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488)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488화(488/675)
제 488화
‘저 녀석이 어째서?’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회귀 전부터 세운을 괴롭히던 걸로 모자라, 회귀 후까지 세운을 건드렸던 목축의 신.
결국 마몬의 도움을 받아 쓰러트리고, 세운이 가진 성흔의 모태가 되어준 녀석을 말이다.
‘내게 흡수된 놈이니 자아가 남아 있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이곳은…….’
자신의 심상 세계라고 하여도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정의 지침표 덕분에 대략적인 구조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세운이 생각하는 성흔의 위치는 서클과 정반대.
엘하임을 거쳐 데스힐로 내려온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성흔의 위치는 세운이 도달한 가장 높은 쉼터인 열 번째 쉼터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곳은 그곳과 전혀 관련 없는 데스힐이다.
이런 곳에 어째서 녀석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가로로 쭉 찢어진 동공을 번들거리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던 세운은 곧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도망친 거군.”
“크흐…… 뭐라?”
간단하다. 녀석은 세운에게 흡수되자마자 자아를 지키기 위해 성흔에서 도망쳐 외진 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세운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애초에 세운이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우연에 불과했다.
그런 세운을 기다려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뿔을 갈아오기는 무슨. 저항할 힘이 남아 있었다면 내가 여기 들어오든 말든 무언가 일을 벌였겠지.”
세운의 심상 세계 내부에서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판.
만약 녀석이 힘이 있었다면, 심상 세계 내부에서 핵심 부위에 돌입하여 세운에게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하다.
단전에 침입하여 힘을 막든가, 서클을 부수든가, 더 상위의 영역에 침입하여 세운의 자아를 빼앗든가, 할 수 있는 건 많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즉, 녀석에게는 저항을 위한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자네에게 힘을 흡수당한 몬스터인가? 내 상황은 잘 몰라도, 저렇게 흡수당한 경우에는 스스로의 노력 따위로 힘을 키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네.”
“모, 몬스터라? 설마 지금 이 몸을 향해 몬스터라고 말한 것이냐!”
“자네의 단전이나 서클을 흡수하거나 했다면 모를까, 힘이 흡수당하여 자아의 잔재가 남은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을 테지.”
대현자의 말에서 또 한 번 증명되었다.
뿔을 갈아왔다는 녀석의 표현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녀석은 복수를 위해 뿔을 갈아왔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닌, 그저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이 구석에 숨어 있던 겁쟁이였을 뿐이다.
아마 지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숨어 있던 중에 세운의 인기척을 느끼고 위협을 느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거, 거기 네놈! 헛소리하지 마라! 이 날카로운 뿔이 안 보이더냐!”
“애초에 너, 이제 뿔 없잖아?”
“무슨 소리를!”
“양쪽 뿔 모두 뽑힌 주제에. 가짜 뿔이나 갈고 닦아서 뭐에 쓰게?”
모든 상황을 이해한 세운이 판을 향해 발걸음을 내밀었다. 그러자 판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은 죽기 전에 마몬에게 양쪽 뿔을 뽑히며 성자로서의 격을 잃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세운이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대라는 뜻이다.
“진짜다! 이 뿔은 진짜란 말이다! 내 가장 소중한, 나의 뿔이다!”
“그래? 그럼 확인해 보면 되지.”
“네놈……!”
카앙!
세운이 먼저 판에게 달려들어 뒤랑달을 휘둘렀다.
검날과 뿔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공격이 완벽하게 막혔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세운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약하다.’
녀석은 과거처럼 신으로서의 격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 증거로, 고작 공격을 한 차례 부딪힌 것만으로 녀석의 뿔에 작지만 확실한 흠집이 생겨나 있었다.
탐욕의 권능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도 말이다.
“감히 인간 주제에! 이번에야말로 신의 격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메에에에-
음모오오-
판의 외침과 함께 그의 뒤로 수백 마리의 가축들이 나타났다.
양과 염소, 소와 나귀 등, 다양한 가축들이 눈을 붉게 물들이며 세운에게로 뿔을 들이대고 달려온다.
그런 녀석들을 향해, 세운이 검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을 치켜들었다.
– 흑탑의 묘리에 따라 ‘파이어 스톰’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 적탑의 묘리에 따라 ‘파이어 스톰’의 범위가 확산됩니다.
화르르륵!
7서클의 불 마법, 파이어 스톰.
그 뜨거운 화염 폭풍이 전방으로 몰아치며 수백 마리의 가축을 뒤덮었다.
예전에 판과 싸울 때 사용했던 불 마법인 ‘인페르노’와는 위력과 범위 모두가 달랐다.
가축들은 세운에게 닿기도 전에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폐허의 먼지 일부가 되어 사라졌다.
“크흐하하하하! 예전에는 마신이 네 뒤를 봐주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검은 매연 속에서 한층 더 웅장해진 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축들이 타고 쌓여 버린 시꺼먼 잿가루 위로 거대한 발굽이 떨어졌다.
“마신이라 하여도 심상 세계까지 관여할 수는 없는 법이니!”
급격하게 성장한 판의 몸.
5m가 넘어가는 거구에,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하고 발굽은 철퇴처럼 크고 단단해졌다.
구불거리는 뿔은 몇 배는 더 크고 굵어졌으며, 검갈색 털이 전신을 길게 뒤덮었다.
녀석이 죽기 전에도 드러낸 적이 있었던 진짜 모습.
아니, 당시에는 탑에 억지로 난입하며 힘이 억압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때보다 더욱 크고 강한 모습이었다.
“마신의 도움이 없는 이상, 네놈 따위는 이 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판이 앞발로 땅을 짚어 사족보행의 자세를 취한다.
황소처럼 앞발을 구르며 콧김을 씩씩거리더니, 이내 근육을 터질 듯이 팽창시키며 세운을 향해 돌진한다.
