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494)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494화(494/675)
제 494화
“꽉 잡아라.”
“네.”
“어흠, 잠시…….”
펄럭!
“허엇!”
금향룡의 등 위로 오르다가 비늘을 잘못 디뎌 미끄러질 뻔한 대현자의 손을 세운이 잡아주었다.
멋들어지게 변한 신전을 바라보며 목숨을 부지했음을 느낀 판도 다급하게 세운의 뒤를 따라왔다.
“허허, 내가 용의 등에 타 보다니. 심상 세계만 아니었다면 영상 기록이라도 해 두고 싶군.”
용의 비행은 단순히 날갯짓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날갯짓을 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레 주변의 마나와 반응하여 플라이 마법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사람으로 예를 들자면,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는 건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행동과 비슷하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드레이크가 비행을 포기하고 네발로 기어 다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리라.
와이번만큼 날렵한 몸과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이런 거체를 날갯짓만으로 띄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시간이 없으니 속도를 좀 내지.”
콰아아앗!
“헛!”
“크어…….”
금향룡이 날개를 한 번 펄럭이는 순간, 강렬한 풍압이 세운을 포함한 세 명을 덮쳤다.
엄청난 속도.
보통 비행을 시작하려면 속도를 내기까지 가속도를 붙이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금향룡에게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원하는 속도를 내며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세운이 지나온 길을 역행하였다.
세운과 대현자가 곧바로 마법을 발현하여 풍압을 줄이려 하자, 금향룡이 슬쩍 눈을 굴리고는 전방에 반투명한 막을 생성하였다.
“누군가를 등에 태우는 게 워낙 오랜만이라 깜빡했군.”
“감사합니다.”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자마자 전신을 짓누르던 풍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특히, 혼자 마법을 펼치지 못해 뒷발이 떨어져 나가고 앞발로 간신히 비늘 하나를 붙잡아 매달려 있던 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음 층이다.”
가공할 만한 속도 덕분에 첫 번째 쉼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카베의 모래폭풍이 금향룡을 덮쳐왔지만, 반투명한 막은 바람뿐만 아니라 모래알 역시 훌륭하게 막아냈다.
“다음 층.”
시야가 전환되어, 바로 두 번째 쉼터의 눈보라가 들이닥쳤다.
금향룡이 만든 막은 바람이나 모래알을 막는 것뿐 아니라, 온도 유지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는지 추위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 엄청난 속도로군. 이게 용의 비상이라는 건가?”
“남은 시간은?”
“오 분쯤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조금만 더 속도를 내도록 하지.”
금향룡이 또 한 번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안 그래도 빠르게 스쳐 가던 주변의 풍경이 물감처럼 길게 늘어지며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다음 쉼터인 지하 벙커 데지트, 항구도시 제헤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허허, 이거 원. 우리가 힘들게 아래까지 내려간 게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군.”
세운 역시 대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그 말에 금향룡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데려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제가 심상 세계를 둘러보길 원하신 겁니까?”
“그렇다. 서클이나 단전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심상 세계를 둘러보는 것은 신좌에 도달하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라일락과 데스힐이 시야에서 지나쳐 사라졌다.
순식간에 처음으로 도착했던 갈라진 나무, 엘하임에 도착하였다.
이 이후로는 세운도 처음 향하는 영역이었다.
“이 구조라면, 다음은 아홉 번째 쉼터인가?”
“그렇겠죠.”
“내 직접 도달한 적은 없지만, 정보로는 접한 적이 있지. 아홉 번째 쉼터라면, 분명…….”
“검은 대지, 플라카.”
이번에도 역시 금향룡의 날갯짓 한 번에 엘하임이 사라지고 아홉 번째 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대지라는 이명에 걸맞게 새까맣게 죽어 있는 대지.
다른 쉼터들은 이것들을 보고 아우터에 의해 멸망된 여파라고 생각되겠지만, 이곳은 아니다.
‘여긴 딱히 달라진 걸 모르겠네.’
