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367)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371화(367/675)
제 371화
51층의 시련.
그 크기가 얼마나 넓은지, 한 명의 플레이어가 전 지역을 둘러보는 것은 걸어서 세계 일주를 하는 것과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난이도를 자랑한다고 한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나침반을 들고 이동해도 방향이 어긋나게 되는 기이한 곳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플레이어가 다음 시련에 도전하기 위해 이곳에서 힘을 쌓고는 하였다.
“막아, 막아! 젠장, 뭐 이리 많아!”
“뚫립니다! 커버 부탁드려요!”
“커버는 무슨, 커버할 사람 없어!”
“젠장, 그래도 저 이 이상은 못 버팁니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든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 똘똘 뭉쳐서 웨이브를 막아내고.
서걱-
“후…… 끝인가.”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이제 슬슬 60층에 도전해 봐야지. 언제까지고 라일락에 머물 수는 없잖아.”
“라일락도 괜찮지 않아요? 전 이제 고향 같이 느껴지는데.”
“안 돼. 올라가야지. 아홉 번째 쉼터까지는 꼭 올라가고 싶어.”
“아홉 번째 쉼터라, 목표가 높으시네요.”
“너도 소문 들었잖아? 아홉 번째 쉼터가 어떤 곳인지.”
“소문처럼 아름다운 곳이라면 저도 꼭 가 보고 싶기는 해요.”
“꼭 같이 올라가자고.”
“후후, 좋아요.”
51층의 시련 따위 워밍업이라는 듯, 모든 웨이브를 정리하고 몸을 털고 있는 이들까지.
이곳에는 실로 다양한 플레이어가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디아블로 길드는 그 누구보다 독보적으로 시련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강한철이나 유서아, 백현 등 전투 능력이 우수한 이들은 벌써 다섯 곳 이상의 근원지를 토벌했을 정도.
다른 디아블로 길드원들도 혼자서 웨이브 포인트 하나를 지킬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었다.
전투계원이 아닌 쌍둥이 자매나 고창석, 이하늘 등까지 말이다.
덕분에 유서아도 지휘를 손에서 놓고 자유롭게 근원지를 공략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제가 먼저 도착했어요.”
“내가 먼저 도착했다.”
“첫 몬스터 제가 먼저 쓰러트렸잖아요?”
“애초에 지진을 일으켜 놈들의 발을 붙잡은 게 나다.”
–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당장 자신이 자리 잡은 영역에서 꺼지라며 독니를 내비칩니다.
–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이곳은 이미 자신이 흔들어 둔 영역이니 네놈이나 꺼지라며 발을 굴러 땅을 쿵쿵 울립니다.
–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어딜 서열 2위 따위가 까부냐며 다리를 들어 올립니다.
–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이참에 다시 한번 서열정리를 해야겠다며 악어를 일으킵니다.
우연히 만난 유서아와 강한철이 근원지 앞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라일락의 지하 투기장 때부터 생겨난 라이벌 의식이 드러난 모양.
심지어 둘의 성좌 역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관계였기에 대립은 더욱 팽팽했다.
눈치 없는 몬스터 몇 마리가 ‘그어어-’하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지만.
–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독니’를 사용합니다.
– 플레이어 강한철이 ‘진군(進軍)’을 사용합니다.
푹!
콰앙!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하게 날린 쌍검과 주먹에 볼품없이 쓰러졌다.
실제로 이 둘이 근원지를 공략하러 돌아다니며 의도치 않게 구해 준 플레이어의 수가 수십이 넘을 지경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유서아가 한발 물러섰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이대로 양보만 하다 보면 세운과 나란히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모라프 축제에서 깨달았다.
비록 같은 길드라 하여도 가만히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 죽은 자들의 제단을 통해 ‘썩지 않는 자’가 강림하였습니다.
시야의 저 끝.
머나먼 지평선에서 거대한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 일부분만 보일 만큼 멀었는데도 나타난 인영의 크기는 지는 태양을 가릴 정도로 거대했다.
–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경악합니다.
–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경악합니다.
이렇게나 멀리 있는데도 거대한 인영에게서 내뿜어지는 위압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나 강해졌다고 자부하던 유서아나 강한철도 이를 악물며 서 있는 게 고작.
그나마 강한철은 뚝, 뚜둑 하는 관절이 부서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했다.
이변이 생긴 것은 둘만이 아니었다.
“그어어어-”
“키이이이익-”
근원지에 존재하던 모든 몬스터가 거대한 인영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아니, 머리를 숙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근원지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
녀석들은 마치 왕을 영접하는 시민들처럼 눈을 내리깐 채로 어깨를 덜덜 떨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강한철과 유서아 주변에 한한 일이 아니었다.
51층에 존재하는 모든 플레이어와 모든 몬스터가 그 존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건…….”
저 거대한 인영이 일반적인 51층의 시련 목표와 상관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51층의 시련에서 하필 이 시간에 이런 일을 벌일 자가 누구일 지도, 둘은 알고 있었다.
“세운 씨…….”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냐!”
거인에 의해 태양이 가려진 51층에 짙은 어둠이 몰려들었다.
* * *
“좀 괜찮습니까?”
“후우…… 네, 마스터 덕분에…… 안정된 것 같습니다.”
튜리크의 날개 덕분에 최수창이 호흡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도 튜리크의 힘은 어디까지나 ‘공포’를 막아주는 것뿐이라 거인의 거대한 위압감을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 성좌, ‘반짝이는 비늘’이 계약자의 주위로 해류를 두릅니다.
