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290)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294화(290/675)
제294화
결국, 세운은 일 포인트의 할인도 없이 500만 포인트를 모두 받아냈다.
리엘이 투덜거리며 째려보긴 했지만, 결정은 되돌리지 않았다.
다섯 번째 쉼터까지 공적치를 모아왔으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위그드라실의 가지라…….’
–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슬쩍 다른 지팡이와 바꿔치기하는 게 어떻겠냐며 가지를 탐냅니다.
마몬의 제안에 세운이 고개를 저었다.
악의를 떠나서, 엘프 정령사인 그녀에게 위그드라실의 가지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 성좌, ‘다섯 번째 날’이 호기심을 가지며 당신의 작업을 지켜봅니다.
리엘에게는 주신급 성좌인 프레이야가 붙어 있다. 마몬이라 하여도 그녀의 시선까지 차단할 수는 없으니, 허튼짓은 할 수 없다.
털그럭.
세운이 작업대 위로 준비된 재료들을 올려두었다.
위그드라실의 가지와 최상급 사대 정령의 소재들.
제헤튼에서 시도해 본 그 어떤 인챈트보다도 어려울 거라 예상되는 작업이었다.
“구경해도 돼요?”
작업 준비를 마치자 리엘이 다가와 세운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아직 허락도 안 했는데 말이다.
“말했듯이, 오래 걸릴 텐데.”
“괜찮아요. 제 무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직접 보고 싶거든요.”
그녀의 주위에 네 정령이 떠오른다.
딱 보아도 튜토리얼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은데, 세운을 보고 조잘거리는 게 정령의 성격이 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거절은 거절하겠어요. 저, 오백만 포인트나 냈다구요?”
“그러든지.”
앞에서 지켜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세운은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준비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정령 마법 인챈트.
정령 마법은 일반 마법과 체계 자체가 다르다.
당연하게도, 정령과 계약을 맺지 않은 세운이 정령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주문 제작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근원의 바람 ]– 일시적으로 정령계의 바람을 불러와 정령의 힘을 크게 상승시키는 정령술사의 상위 정령 마법.
당연하게도 탐욕의 보물창고에는 정령계 마법 역시 존재했다.
일반적인 마법에 비해 그 수가 극히 적긴 했지만, 마몬의 보물창고답게 상위 정령 마법이 있었다.
권능을 사용하자마자 머릿속을 파고드는 정령의 지식.
어차피 정령이 없는 세운으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지식이었지만…….
‘어쩌면.’
이 작업을 끝내고 나서 새로운 정령과 계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에 얹어진 소재들을 보자마자 생각했던 계획이다.
“시작한다.”
스스슷-
위그드라실의 가지 위에 노에아넨의 발자취가 새겨진다.
상위 정령 마법에 최상급 정령의 힘이 깃든 소재답게 인챈트 과정은 이전에 광휘석을 만들었을 때보다 열 배는 더 세심하고 까다로웠다.
세운이 집중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배려하는 것일까?
리엘은 세운이 작업하는 동안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스터, 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거라도 드시고 하시지요.”
“아, 고마워.”
해리가 테이블 위에 샌드위치를 올려두었다.
바깥을 보니 벌써 해가 다 져가고 있었다.
이제야 인챈트의 네 과정 중 하나인 노에아넨의 발자취를 새긴 게 전분데, 벌써 하루가 다 지나간다.
“오래 걸린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네요.”
“그럼 내가 바가지라도 씌운 줄 알았나?”
“……조금? 화가 덜 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세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 작업을 준비했다.
섬세하게 그려진 발자취 위로 셀레아나의 잿가루를 세심하게 뿌려준다.
잿가루가 단 한 곳에도 뭉치거나 퍼지지 않도록 균등하게.
말이 쉽지, 숨만 쉬어도 사방으로 흩날리는 잿가루를 균등하게 배치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마스터, 설마 밤을 새우신 겁니까?”
“벌써 아침인가…….”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것도 안 느껴졌다.
플레이어가 되고, 능력치가 늘어나면 어느 정도의 피로는 상쇄할 수 있다지만 그렇다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앞을 보니 리엘도 소파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진행 속도를 보아하니 이대로 완성까지 직행하는 건 무리.
잿가루 작업을 마저 한 세운이 쪽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금 작업을 시작하였다.
“다음은 엘레스트라의 눈물인가요?”
“맞아.”
잿가루가 놀랍도록 균등하게 분포된 발자취 위로 눈물을 흘려보냈다. 잿가루가 퍼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스포이트를 사용하는 것조차 위험하기에 마법을 사용하여 극히 미량의 물방울을 만들어 잿가루를 적신다.
아니, 물방울이라기보다는 안개를 만들어 적신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겠다.
“좀 먹고 하세요.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숨을 돌릴 겸 고개를 드니 테이블 옆으로 샌드위치와 식은 커피가 보인다.
가게의 상황도 바쁠 텐데 이렇게 일일이 챙겨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마침 배가 출출하던 참이어서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와, 이거 정말 맛있네요. 제헤튼에서 먹어본 샌드위치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
“우리 길드원이 만든 거거든.”
“길드에 전담 요리사까지 있는 거예요? 대단하네요.”
디아블로 길드의 요리사이자 부에르의 계약자, 김미정.
맛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미약한 버프 효과까지 깃들어 있어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샌드위치를 마저 먹은 세운이 기운을 내서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걸린 시간은 총 삼 일. 늦어지면 사 일이 넘어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니, 예정보다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화아앗-
“……끝났다.”
“와아!”
