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196)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200화(196/675)
제 200화
‘여긴…….’
대답하기 전, 세운은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 새까만 공간에 화산의 아래에서 보았던 용암 호수처럼 용암이 꿀렁이고 있었다.
아니, 주변이 완벽한 어둠으로 둘러싸인 것은 아니었다. 부서진 유리처럼 곳곳에 희미한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운을 부른 존재.
용암 호수 위에 비현실적으로 고고하게 자리 잡은 설룡(雪龍), 스노우 드래곤이 있었다.
‘드래곤 하트의 주인인가.’
설산의 설룡에게 드래곤 하트를 받았을 때, 이것의 정체는 이미 들었었다. 아우터의 잠식을 피해 발악하다 끝내 죽음을 맞이한 선대 설룡.
눈앞의 설룡은 드래곤 하트에 남은 설룡의 잔재가 분명했다.
– 감히 나의 안식을 방해하고, 이곳을 불결한 용암 따위로 채워 넣다니.
과연, 드래곤.
그저 잔재 따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서는 엄청난 위압감이 피어올랐다.
드래곤 피어를 부르짖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공포감이었다.
평범한 생명체라면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고 설룡 앞에 머리를 조아렸으리라.
만약 그가 고함이라도 내지른다면, 곧바로 심장이 터져나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세운은 아니었다.
– 성흔이 용의 공포를 집어삼킵니다.
– 성흔이 압도적인 존재의 공포를 집어삼키며 힘이 강화됩니다.
– 공포를 포식하며 혈랑의 이명이 강화됩니다.
오른손등 위에서 검붉게 빛나는 늑대 모양의 성흔.
압도적인 공포는 오히려 세운의 힘을 상승시켜 줄 뿐이었다.
최근 어지간한 공포 따위는 집어삼킬 생각도 없어 보였던 성흔이었지만, 용의 공포라는 달콤한 먹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성흔 안에서 공포가 신성으로 변하여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 그런 짓을 저지르고. 감히 나의 힘을 탐하다니.
설룡이 자리 잡은 용암 호수가 거세게 꿈틀거렸다.
속성을 치환했다고는 하지만, 설룡이 용암을 다루는 모습은 꽤나 기묘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욕심을 부린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겠지.
콰륵!
호수의 용암이 거세게 솟아올랐다.
그 규모나 섬세함, 힘의 크기 등. 모든 것이 화산에서 마주쳤던 리빙 라바의 공격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해 보았다.
사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후좌우는 물론 바닥과 머리 위에서도 용암이 덮쳐오고 있었다.
해일이라는 비유조차 아까웠다. 이 공간 자체가 용암으로 이루어진 바다로 차 오르는 듯했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내공도 마찬가지였다. 몸 안에서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도 주변의 용암은 급격하게 차올라 세운의 코앞까지 당도한 상태.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전신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말리라.
그 직후, 가볍게 숨을 내쉰 세운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마나는커녕 내공의 기운조차 보이지 않는 그저 단순한 손동작.
그것만으로.
꾸륵-
용암이 움직임을 멈췄다.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세운의 손동작에 맞춰 서서히 수위를 줄여간다.
‘어차피 이곳은 심상세계(心象世界).’
마나와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이곳의 자신은 그저 심상 속에 존재하는…… 영혼 그 자체와 가까운 상태였으니까.
육체에 심어진 서클과 단전이 관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의 심상과 드래곤 하트에 잠든 설룡의 심상이 겹쳐서 만들어진 곳이겠지.’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이곳은 설룡의 심상세계이기도 하지만, 세운의 심상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세운도 이 세계에 충분히 간섭할 수 있다.
그저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암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
– 심상을 다룰 줄 아는 놈이었구나. 그렇다고 해도, 용의 의지를 이길 수는 없을 터.
꿀럭!
멀어지던 용암이 다시금 그 힘을 더해 왔다.
그 원인은 설룡이 방금 말한 말 그대로였다.
비록 세운의 정신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용이다.
물론, 드래곤 하트에 남은 잔재에게 실제 용의 의지가 완벽하게 드러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의 의지는 강력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때가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용암을 밀어내는 중에도, 세운의 정신은 저 멀리 어둠으로 이루어진 벽에 팔려 있었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균열. 아마, 드래곤 하트에 난 균열이 심상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용암이 주변을 채워나갈수록 균열이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세운이 버틴다고 해도 드래곤 하트가 깨져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세운이 더 이상의 밀당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힘을 드러냈다.
– 성흔이 혈랑전설의 설화에 반응합니다.
화아앗!
성흔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나와 내공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성흔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 그 자체에 새겨 있었다.
신성 역시 단순한 육체적 힘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힘이었다.
– 어째서 인간이 신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심상세계에서 성좌의 힘은 빌려 올 수 없을 텐데……!
처음으로 설룡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서는 마몬이나 베엘제붑, 레비아탄 등 그 어떤 성좌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성좌의 권능 역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운의 성흔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판의 격을 집어삼키고 빼앗은 것이지만, 이미 판의 흔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세운 그 자체의 힘.