– 성좌, ‘반짝이는 비늘’이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가면 해류가 흩어질 것이라며 계약자를 주의시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최수창의 성좌인 포르네우스가 얕은 해류 벽을 일으켰다.
조금 위태로워 보이긴 해도 마왕의 신성이 깃든 만큼 거인의 위압감으로부터 최수창을 지켜주고 있었다.
–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잔영이 손에 쥔 날카로운 무기를 떨어트리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며 거인에게 절을 올렸다.
아직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눠보지 않았지만, 세운은 알 수 있었다. 이 거인이 이번 시련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근원지의 주인이 존재하듯이, 이 거인이 바로 51층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존재가 겨우 51층에 잠들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역시, 정체를 모르겠어.’
당연하게도 신급 존재 앞에서는 여정의 지침표도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회귀 전의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보아도 거인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왜 말이 없지?”
시간이 지나도 거인에게서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렇게 거대한 몸을 지니고 있으면 조금만 움직여도 땅이 흔들렸을 텐데, 거인이 나타나고 지금까지 작은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처럼 심장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언데드의 기괴한 신음으로 가득 차 있던 51층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때, 세운의 머릿속에 잔영이 소개한 거인의 설명이 떠올랐다.
‘이곳은 죽은 자들만이 손을 모을 수 있는 곳이다.’
죽은 자들이 모시는 신. 그리고 시스템이 띄워준 거인의 이명, ‘썩지 않는 자’.
그것으로 유추해 보자면.
“……시체인가?”
눈앞의 거인이 이미 죽었다는 해답이 나왔다.
마신들이 놀랄 정도의 격을 가진 거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유력한 답이었다.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추론이었지만, 다행히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잔영의 입에서 해답이 흘러나왔다.
– 그렇다……. 아주 오래전. 셀 수 없이 오래전. 위대하신 분을 안치해 주는 조건으로, 이곳에 위대하신 분이 묻히게 되었다.
세운의 추론은 정답이었다.
죽어서도 이렇게나 엄청난 격을 가진 거인이 생전에는 얼마나 대단할까 생각했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썩지 않는 자. 이명대로 죽어서도 신성이 흩어지지 않은 건가.’
지금 느껴지는 건 거인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힘 그대로.
생전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여파로 인해 생전의 힘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죽어 있는 것이다.
– 위대하신 분은 죽어서도 빛을 잃을 뿐, 심해로 떨어지지 않으셨다. 그렇게, 영원히 우리 죽은 자들이 섬길 수 있는 분이 되셨다.
‘그러면 히스 래빗의 말도 다시 설명이 되지.’
그녀는 성좌가 죽어서 아우터가 된다고 말하였다.
그 말대로라면 눈앞의 거인은 죽고 사라져 아우터가 되었어야 정상이다만, 이명에 걸맞은 권능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거인만은 죽어서도 아우터가 되지 않은 모양.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세운이 조심스럽게 제단 끝으로 다가가 거인의 피부 위로 손을 올렸다.
손에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단단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피부였다.
– …….
무엄하다며 소리라도 칠 줄 알았던 잔영은 의외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세운이 가만히 거인의 힘을 느끼다 고개를 돌려 잔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이다음은?”
– 없다. 그저 위대한 분께 손을 모을 뿐.
생각보다 허무한 반응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조건이 까다로운 히든 피스인 만큼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51층의 비밀을 알아냈다고는 하지만, 딱히 쓸 곳이 있는 비밀도 아니다.
심지어.
철컥.
세운이 검의 손잡이를 쥐어도 잔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 그대는 비록 산자지만, 원한다면 뭐든 해도 좋다.
“뭐든?”
– 우리 죽은 자들은 위대한 분을 통해 살아간다. 그리고, 일어난다. 그리고, 쓰러진다.
잔영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워낙 흐릿한 모습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그게 위대한 분의 마지막 뜻이었지.
“마지막 뜻이라…….”
– 부디 자신의 몸을 세상을 위해 써달라고. 썩지 않는 몸이라 대지에 스며들지도 못하고, 썩지 않는 몸이라 생명의 순환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부디 흐름에 맞게 실어달라 하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
비록 생전의 힘은 알 수 없지만, 그 사상만은 선신(善神)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자 같았다.
만약 탑에 존재하는 선신들이 모두가 이 거인이 가진 사상의 절반만이라도 따라간다면 회귀 전의 미래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다만.
“제물은 방금 말한 사상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동족의 생명을 바쳐라.
악마나 할 만한 제안이었지만, 답은 바로 나왔다.
– 제물은 필요 없다.
“뭐?”
– 단지 그대의 심성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을 뿐. 솔직히,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때마침 그런 악인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럼 제물이 없어도 네가 알아서 소환할 수 있다는 거야?”
– 그렇다. 물론, 도움이 되긴 하다. 그 악인의 생으로 힘을 조금이나마 보충할 수 있었으니. 내가 위대하신 분을 부른 건 단지 그대의 심성에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히든 피스는 세운의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새삼 세운을 습격해 준 청해 길드원에게 고마움이 느껴질 지경.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따로 있다.
“흐름이라…….”
흐름에 맞게 실어달라는 거인의 유언.
죽은 성좌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자신의 힘을 얼마든지 써도 된다는 뜻이라는 건 알 것 같다.
비록 이미 죽은 시체에게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루인.”
– 크르르…….
“삼켜라.”
– 크와앙!
세운에게는 신의 격을 집어삼킬 수 있는 굶주린 늑대가 함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