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480)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480화(480/675)
제 480화
덜컥.
방에서 나가고, 가장 먼저 무슨 논문을 써야 할지 고민할 시간도 없이 다급한 목소리가 세운을 붙잡았다.
“오오, 나왔구먼! 들었네! 현자를 목표로 한다고!”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허허, 그야 간단하지! 방음 마법 따위, 실라페의 도움을 받으면 가뿐하다네!”
실라페. 바람의 중급 정령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저 노인이 다루는 주 정령이 바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역시 저래 보여도 실력만은 뛰어난 정령사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반응을 보아하니 세운이 말했던 내용 모두를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검은 뿌리 같은.
실라페의 힘을 이용했다고 하여도 극히 일부의 단어를 드문드문 들은 게 전부였나보다.
“그렇다면 내 방으로 오지 않겠나!”
“방이라면, 연구실 말입니까?”
“그렇다네! 현자를 목표로 한다면, 논문을 써야겠지. 엘 아브르에 존재하는 정령 연구 시설 중에서는 내 방이 당연 최고라 자부하네!”
제법 끌리는 제안이었다.
현자의 직위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엘 아브르의 회원에게 전용 연구실 같은 건 주어지지 않으니까.
거주지로 돌아가 연구와 논문을 써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인의 연구실이라면 연구에 완전히 최적화된 곳이었다.
‘저래 보여도 정령에 한해서는 일인자에 가까우니까.’
저 노인도 대현자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그에 근접한 현자다.
단지 대현자라는 직위에 관심이 전혀 없고 논문을 쓰기보다는 연구와 탐구 그 자체를 좋아하는 인물이었기에 현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괜찮겠어.’
아마, 저 노인은 세운을 자신의 조수로 만들어 공포의 정령을 실컷 조사해 볼 생각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세운은 그의 조사가 될 생각은 없다.
그의 연구실에 들어간 후, 현자가 되어 전용 연구실이 주어질 때까지만 알차게 이용해 먹으면 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세운이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웃음을 내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잘 결정했네! 얼른 이쪽으로 오게나!”
노인이 세운의 손을 잡은 채로 앞장섰다.
* * *
“얼른 들어오게! 자네도 정령사라면 우리 연구실의 차이를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거라네!”
“정령력…….”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만! 연구실에 정령력을 가득 채우고, 정령력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최대한 막아두었다네. 특정 행동만 하지 않으면 24시간 정령 소환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지!”
세운은 정령력이 그리 높지 않다. 마나나 내공과는 다르게, 정령력은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재능이었으니까.
회귀 전에는 정령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며, 튜리크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리엘의 도움 덕분이었다.
심지어 처음 마주쳤던 튜리크는 세운보다 루인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계약을 진행하였으니, 세운이 정령과 얼마나 연이 없었는지를 증명해 주는 일이었다.
그런 세운이 느낄 정도의 정령력이라니.
아마, 리엘이 이곳에 들어왔다면 눈을 동그랗게 떴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노인을 포함한 사람들이 리엘의 힘에 먼저 놀라겠지만 말이다.
“르르바돈 교수님! 도대체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한창 실험이 진행 중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시면…… 어? 그쪽은?”
“허허, 인사하게. 이쪽은 우리 새 가족이라네!”
노인의 이름이 르르바돈이었나?
세운이 회귀 전에는 다들 ‘노인’, ‘영감’, ‘영감탱이’ 등으로 불렸기에 정확한 이름은 처음 들었다.
그나마 저 위에 말한 것들은 최대한 순화된 것들이고, 대부분 욕이 섞인 명칭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령만 관계되면 사리 분별없이 달려들고, 정령이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일에도 심드렁하던 노인이었으니까.
다만.
“세운입니다.”
“아, 아아…….”
조수로 보이는 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환영이라기보다는 대체 왜 이곳에 왔느냐는 듯한 안쓰러운 표정.
오른손은 악수를 위해 앞으로 마중을 나오지만, 왼손으로는 필사적으로 세운을 말리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가족이라는 소개 덕분에 세운을 새로운 조수로 인식하고 있나 본데…….
‘뭐, 상관없나.’
연구실에서의 대우가 어찌 됐든 상관없는 세운이었기에 당차게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세운은 어디까지나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연구실을 이용하고 논문만 쓰면 그만이었다.
“여기는 단이라네. 중급 정령과 계약을 나눠 아주 쓸 만한 소재…… 아니, 능력 있는 조수라네.”
“단입니다…….”
“그리고 저기. 센! 센!”
“…….”
“크흠, 자고 있나 보구먼. 가장 신입인데 자네와 똑같이 정신계 정령을 다룬다네. 내가 힘들게 영입한 조수지.”
“힘들게 라기보단, 교수님이 반강제로…….”
“단, 실험은 잘 끝났나?”
“어떻게든 끝내긴 했습니다…….”
엘 아브르에 존재하는 최고 정령사의 연구실치고는 조수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엘 아브르라 하여도 탑에 존재하는 정령사의 수 자체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대우도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으니.’
단과 센이라는 조수의 눈 아래로 축 늘어진 다크 서클과 거칠어진 피부만 보아도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조수진의 소개를 마친 노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럼 다음은.”
“네, 제가 연구실 소개를 해 두겠습…….”
“바로 공포의 정령을 꺼내주게!”
“네?”
“우리 가족이 될 사람의 정령을 미리 확인해 두어야 하지 않겠나! 연구실이야 차차 알게 되겠지! 아, 저쪽에서 소환해 보세!”
“교수님, 저긴 실험실…….”
“얼른 들어가세! 허허!”
