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446)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446화(446/675)
제 446화
“가장 먼저, 저는 폐왕이라 불리는 자를 정령계의 주적으로 지정할 생각입니다.”
“동의한다.”
“동의하지.”
“나도 동의.”
네 정령왕 모두 아우터가 주적이라는 건 금방 인정하였다.
그 외에도 정령계의 규율에 위반되지 않도록 의견을 내세웠는데, 의견 대부분이 즉각 수용되었다.
그만큼 정령왕 모두가 이 사안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모든 일이 착착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운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탑에는 어떻게 관여할 생각입니까?”
정령계와 탑은 기본적으로 완전히 나누어져 있다.
회귀 전을 포함하더라도 탑에 정령왕이 현신하는 건 본 적이 없으며, 이번에 역시 그들이 끝내 현신하지 못하고 세운과 리엘을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는가?
그마저도 정령왕의 힘이 아니라 리엘이 심은 세계수의 힘으로 말이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우리도 그것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걱정할 필요 없지.”
“세계수가 심기지 않았는가?”
“세계수가 심기면 정령들이 직접적으로 탑에 관여할 수 있는 겁니까?”
“적어도 세계수의 주변은 관여할 수 있다네. 아직은 세계수의 힘이 미약하여 현신하지 못했지만, 시간문제일 뿐이지.”
“그렇다고 해도 세계수 주변만 관여할 수 있다면 아우터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계수를 노리고 세계수 근처에 매복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아우터는 모두 죽였다.
늦든 빠르든 그 소식은 결국 폐왕의 귀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폐왕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세계수를 공격하러 올까?
만약 세운이라면 굳이 세계수를 공격하기보다는 세계수를 무시하고 탑을 공격하여 세계수가 심겨 있는 65층 자체를 무너트리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령왕들이 아무리 세계수를 지키려 애쓰려 해도 소용이 없어진다.
“그 문제라면…….”
세운이 말을 끝내자, 고개를 끄덕인 정령왕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정령왕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 있는 것은, 처음 듣는 정보와 상황 속에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엘프 일족의 마지막 후예. 리엘 리프레인이었다.
“여기, 숲의 아이가 있지 않은가?”
“저, 저요?”
“그래, 숲의 아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강요할 생각은 없단다. 우리는 너와 계약을 나누고 싶단다.”
정령왕들의 원탁에 앉은 후, 세운이 대화의 주체가 되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의자에 멀뚱히 앉아 있던 리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긴, 리엘 정도의 자질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엘프라는 종족적 특성도 있지만, 그녀는 그중에서도 특히 정령과의 친화도가 놀랍도록 뛰어난 플레이어였다.
적어도 세운이 회귀 전후를 통틀어 보았던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정령이 누군가의 힘을 빌려 탑에 관섭하려면 그 누군가는 리엘이 가장 적합했다.
‘리엘이 적극적으로 협조할지가 문제인데…….’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세운과 정령왕들의 사정일 뿐. 애초에 자신의 일족을 부흥시키려는 리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탑이 위험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장 세계수는 너무 어리다.
일족을 재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도움을 바라는 건 무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정령왕들은 그녀에게 부탁이 아닌 계약을 내걸었다.
“숲의 아이여. 그대의 목표는 일족을 되살리는 것이 아닌가?”
“네, 맞아요. 죽은 분들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세계수의 힘이라면 같은 의지를 가진 일족이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수가 만기 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야 하지.”
“그러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줄 아나?”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 생이 닿는 한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에요.”
이제야 새싹을 피워낸 세계수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라.
세운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세계수가 그렇게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은 영원화가 모아둔 힘을 이용하여 금방 새싹을 피웠다지만, 앞으로는 그 속도가 더욱 느려질 거다.
아마, 적어도 백 년은 걸리지 않을까.
“자연적으로 세계수가 꽃을 피우려면 대략 천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네.”
“거기에 열매를 맺기까지는 추가로 몇백 년이 소요될지 모르지.”
……라는 건 세운의 착각이었다.
천 년 이상의 시간이라니.
당장 회귀 전의 기준으로 아우터가 침략하기까지의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이상, 천 년 이상의 시간을 기다리기는 불가능하다.
만약 세운이 아우터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이 자리에서 덜 자란 세계수를 바라보며 탑의 멸망을 맞이할 것이다.
“처, 천 년이요?”
“엘프의 수명이 천 년까지도 간다지만, 그대라고 하더라도 그 시간을 버티는 것은 무리겠지.”
“네, 기껏해야 팔구백 년…….”
잠깐, 팔백 년이라니. 그 말은 리엘의 나이가 100살은 넘어간다는 말이 아닌가?
세운이 잠시 뜨끔했지만, 엘프와 인간의 수명을 비교해 보고 리엘의 외관을 가늠해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쯤 되니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리엘이 사뭇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우리가 이를 돕겠네.”
“네?”
“우리도 인위적으로 세계수의 성장을 도울 적은 없지만,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하네.”
“정령계의 기운을 지속해서 공급할 생각이야.”
“그러면 정령계에도 무리가 가는 게 아닌가요?”