마지막 실레스틴의 깃털이 녹아내리며 가지 주변에 은은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게 바로 세운이 인챈트한 상위 정령 마법, ‘근원의 바람’.
단순한 피부의 시원함이 아닌, 영혼을 감싸는 듯한 부드러운 시원함에 잠들어 있던 리엘의 정령들이 깨어났다.
“시원해!”
“좋은 냄새 나.”
“뭐야?”
“기분 좋아!”
정령들의 반응만 보아도 인챈트의 결과는 이미 증명되었다.
단순히 신나 하는 것 말고도 정령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 대 원소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내가 먼저 확인해 볼게.”
“이미 완성된 거 아니었어요?”
“확인 차원으로.”
그녀의 말대로 인챈트는 끝났다. 정령들의 반응까지 보았으니 딱히 확인해 볼 사항도 없었다.
하지만, 세운이 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어차피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니까.’
세운이 위그드라실의 가지를 잡았다.
인챈트된 근원의 바람이 세운의 몸을 감싸며 정령에 연관된 힘을 증폭시켜 주었다.
– ‘위그드라실의 가지’로 인해 정령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 ‘근원의 바람’을 통해 정령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
과연, 상위 정령 마법 ‘근원의 바람’.
단순히 한 가지 속성의 정령 친화도만 증가시켜 주는 게 아니라, 모든 속성의 정령 친화도를 증가시킨다.
인간이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정령계와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이다.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지.’
물론, 알고만 있을 뿐이다.
회귀 전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정령석을 구해서 계약을 시도했음에도 실패했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다르다. 근원의 바람을 쥐고 있는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하급 정령이라도, 계약만 해 두면 쓸모가 있으니까.’
땅의 정령과 계약해 두면 세운이 눈치채지 못한 적의 공격을 막아줄 수도 있고, 바람의 정령은 움직임을 보조해 줄 수 있다.
다른 두 정령 역시 마찬가지.
급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정령이든 계약만 하면 전투가 한결 편해질 것이다.
“그건…… 계약진?”
리엘은 세운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곧장 알아챘다.
계약진에 근원의 바람이 깃들며 주변에 정령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회귀 전과는 전혀 다르다.
정령계와 연결된 계약진에서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놀랍게도…….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계약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세운 스스로가 정령의 힘을 느낄 정도인데 단 하나의 정령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세운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정령 친화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위그드라실의 가지와 근원의 바람조차 구멍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그때, 옆에서 뛰어놀던 리엘의 네 정령이 계약진에 쪼르르 달려와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무도 안 나올걸?”
“안 나올걸?”
“맞아.”
“나도 조금 떨려.”
아무도 안 나오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녀석들.
그보다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정령 친화력의 문제는 아닌 모양인데…….
“무섭다니?”
“오른손, 무서워!”
“안 친했으면 우리도 숨었을 거야.”
“위험한 느낌이야!”
“왕이 아니시면 아무도 못 나올걸?”
정령들의 말에 세운이 오른손들 들어 올렸다.
손등에 선명하게 그려진 늑대 문양의 성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근원의 바람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인지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무섭다는 게 공포의 권능을 말하는 걸까? 아니, 아우터는 물론 신까지 삼켜 버리는 파멸의 권능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연유는 잘 모르겠지만, 결론은…….
“안타깝네요. 당신이라면 정령사로서도 강할 것 같았는데.”
세운은 정령과 계약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때, 계약진 위에서 살랑거리던 바람의 정령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내 친구 소개해 줄까?”
“친구?”
“응! 어두운 아이인데, 겁이 없어서 올 수도 있어! 아니, 겁이 많은가?”
어둡고 겁이 많은 아이?
세운의 머릿속에 정령 도감에서 보았던 정보들이 떠올랐다.
정령계에서 가장 많고 강력한 정령들은 지금 리엘이 다루고 있는 사대 원소의 정령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번개나 숲, 빛과 얼음처럼 사대 속성에서 파생된 하위 속성의 정령들이 존재하고, 잠과 그림자 등의 현상에 관련된 정령도 존재한다.
그 외에도 생물의 감정에서 파생된 정령 역시 존재한다.
물론, 그 수가 극히 적어 계약하는 방법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부탁해도 될까?”
“응!”
세운의 물음에 바람의 정령이 힘차게 대답하더니 계약진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계약진의 빛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의 정령인가?’
아니면, 밤의 정령?
다양한 종류의 정령을 떠올리던 중, 바람의 정령이 계약진을 빠져나왔다.
“문 옮겨놨어!”
“고마워.”
“근데, 대답을 안 해.”
“대답을 안 하다니?”
“나도 몰라! 원래 음침한 애였어.”
혹시나 싶어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실패인가?
정령과는 인연이 아닌가 싶어 계약진을 닫으려는데…….
우웅-
세운의 성흔이 검붉은 빛을 마구 흘려댔다.
그 빛은 안개처럼 일렁거리며 계약진의 안쪽까지 흘러 들어갔다. 계약진에 붙어 있던 네 정령이 깜짝 놀라며 리엘의 곁으로 도망갔다.
– ……누구야?
세운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의 정령이 말한 대로 어딘가 음침한 목소리.
– 누군데…… 나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목소리의 주인이 계약진을 통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흘러내리는 듯한 불길한 날개와 전신을 두르고 있는 보랏빛 로브가 치마처럼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리엘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건, 튜리크…….”
정령계에서도 극히 드물다는 감정계 정령. 그중에서도 원초적인 힘을 지녀 베일에 싸인 공포의 정령.
튜리크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