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272)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276화(272/675)
제276화
“항구 도시 제헤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험가 여러분들!”
함선에서 내리자마자 비쩍 마른 남자 하나가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거주민인 모양.
고개를 들어 올려 굽신거리고 있지만, 세운은 그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40층의 시련은 다른 시련들에 비해 특히나 길고 긴 터라, 시련이 끝난 후, 제헤튼에 도착해 제정신을 유지하는 플레이어는 별로 없었다.
전부 얼른 흔들리지 않는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뿐.
앞에서 뭐라 하든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본능을 따라갈 뿐이다.
그런 플레이어들의 심성을 이용해 바가지를 씌워 돈을 벌이는 게 바로 저런 부류다.
“제가 제헤튼 최고의 여관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식사부터 샤워, 푹신한 침대까지! 자자, 짐은 다 이쪽으로 주십시오!”
“네? 아니, 짐은 저희가…….”
“에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바다를 건너느라 힘드셨을 텐데 가벼운 몸으로 이동하셔야죠! 일꾼은 많으니 양이 많아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일단은 무턱대고 짐을 챙긴다.
그러고는 바로 자기들이 미리 계약해 둔 여관에 데려가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운다.
그다음은?
바가지가 듬뿍 쓰인 영수증을 내민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말도 안 된다며 항의를 하지만, 노련한 거주민을 상대로 항의가 통할 리 없다.
경비원을 부른다고 협박을 몇 번 해 주면, 플레이어들은 꼬리를 내리게 마련이다. 다섯 번째 쉼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운은 회귀 전에도 그런 바가지에 당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 저런 게 통할 리가 없지만.
“고맙군.”
“하하, 뭐 고마울 것까지야! 저희 제헤튼에 찾아오신 분들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세운은 그 검은 속내를 알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어서 짐 맡기고 이동합시다.”
“세운 씨, 괜찮을까요? 보통 이렇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 중에서 사기꾼이 많다던데.”
“나만 믿어.”
“형님, 제가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저거 백빵 사기꾼…….”
“닥치고 따라와.”
“넵.”
보통 플레이어들은 이곳에 도착할 때 피곤함에 절어 제대로 된 생각을 못 하고 따라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디아블로 길드는 달랐다.
다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며 도착한 덕분에 다들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세운은 상인에게 모든 짐을 맡겼다.
함선이 큰 만큼 제법 많은 짐이 있었는데, 열 명 가까이 되는 짐꾼이 달라붙은 덕분에 한 번에 나를 수 있었다.
“하하, 선장님께서 안목이 훌륭하시군요! 사기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가왔던 상인이 한층 더 밝아진 표정으로 입을 나불거렸다.
그럴 수밖에. 동료들이 말리는데도 꿋꿋하게 바가지를 쓰러 들어오는 꼴이라니, 이런 호구가 또 없어 보이겠지.
“지금 가시는 여관은 ‘푸른 바다’ 항구라고 합니다! 무려 4층짜리 고급 여관으로, 삼 층부터는 바다가 보이는 멋진 전경이 나오죠!”
“그러면 거기로 해야겠군.”
“역시 탁월하십니다! 그럼 3층에 한 자리로…….”
“아니, 여기 인원 전부다.”
“오오! 통이 아주 크시군요! 좋습니다! 제가 바로 연락해서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두겠습니다!”
상인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펄쩍 뛰면서 하수인을 불렀다.
귓속말을 들은 하수인이 눈을 번쩍 뜨며 앞으로 달려갔다.
대충 호구 큰 놈 잡았으니 여관의 3, 4층을 전부 비워 두라는 뜻이겠지.
“형님, 이거 진짜 아닌데. 제가 진짜 경험자라니까요? 해 보기도 하고, 당해 보기도 했는데 이거 진짜 사기예요. 덤터기 쓴다니까요?”
박정필이 옆에 와서 소곤거렸다.
다만, 굳이 다가와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짐꾼을 대동하고 이동하는 중에도 길에 있던 수많은 플레이어가 이쪽을 비웃으며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냥 가.”
“아, 형님 고집 진짜…….”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
세운을 믿는 건 유서아밖에 없었다.