그랬기에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이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꾸르륵!
세운을 둘러싸던 용암이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신성이 깃든 이상 세운의 정신력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벗어났고, 설룡의 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진짜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잔재의 의지 따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게다가, 처음 설룡의 공포를 흡수한 덕에 지금 세운의 신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여유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용암이 모조리 물러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중앙에는 당황한 모습의 설룡이 곧 분노를 드러내며 세운에게 외쳤다.
– 그 힘으로 나의 딸을 죽인 것이더냐! 외적(外敵)의 힘에 저항해 영겁의 시간 동안 고통받고 있던 나의 딸을!
‘그런 거였나.’
처음에는 적개심의 정체가 드래곤 하트의 속성을 치환하여 안식을 방해한 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말을 들어보니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룡은 지금, 세운이 자신의 딸을 죽이고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훔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한 세운이 성흔의 빛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딸은 무사합니다.”
– ……뭐라?
“아우터. 당신이 말하는 그 ‘외적’은 제가 소멸시켰습니다.”
–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나조차도 실패한 일을, 목숨을 걸고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전 가능합니다.”
잠시 둘의 눈빛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를 설득하기 부족했다.
치이이익!
신성이 뜨겁게 타올랐다.
심상세계의 제한을 뛰어넘어, 현실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본래의 규칙을 어기는 행위인 만큼 신성이 순식간에 바닥까지 깎여나갔다.
설룡의 적대감은 여전했지만, 일단 지켜보겠다는 것인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현실의 틈새에서 벗어난 세운의 오른손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액세서리가 들려 있었다.
– 그건……!
“이거라면, 충분히 증거가 되겠죠.”
그 정체는 바로 설산의 설룡에게서 얻어낸 역린이었다.
드래곤을 죽여 강제로 얻어낸 새까맣게 물든 역린이 아니라, 드래곤이 자신이 인정한 자에게 주는. 아니, 은인에게 주는 증표.
세운은 이것을 가져오기 위해 신성의 대부분을 투자한 것이다.
분노한 설룡을 말로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이것이라면, 그 어떤 설명보다도 완벽한 증거로써 설룡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 과연…… 나의 딸이 침식으로부터 벗어났단 말인가.
설룡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백의 비늘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 그것은 죽어서도 나의 한이었다. 죽음으로써도 저주를 끝내지 못하고, 끝내 딸에게 물려주고 만 나의 한이었다…….
적대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새까만 천장에서 불처럼 붉은 눈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붉은 눈이라니. 말도 안 되는 형상이었지만, 아무래도 설룡의 힘이 불 속성으로 치환되며 일어난 현상인 듯했다.
– 정말…… 고맙구나. 덕분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리고 자네에게는 나의 한을 풀어준 보상을 해야겠지.
설룡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 보자마자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어대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세운은 내색하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에 깃든 잔재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설명한다고 먹힐 상대가 아니었지만, 심상세계에 입장하고도 아무런 해명을 하지 못한 세운이었기에 뒤끝을 내밀 생각은 없었다.
– 자네의 목적은…… 나의 힘을, 드래곤 하트의 힘을 흡수하려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 자네가 원하는 건 물의 속성이 아니기에. 아니, 이미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새로운 힘으로 나의 힘을 치환한 것이구나.
“맞습니다.”
이곳은 심상세계. 설룡은 세운의 육체를 관찰할 수 없음에도 그 생각과 목표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은 채 붉은 눈이 내리는 허공에 고개를 올리고 있던 설룡이 이내 고개를 내려 세운을 바라보았다.
– 알겠다. 비록 본래의 힘에 비할 바 안 되는 미약한 힘이지만, 이 모두를 자네에게 양도하겠다.
스르륵-
호수의 용암이 서서히 꿈틀거렸다.
세운을 공격해 올 때와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눈처럼 잘게 부서져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붉은 눈과 함께 세운을 둘러쌌다.
뜨거운 불의 기운과 차가운 얼음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드래곤 하트에 잠들어 있던 힘이 세운의 영혼을 통해 심상세계를 빠져나가 세운의 육체에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또한…….
눈과 용암만이 아니었다.
설룡의 몸이 스르르 녹아내리더니 마찬가지로 세운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용의 잔재가 흡수되며, 압도적인 충만감이 느껴졌다. 마력이 채워지는 수준이 아니라 영혼의 격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푼다면, 영혼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운은 알고 있었다. 이게 설룡의 선물이라는 것을.
곧, 어둠과 용암만이 존재하던 심상세계가 잘게 부서져 내리며 심상세계 그 자체가 세운에게 흡수되었다.
본래 절반 정도는 세운의 심상세계였지만, 나머지 절반은 설룡의 것이었던 심상세계.
이 말은 곧, 용의 의지를 흡수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 나 스스로가 자네의 ‘깨달음’이 되어주겠다.
영혼을 가득 채워나가는 음과 양의 기운.
그 압도적인 충만감과 함께, 세운의 의지가 현실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