구불거리는 뿔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래, 여기서 마몬을 부를 수는 없지만.”
세운이 만병지함을 열어 최근에 새로 얻은 무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부정의 족쇄.
아마도 폐왕의 것이라 추측되는, 포저를 묶고 있었던 시꺼먼 사슬을 하늘 높이 내던지며 탐욕의 권능을 발현하였다.
–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영원한 형벌, 코카서스의 족쇄 ]–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불꽃을 훔친 죄로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였을 때 그의 몸을 속박하였던 헤파이스토스의 쇠사슬.
시꺼멓던 부정의 사슬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사슬 하나하나가 분리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그것들 하나하나에서 이내 온전한 사슬이 되어 길게 쏘아졌고.
촤르륵!
“크흑!”
거침없이 달려오던 판의 몸을 옭매었다.
신을 속박했었던 코카서스의 족쇄.
비록 지금은 신으로서의 격을 모두 잃은 판이었지만, 신이었다는 그 이력은 족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녀석은 달리는 모습 그대로 사슬에 꽁꽁 묶여 옴짝달싹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지?”
“네가 어째서! 네가 어째서 그 마신의 힘을!”
촤르륵!
“그만 닥쳐.”
“우읍!”
금빛 사슬이 길게 튀어나온 판의 아가리를 묶었다.
그 모습에 세운의 뒤에 있던 대현자가 ‘호오~ 마법도 아니고, 놀랍도록 신비한 힘이로군!’이라며 감탄사를 뽑아냈다.
금빛 사슬. 이는 판이 살아 있을 때, 세운을 공격하던 마지막 순간 마몬에게 속박당했던 당시에 사용되었던 사슬이었다.
다만, 판도 가만히 묶여 있을 생각은 없다는 것인지 발작을 일으키듯이 몸을 꿈틀거렸다.
이내 두꺼운 뿔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아가리에 굵은 주름이 수십 개나 생겨나더니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주둥이를 묶은 사슬이 터져나갔다.
“한 발짝만 더 가면 된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네놈을 꿰뚫고, 네놈의 몸을 탈환하여!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내가.”
푸북.
“크웁!”
세운이 만병지함에서 꺼낸 광룡의 송곳니를 녀석의 주둥이에 박아 넣었다.
“닥치라고.”
푹, 콰직!
“크우읍!”
만령의 비석이 녀석의 발굽을 짓뭉개고, 고창석이 만들어 주었던 영절겸이 녀석의 어깨춤에 틀어박혔다.
“했을 텐데?”
꽈득!!
“크하아아아악!”
뒤랑달, 아펠리온, 대지 분쇄기, 영파부 등, 세운의 만병지함에 들어 있던 무기들이 차례차례 튀어나와 판의 몸에 틀어박혔다.
사슬 때문에 몸이 속박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인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단검이 틀어박힌 주둥이를 활짝 벌려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마치, 마몬이 강림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
판은 데자뷔가 느껴지는 지금의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만병지함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를 판의 몸에 쑤셔 박은 세운이 녀석의 머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피눈물까지 흘리며 동공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이거, 아까부터 영 거슬렸거든.”
“아, 안 돼.”
세운이 판의 왼쪽 뿔을 붙잡았다.
판은 이미 이와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녀석의 공포는 세운이 뿔을 잡는 순간 극한까지 치달았다.
이쯤이면 슬슬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지만, 세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그것만은, 진짜 안 됩니다. 제발, 제발, 제발!”
“말에 진심이 안 담겨 있네.”
꽈득!
– 성흔이 혈랑전설의 설화에 반응합니다.
– 성흔의 두 번째 능력, ‘광란’이 깨어납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푸홧!
세운이 광란의 힘까지 사용해 가며 판의 왼 뿔을 뽑아 들었다.
마몬이 뽑았을 때는 악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두개골 일부까지 뽑혀와 뇌수가 흘러내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생각 없이 뽑아 들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세운은 당장 녀석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기에 마지막 순간 손목을 꺾어 두개골이 뽑히기 전에 뿔만 부러트린 덕분이었다.
다만, 이것만으로도 판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나 보다.
“크흑, 크허윽.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시오. 아빠, 아빠. 죄송합니다…….”
“그러게, 살고 싶었으면 얌전히 숨어 있든가 했어야지.”
세운의 손에 들린 판의 뿔에 금이 가며 부서지더니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역시, 이건 녀석의 진짜 뿔이 아니다. 그저 녀석의 자아가 염원하여 만들어진 외격일 뿐.
세운이 가벼워진 오른손으로 판의 남은 오른쪽 뿔을 쓰다듬자, 판의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더더욱 커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숨어 있을게요. 절대 안 나올게요. 그러니 제발…….”
이미 정신이 망가진 것 같았지만, 세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악랄함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 이게 연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의 권능까지 발현하여 녀석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세운의 눈을 피하며 덜덜 떨려대는 동공을 보니, 아무래도 연기는 아닌 듯했다.
“숨기는 이미 늦었고. 이렇게 된 거 안내 좀 해야겠다.”
“아, 안내 말씀이십니까? 안내라면 어떤, 무슨…….”
판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금빛 사슬과 만병지함의 능력을 이용하여 녀석의 몸에 꽂혀 있던 무기가 전부 사라졌다.
이제 몸에 자유가 찾아왔지만, 판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몸을 떨며 세운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의 지리에 대해는 알고 있겠지? 안내 좀 해 줘야겠다.”
여정의 지침표가 있다고는 해도 심상 세계의 정확한 지리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녀석을 안내견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뭐, 뭐든지…….”
“트리톤 어디 있어?”
세운의 성흔에 먹혀든 또 하나의 성좌를 찾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