르르바돈이 본색을 드러냈다. 애초에 그가 세운을 초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정식적인 계약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으로 튜리크를 보여주는 대신 연구실을 허락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세운은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실험실에 들어가자 밖에서 느껴졌던 정령력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튜리크.”
– 응! 우와, 여기 너무 좋아! 정령계랑 비슷한 느낌이야!
“오오, 공포의 정령이시여!”
– 아, 이 할아버지! 진짜 싫어!
“자아도 성숙하고, 대화도 능숙하구먼! 아주 놀라워!”
튜리크는 소환되자마자 실험실의 정령력을 정령계에 비교해 주었다.
정령계와 비슷할 정도라니. 역시, 저렇게 보여도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 노인이다.
처음 노인을 마중 나왔던 조수는 튜리크가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는지 입까지 크게 벌리며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본격적으로 관찰하려던 중, 닫아두었던 실험실의 문이 덜컹 열리고, 의자에서 졸고 있던 센이라는 조수가 들어왔다.
반쯤 자는 듯한 모습으로.
마치 누군가에게 끌려온 듯한 느낌이었는데, ‘누군가’의 정체는 금방 드러났다.
– 튜리크 님.
– 어? 메를로!
센의 옆에서 앞머리로 눈가를 가리고 있는 작은 정령이 나와 튜리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같은 정령계 정령이랬지.’
최근, 튜리크는 성장과 함께 정령계의 중심에서 자신의 영역을 키우고 있었다.
그렇게 튜리크의 영역에 들어온 정령들은 자연스럽게 튜리크를 따르게 되었다.
아무래도 저 메를로라는 정령 역시 튜리크의 구역에 들어온 정령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 메를로, 최근에 많이 안 보이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 네.
“오, 오오! 비애의 정령이 먼저 찾아와 고개를 숙일 정도라니! 정신계 정령에게도 계급이 존재하는 것인가! 센, 센! 얼른 깨어보게!”
“…….”
“센!”
짝!
“어음, 어? 교수님?”
“뭔가 느껴지는 것 없나? 정령을 통해서 느껴지는 감정 같은 거 말일세! 복종심이라거나, 존경심이라거나! 얼른 집중해 보게!”
“네, 네…….”
뺨까지 맞아가며 잠에서 깬 센은 금방 노인의 말에 따라 정령에게 집중한다.
그나저나, 뺨까지 맞고도 저렇게 별다른 반응이 없다니.
옆에 있던 다른 조수의 반응만 보아도 이게 특별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새삼 이곳의 조수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긴, 엘 아브르에서 조수들의 대우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현자들마다 다르지만, 현자들 대부분은 성격이 별난 편이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일정 영역에 도달할 만큼 성장한 플레이어는 그만큼 각자의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며 지식을 배워야 했으니…… 엘 아브르에서 현자의 조수 생활이란 극한 직업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일단 현자가 되기만 하면 대우가 달라지지.’
단순히 대우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엘 아브르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식을 탐구하다 보면 힘을 다루는 방법도 늘어나고, 힘을 키우는 방법도 습득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힘이 강해지게 되고, 특히나 대도서관의 지식을 이용하면 이후의 시련 또한 쉽게 통과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곳의 회원들은 조수 생활을 견뎌내며 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어어, 감정이 너무 다양해요. 원초적인 감정은 굴복…… 복종? 아니다. 공포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역시 공포의 정령이구먼! 하긴, 공포의 성질이라면 강압적이긴 해도 하위 정령들을 다루기 적합한 힘이지!”
“하지만 그 이후는 달라요. 공포에서 비롯되었지만, 존경심이나 충성심 같은 감정들이 위를 덮고 있어요.”
“오오, 신기하구먼! 그건 후천적으로 덧씌워진 감정인가? 아, 혹시! 자네, 공포의 정령과 계약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
튜리크가 메를로라는 정령과 대화하는 동안, 노인이 센과의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기반으로 세운에게 갖가지 질문을 해 왔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세운도 그 대화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원탁에서 보았던 정령들도 튜리크에게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
진실과 거짓의 정령.
녀석들과 지금 눈앞에 보이는 메를로의 반응을 통해 튜리크의 입지를 알 수 있었다.
처음 마주칠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소심했는데, 지금은 소심함을 완전히 버리고 리더로서의 통솔력을 익히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먼! 이걸로 사대 정령을 제외한 무소속 정령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는데, 그곳에서도 이런 체계가 이뤄지고 있었다니!”
“대, 대단한 건가요? 교수님?”
“물론일세! 자네는 메를로와 어떻게 계약을 맺었다고 했지?”
“우연이었어요. 길드에서 퇴출당해서 슬퍼하던 참에…….”
“센, 그때 하루 종일 술 마시며 펑펑 울었다고 안 했어?”
“아무튼! 슬퍼하던 참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혹시 몰라 소환진을 펼쳤더니 메를로가 나왔거든요.”
“그렇다네! 지금까지는 무소속 정령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해당 감정이나 속성 등을 우연히 발현하는 수밖에 없었네. 그마저도 인공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지!”
“그렇다면…….”
“무소속 정령들의 생태를 알게 된다면, 그 과정을 인위로 실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오오!”
“지금 사대 정령과 계약을 맺는 정석적인 방법들처럼, 무소속 정령들과 계약을 맺는 소환진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노인 앞의 두 조수가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이는 세운도 발상하지 못했던 활용도였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세운은, 지금 그들이 튜리크와 메를로를 주제로 한 짧은 대화에서 얻을 수 있었던 정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릇 값진 정보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이걸 제 첫 논문으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세운의 첫 논문 주제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