애초에 플라카는 검고 삭막한 지역이었기에 멸망 전과 후가 도드라지게 차이 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균열이 일어난 지형이나 새로 생겨난 절벽, 거주 지역이 있던 자리에 남은 크레이터 등, 다양한 차이점이 보였지만, 느낌 자체는 비슷했다.
“심각하군. 이게 멸망이라는 것인가…….”
다만, 대현자는 플라카를 목격하는 게 처음이었던 터라 반응이 달랐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쉼터 중에서도 가장 멸망에 근접해 보이는 플라카의 모습에 침음을 흘리고 있다.
생각을 정정해 줄까 하다가, 금향룡의 빠른 속도에 이미 플라카가 끝나가고 있어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도착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문을 넘는 순간,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두컴컴하던 배경이 사라지고, 세운이 도달했던 마지막 쉼터. 열 번째 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완전히 다르네.’
하늘은 깨진 유리창처럼 균열이 일어, 그 사이로 검붉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흙바닥 대신 둥둥 떠 있는 구름은 액체에 물들어 벌겋게 젖었고, 녹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밑바닥에서는 유황불 같은 게 이글거렸다.
“……여긴, 지옥인가?”
“원래는 그 반대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금향룡이 비행을 멈추었다.
지금부터는 직접 둘러보라는 듯이 가장 가까운 구름에 세운 일행을 내려주고는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하였다.
그러자마자 저 멀리, 다음 구름 쪽에서부터 인기척 하나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저건…….”
“주이이인!”
“튜리크?”
보랏빛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온 튜리크가 잽싸게 세운의 품에 안겼다.
이제는 키가 제법 커져 정령이라기보단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정도로 보였다. 조금만 더 크면 세운의 키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정령의 원탁에서 보았던 정령왕들을 떠올려 보면 조만간 튜리크가 세운의 키를 뛰어넘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튜리크가 세운의 키보다 큰 모습은 상상이 어렵지만 말이다.
“주인,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너무 신기해!”
“아. 튜리크도 성흔에서 지내고 있었지?”
“튜리크‘도’?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실망이야!”
“아냐. 당연히 튜리크도 보러 온 거지.”
“정말? 정말이지? 아, 루인한테 가자. 루인도 좋아할 거야!”
튜리크가 세운의 손을 끌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에 고개를 돌려보자, 대현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 분이라.’
무언가를 할 만한 시간은 아니지만, 간단하게 이곳을 둘러볼 시간은 되었다.
혼자 둘러보는 것보다는 안내를 받는 게 나을 테니 세운은 튜리크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무서운 곳이군.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하늘에, 아래는 유황불이 들끓는 곳이라니 말일세.”
“그치! 너무 좋아! 처음 들어왔을 때, 정령계보다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어!”
“음. 그, 그런가? 취향은 존중한다만…….”
튜리크의 당찬 반응에 대현자가 되레 당황한다.
저래 보여도 공포의 정령. 다른 사람이 무섭다고 느낄 만한 환경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최적의 환경이었다.
처음 계약할 당시에 세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던 이유 중 하나가 이곳의 형태를 미리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튜리크를 따라 몇 개의 구름을 건너니, 새로운 환경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건너온 시뻘건 구름이 아니라 새까만 구름. 아니, 구름 위를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검은 액체.
“……아우터.”
분명하다.
당장 세운의 오른손등에서 성흔이 빛을 흘리고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기서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액체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어필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한창 식사 중이야! 얼마 전부터는 나랑 안 놀아주고 맨날 먹고 불리기만 하고 있어.”
“불리기?”
“몸 불리기! 한동안 또 먹기만 했으니까, 또 엄청 커졌을 거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제법 거리가 멀긴 했지만, 그럼에도 루인은 워낙 눈에 띄었으니까.
콰득, 콰직!
꿀꺽.
“크르릉…….”