“무리는 무슨. 그 갑갑한 규율 때문에 정령계는 쇄국(鎖國)이나 다름없었어. 잉여 기운이 넘쳐서 정령도 포화 상태라구. 그마저도 더 이상은 감당할 땅도 없고.”
“미네르바, 규율은 규율이다.”
“네네, 알고 있지. 어쨌든, 기운은 충분해. 이참에 탑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더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동감이다.”
“그치? 요즘 어린 정령들은 정령계에만 있어서 세상이 어떤 줄 모른다니까.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
잠시 얘기가 다른 길로 빠졌지만, 이는 리엘에게도 충분히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미네르바와 샐리온의 대화가 진척되지 않자, 리엘의 옆에 있던 엘퀴네스가 대신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세계수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저희가 직접 나서서 육성을 도울 수도 있을 거예요.”
“정령왕님들이 직접이요?”
“그럼요. 그대도 네 아이의 힘을 이용해 세계수의 성장을 도왔잖아요?”
“네, 하지만 정령왕님들이 직접 도와주시다니…….”
“저희에게도 필요한 일이니까요. 만약 그렇게 하면, 늦어도 백 년. 빠르면…… 십 년이 지나지 않아 꽃을 피울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나 빨리요?”
“지금 정령계의 기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거든요. 일단은 영원의 화원에 저희 아이들을 보내 관리부터 시작할 생각이고요.”
빠르면 십 년이라.
솔직히, 세운의 기준으로 만족스러운 시간은 아니었다. 십 년이라면 회귀 전을 기준으로 이미 아우터가 탑을 침략했을 테니까.
물론, 여기서 시간이 더 단축될 여지 역시 존재했다.
엘퀴네스의 말에 따르면 리엘의 정령 친화도에 따라서도 세계수의 성장이 더욱 단축될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저희가 내걸 수 있는 제안이에요.”
“으음…….”
너무나도 좋은 제안.
자신의 목표를 바로 눈앞으로 당겨올 수 있는 제안을 리엘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물어볼 게 하나 더 남았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되는 거죠?”
이건 일방적인 배려나 선의가 아닌 계약이다.
사대 정령왕을 포함하여 정령계 자체가 리엘의 목표를 지원하는 만큼, 리엘 역시 그들에게 합당한 보답을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엘퀴네스가 말한 조건은 이미 방금까지의 대화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내용이었다.
“저희와 계약을 맺어 인간의 아이를 도와주길 바라요.”
“아…….”
“그대와 계약을 맺으면, 저희도 세계수 주변이 아닌 당신의 옆에서 폐왕이라 불리는 이와 대적할 수 있어요.”
“물론, 지금으로는 한참 부족하지. 당장 계약을 맺어도 우리 중 하나도 못 불러낼걸?”
“그래도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아주 옛날이지만, 만월의 정령사라 불리던 나의 계약자 이상이다.”
“확실히, 그렇군.”
“트로웰, 네가 대답할 일은 아니지 않아? 네가 만난 계약자라 해 봤자…….”
“크흠! 어쨌든, 잠재력만은 충분하다.”
“그래, 그래. 그건 나도 인정. 세계수의 옆에서 힘을 키우면 우리 모두를 불러낼 만큼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령왕들 역시 리엘의 잠재력을 높게 사주었다.
아우터에게 침식당하지 않는 존재, 정령.
그것도 네 정령왕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상황이니만큼 세운에게 역시 이번 계약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리고 리엘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요.”
“다행이군요.”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세계수의 성장을 몇백 년이나 앞당길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우터의 침략은 탑을 멸망시킬 수 있는 위협 요소다.
그녀가 65층에서 세계수를 지키고 있는다면, 세운이 아우터의 싹을 완전히 짓밟지 않는 이상 결국 아우터와 부딪힐 수밖에 없으니까.
“다행히도 제시간에 대화를 끝낼 수 있었군.”
“바로 계약을 시작하도록 하지.”
반투명하던 주변의 수정 벽이 점차 옅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궁금했던 차원의 틈새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쉽게도 그 모습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뭐라 표현할 수 없고, 짐작할 수도 없으며,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 정령왕의 이름으로 숲의 아이와 계약을 시작한다.”
“나.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불의 정령왕, 샐리온.”
“땅의 정령왕, 트로웰.”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
네 정령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원탁에 표시된 그들의 구역이 더욱 활발하게 일렁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개 정령과의 계약이 아닌, 정령계 그 자체와 계약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령계의 오랜 규율에 따라, 정령계의 주적과 마주하기 위해.”
“숲의 아이를 위해 정령의 오랜 친우인 엘프를 돕기 위해.”
“정령계와 현계의 통로이자 모든 자연의 축복인 세계수를 위해.”
“정령의 이름으로 어지러운 현세를 자연으로 감싸 안기 위해.”
네 정령왕의 손에서 각자의 원소가 피어나 리엘을 향해 날아간다.
리엘은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이 자신의 품으로 다가온 네 원소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원탁의 힘을 빌려 이 자리에서 엘프의 마지막 후예, 리엘 리프레인과 계약한다.”
곧이어 리엘의 몸에서 익숙한 사색의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사방의 수정 벽이 완전히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지며, 시야가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인간의 아이야.”
엘퀴네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세운의 몸이 공간의 틈새에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