 어딜 가나 망치를 들고 다닌 버릇 등, 굵직한 것만 해도 셀 수 없는 파격 행보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여왕의 혈연 중, 관을 끌고 다니던 미치광이 후아나가 존재했기에 여왕의 정신 건강은 더욱 더 의심 받았다.
(이후의 문단은 브리튼 왕실의 요청으로 삭제되었습니다.)
6.2. 비운의 천재
앞선 문단에서 설명했듯, 여왕은 사이코란 별명이 어울릴법한 행적을 보였으나, 사실 뜯어보면 그 행보엔 하나하나 논리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혼인 거절 사건은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합리적이었고, 암살자를 맞상대한 것 역시 스코틀랜드인을 영국에 동화시키기 위한 최선의 한 수였다고 볼 수있다. 때문에, 여왕이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냐는 이야기 역시 심심찮게 나오는 형편이다. 여왕이 주변인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기에 사이코 여왕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여왕은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예측을 했으니, 주변인이 여왕을 이해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많은 천재들과 같이, 여왕 또한 시대에 이해 받지 못한 고독한 존재였던 것이다. 다만, 다른 수많은 천재들과 달리 여왕은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이는 주변에 여왕을 이해해줄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6.3. 늙지 않는 마녀
음모론의 단골 소재가 되곤 하는 이야기다. 메리 여왕의 옛날 초상화와 즉위 이후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같은 사람이 많나 싶을 정도로 다르다. 게다가 과거 초상화가 훨씬 더 늙고 추하게 생겼다. 이에, 한 때는 추했던 여왕이 무언가 알 수 없는 주술로 회춘했다는 이야기인데, 블러디 메리라는 으스스한 별명에 더해져 더 섬뜩한 괴담으로 변했다.
다만 현대 역사 학계에서는 이러한 음모론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애당초 21세기에도 젊음의 비약이 없는데 16세기에 존재할 리가 없다.) 초상화의 차이에 대해서는 헨리 8세의 개입설이 유력한 가설로 받아들여지곤 하는데, 헨리 8세는 메리 여왕을 견제했으며 누구와도 약혼을 시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여왕의 미색을 감추고 추악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왕이 헨리 8세에 의해 20대 대부분을 인적 드문 시골에서 보내야 했던 점, 여왕을 향해 오는 모든 약혼 요청을 헨리가 거부했던 점, 여왕이 정식으로 즉위식을 행한 직후 에스파냐의 펠리페가 여왕에게 청혼한 점으로 미루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4. 교체설
초상화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음모론 중 하나로, 아예 메리 여왕이 중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는 파격적인 이야기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초상화와, 한때 갈색이었던 눈과 머리의 색이 검은색으로 변한 것을 증거로 내세우곤 하는데, 이들이 여왕 대신 교체된 인물로 유력하게 내세우는 것은 바로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이다.
기록 상 앤 블린은 동양적인 흑발 흑안의 미인이었고, 캐서린은 금발의 전형적인 공주였다. 그런데 앤 블린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금발, 캐서린의 딸인 메리 여왕은 흑발이 이상하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 논지에 따르면, 사실 대항해 시대를 열고 영국을 발전시킨 위대한 여왕은 엘리자베스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메리 여왕은 그녀의 자매일 뿐이라는 것인데 이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7. 창작물 속 여왕의 모습
7.1. 메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
-007 시리즈
-에뮤 대전쟁 시리즈
-블러디 메리(드라마)
-로베르의 대모험
7.2. 메리 여왕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본 항목은 브리튼 왕실의 요청으로 삭제되었습니다. 또한 본 항목에 언급된 작품 중 메리 여왕을 지나치게 왜곡되게 표현한 작품에 대해선 왕실에서 고소를 진행 중입니다.]8. 총평
사이코 여왕은 시대의 풍운아였고, 그녀의 여정은 아직도 현대인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왕을 주인공으로 한 창작물 또한 셀 수 없이 쏟아지고 있다. 그녀의 성격에 대해선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여왕은 파격적이고, 때로는 사이코라 불릴만큼 잔인했으나, 또 때로는 관용적이었다. 여왕은 유색인종을 차별하지 않았고, 약자와 빈민을 보듬었으며, 종교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다툼을 금지했다. 여왕은 본인 자신과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 시 했던 것 같으나, 그녀의 행보는 결과적으로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왕의 적극적인 신대륙 항해는 결과적으로 세계 각 지역에서 활발한 교류가 일어나도록 만들었고, 이는 문명 간의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상호 경쟁하며 발전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현대사가 마냥 아름답지는 않았다만, 만약 서양에서 증기기관과 현대 총기 공장이 보편화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교류가 활성화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어쩌면 세계가 서양의 노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앞 문단은 백인우월주의자나 대체역사 소설 작가나 상상할법한 음모론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 어쩌면, 여왕은 브리튼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보다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켰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여왕은 분명 사이코 여왕이었으나, 그녀는 위대한 사이코였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영국인들은 아직도 술집에서 글로리 메리를 들이키며 외치는 것이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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