그녀는 세운이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이번 행동 역시 무슨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저곳 보이십니까? 저게 저희 제헤튼의 명물인 백경 석상입니다. 무척이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한 시간에 한 번 저곳에서 분수 쇼를 하는데 그게 또 얼마나 화려한지…….”
상인은 자기가 마치 관광 안내인이라도 된 듯이 묻지도 않았는데 신나게 주변을 설명했다.
언변이 어찌나 화려한지, 불안해하던 길드원들도 정신을 놓고 그의 안내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분수를 지나치고 아름다운 해변을 걷던 중,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우와.”
“진짜 멋진데?”
“말만 고급 여관이지 똑같을 줄 알았는데, 진짜 멋지잖아?”
푸른 바다 여관.
다른 건물에 비해 몇 배는 될 법한 4층 크기에 방마다 깨끗한 테라스가 튀어나와 있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장식과 문양이 보이는 게 여관보다는 호텔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였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3층과 4층을 통째로 빌려놓았으니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짐도 저희가 날라드릴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막상 호화스러운 여관 내부를 보았기 때문일까? 디아블로 길드원 모두 넋 나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3층으로 향했다.
아무리 충분한 휴식을 즐겼다고 해도 역시 해상과 지상은 차이가 있었으니까.
세운도 올라가려던 중, 상인에 조심스럽게 세운의 팔을 붙잡았다.
“하하, 어떠십니까? 여관은 마음에 드십니까?”
“제법.”
“그거참 다행입니다! 짐을 풀고 나면 바로 아래로 내려와서 식사하시면 됩니다. 이곳의 음식이 또 제헤튼의 명물이니 분명 입에 맞으실 겁니다!”
“고맙군.”
“아, 그리고 잠깐.”
더는 귀찮다는 듯이 돌아서려 하자, 상인이 다급하게 세운을 불러 세웠다.
그의 손에는 글자가 가득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군.’
계약서.
철저하게 대륙어로 적혀 있어 플레이어가 읽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계약서였다.
시스템이 거주민과의 언어 한계를 극복해 주는 건 어디까지나 대화에 한해서였으니까.
“이건?”
“하하, 별거 아닙니다. 여관에 들어왔으니 체크인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 여기 아래에 지장 하나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손을 내밀어 내용을 교묘하게 가리고 서명란만 드러내는 노련함.
여기에 서명하는 순간, 합법적으로 저 상인의 바가지에 걸리게 되는 꼴이다.
이미 탑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언어를 공부한 세운이었기에 계약서에 적힌 불합리한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됐나?”
“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으니 얼른 올라가서 푹 쉬시지요!”
세운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 * *
“이야, 제대로 한 마리 물어오셨네요. 삼층과 사층이 이렇게 가득 찬 건 거의 반년만입니다.”
“내 사정 봐서 적당히 해 처먹으랬더니 자기가 알아서 위에 올라가더군.”
디아블로 길드가 모두 올라간 후, 상인은 여관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술잔을 마주 대며 잡담을 나누었다.
“하하, 너무한 거 아니십니까? 저러다 내일이면 바로 파산하겠습니다.”
“너무는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외부인들한테 인생의 교훈을 알려주는 거지. 돈 주고도 못 배울. 아니, 거금을 내야 배우는 교훈 말이야.”
“뭐, 저희야 어찌 됐든 좋지만 말입니다.”
“수수료, 알지?”
“아유, 당연하죠. 3, 4층을 만석으로 채운 만큼 두둑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짠-
둘이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당장 내일 청구할 금액만 생각해도, 한 달간 쌔빠지게 일해야 벌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기분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었다.
“근데 계약서는 받아두셨습니까? 요즘 외부인에 대한 사기가 도시의 평판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며 단속이 심해졌다고…….”
“어허, 사기라니! 말했잖나. 난 외부인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거라고. 앞으로 제헤튼에서 살아가려면 이 정도 교훈은 있어야지. 그리고.”
촤락.
상인이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혹시나 상대가 읽을 경우를 대비한 것인지 3번 조항까지는 나름대로 정상적이지만 4번 조항부터 말도 안 되는 조항들이 엿보였다.