루인의 크기는 어지간한 집 한 채 정도는 가뿐히 넘을 정도였다. 높이만 하여도 최소 사층 짜리 건물과는 엇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크기로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는 정신없이 아우터를 씹고 뜯고 있었다.
꿀꺽 삼킨 아우터가 목청을 타고 넘어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루인.”
“크르르…… 나의, 주인이시여.”
루인이 식사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세운과 눈을 마주쳤다.
그냥 크기만 커진 줄 알았더니, 송곳니도 눈에 띄게 길고 날카로워졌다.
검붉게 번들거리는 털은 그 어떤 창칼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고, 저렇게나 털이 두꺼움에도 그 안으로 잘 단련된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고 있는 거지?”
“몸을…… 키워야 한다.”
“어째서?”
특유의 반존대. 어쩌면, 루인은 아직까지도 세운을 주인으로서 완전히 인정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루인은 세운의 질문에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세운은 루인의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인…….”
세운이 51층의 시련에서 집어삼켰던 제단의 거인. ‘썩지 않는 자’라는 이명으로도 불렸던, 한때 성좌였다고 하는 자의 잔재였다.
“저걸 뜯기에는 아직도 힘이 부족하다. 힘을 키워야 한다.”
콰직!
루인이 그렇게 말하며 바닥의 아우터를 또 한 입 집어삼켰다.
즉, 루인은 저 거인을 집어삼키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말했었지. 만약 자네가 저 거인을 완벽히 소화한다면…….”
“준신이 아닌, 완전한 신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용혼석을 흡수할 당시에 금향룡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루인은 세운과 생각이 달랐나 보다.
오로지 저 거인을 집어삼키겠다는 목적 하나로, 이곳에서 저렇게나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니.
“내가 도울 게 있나?”
콰득!
세운의 질문에 아우터 한 조각을 뜯어 삼키던 루인이 그르릉 소리를 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만큼이나 기다란 송곳니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세운은 떨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당당하게 눈빛을 굳히며 루인을 노려보았다.
“먹이…….”
“먹이?”
“먹이가 부족하다.”
먹이라.
분명 지금 루인이 씹고 있는 검은 액체, 아우터를 뜻하는 말이다.
당장 주위에 널릴 대로 널려 있지만, 루인의 덩치를 생각했을 때 이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말뜻을 이해한 세운이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루인의 콧등에 손을 올렸다.
“먹이라면, 걱정 마라. 이제 곧 잔뜩 준비해 줄 테니까.”
의도치 않게 심상 세계까지 들어오게 되었지만, 애초에 세운의 목표는 엘 아브르의 지하에 있을 거라 추측되는 아우터를 찾기 위함이었다.
세운의 추측이 맞고, 계획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네.”
뒤에서 대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세운이 루인의 콧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되뇌었다.
“여기 있는 거부터 다 먹고 기다리고 있어.”
“크릉.”
“주인, 가는 거야?”
“또 올게, 튜리크.”
츠츠츠츠츳!
저 멀리, 심상 세계를 이루고 있던 장막이 깨지기 시작했다.
금향룡을 포함하여 루인과 튜리크는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저걸 느끼는 건 세운과 대현자뿐인 모양이다.
심상 세계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던 세운과 심상 세계를 연결해 주던 통로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심상 세계를 떠나기 전…….
“아, 그리고.”
세운은 깜빡했다는 듯이 루인에게 추가 명령을 하달하였다.
“저것 좀 굴려. 허튼짓 안 하게.”
“먹이?”
“죽이지는 말고. 그냥 편할 대로 굴려. 아…… 말 안 들으면 먹어도 되려나.”
“제,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했잖습니까! 분명! 살려준다고!”
판이 애원하며 세운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려 하였으나, 이미 세운의 몸은 심상 세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약속 때문에 죽이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심상 세계에 남겨두자니 또 허튼짓을 할 것 같으니 불안했는데, 루인이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째앵!
심상 세계의 풍경이 부서지며, 세운과 대현자가 심상 세계로부터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