10명밖에 사용되지 않은 짐꾼 인력이 30명이라 적혀 있거나, 여관에서의 한 달 치 요금을 즉시 납부한다는 등.
아마, 이를 갚으려면 전 재산을 터는 것은 물론 재산의 몇 배씩이나 되는 빛을 지녀야만 할 것이다.
“이야, 역시 철두철미하십니다. 이거라면 신고당해도 상관없죠.”
“흐흐, 나만 믿으라니까 그러네. 앞으로 이만한 호구 몇십 명은 더 물어올 테니까.”
“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여기, 서비스!”
둘은 앞으로 다가올 부유한 미래를 상상하며 다시 한번 술잔을 기울였다.
그 때문일까? 둘은 알아채지 못했다.
스륵.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진 상인의 그림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말이다.
* * *
다음 날.
“으어! 이제 좀 살 것 같네!”
“침대 푹신한 거 봤어? 피로가 싹 풀린다니까, 진짜.”
“아무리 편해도 역시 배보단 육지지!”
“진짜? 난 오히려 너무 조용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어색하던데…….”
휴식을 마친 디아블로 길드원들이 저마다 소감을 늘어놓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수성찬이 식당 가득 차려 있었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이건 바다 여관에서 자랑하는 VIP 아침 코스 요리입니다.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윽, 해산물 싫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달막 초원에서 공수해 온 최상급 말고기를 이용해 만든 스테이크와 스튜도 곧 나옵니다!”
“우와아아! 고기! 고기! 고기!”
푹신한 침대에 맛있는 요리들.
식사가 끝날 때쯤엔 다들 바다에서의 피로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다.
세운 역시 오랜만에 해 먹는 제대로 된 식사를 음미했다.
배 위에서도 김미정이 미리 준비해 둔 식자재로 다양한 요리를 해 주었지만, 아무래도 배에서 할 수 있는 요리는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식사가 끝나갈 때쯤, 상인이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자, 다들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네!”
“그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요금 정산 시간이군요!”
“……네?”
상인이 본색을 드러냈다.
다들 이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듯, 상인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상인은 그 표정을 보고 쾌감이라도 느낀 듯이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왜 모른 척하고 계십니까? 짐꾼 고용비와 관광 안내비, 여관비, 식사비 등. 결제할 게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형님, 거봐요! 제가 사기라고 했잖아요!”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며 상인은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그 앞으로 세운이 다가섰다.
“가격을 미리 고지한 적은 없다고 기억하는데?”
“네? 무슨 소리십니까.”
“제헤튼에서 신입 모험가에게 가격을 고지하지 않고 돈을 뜯어내는 건 엄연히 사기. 불법이라고 알고 있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그럼 내가 네 말만 듣고 여관에서 처박혀 있었을 줄 알았나?”
사실, 맞다. 세운은 저 상인에게 모든 짐을 맡기고 한없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으니까. 귀찮게 밖으로 나가 저런 사실을 알아내거나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이 사실을 모르는 길드원들은 ‘피곤할 텐데 그런 것까지 알아보고 계셨다니!’라며 감탄할 뿐이다.
하지만, 상인은 곧 한쪽 입꼬리를 길게 당겼다. 마치, 오히려 이 상황이 더욱 재밌다는 듯이.
“맞습니다. 하지만, 선장님께서는 이미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셨습니까?”
“계약서?”
“하하하,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계약서에 지장을 찍은 이상, 이건 엄연히 ‘거래’이니 말입니다!”
“혀, 형님. 진짭니까? 지장 찍었어요?”
“설마. 우리 길드장이 그렇게 섣부르게 지장을 찍었을 리가…….”
세운의 대답이 없자 길드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단둘. 세운과 유서아만 빼고 말이다.
“무슨 계약서 말이지?”
“발뺌하셔 봤자 늦었습니다. 이미 지장까지 찍은 걸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난 정말로 기억 안 나는데. 한 번 보여주겠어?”
“하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선장이 이 꼴이니 선원들마저 고생하게 되었군요. 자, 이걸 보십시오!”
촤륵!
상인이 기다란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 저는 사기꾼입니다. ]라는 글자가 대륙어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