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505)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505화(505/675)
제 505화
엘하임의 서른 번째 가지.
스무 번째 가지만 되어도 길드 단위로 움직이며 대규모 레이드를 해야 하는데, 서른 번째 가지는 어떻겠는가?
몬스터의 수준이 강한 것은 물론, 의뢰 내용이 ‘섬멸’임을 증명하듯 수많은 몬스터가 존재한다.
다른 플레이어가 이곳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면 절로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세운에게는 오히려 괜찮은 조건이었다.
– 흑탑의 묘리에 따라 ‘헬 파이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 적탑의 묘리에 따라 ‘헬 파이어’의 범위가 확산됩니다.
엘 아브르에서 얻은 힘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수의 샌드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콰르르륵!!
“키에에에엑!”
수십, 수백의 해충들이 지옥의 불길을 감당하지 못하고 타들어 갔다.
아무리 엘하임에서 손꼽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모여 있다고 해도 8서클 마법에는 버티지 못했다.
하물며 헬 파이어는 8서클 마법 중에서도 파괴력으로는 최상위에 이르는 화염 마법. 해충들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이었다.
“커어어어어어-!”
이글거리는 지옥의 불길을 뚫고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지네를 닮은 녀석이었는데, 헬 파이어를 뚫고 나왔음에도 반질거리는 갑각에는 작은 그을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수백 개의 다리가 꿈틀거리며 돌진하는 형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오소소 돋게 만들었다.
‘저게 이곳의 보스 몬스터.’
의뢰서를 자세히 읽지는 않았지만, 서른 번째 가지에서 세운의 불길을 뚫고 들어올 정도면 보스 몬스터가 분명하다.
어지간한 네임드 몬스터들은 불길을 버텨내 세운에게 다가온다 하여도 전신 화상을 입고 죽기 직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최대한 멀쩡하게 데려와달라고 했지.’
백현의 말을 떠올린 세운이 뒤랑달을 꺼내 들었다.
8서클 마법을 난사한 탓에 텅텅 비어 가던 서클 대신, 아랫배에 잠들어 있던 단전을 깨운다.
–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제왕검형(帝王劍形) ]– 오대 세가 중 필두를 차지한다 알려진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비장의 검법. 제왕과 같은 위엄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초의 검법이다.
이십 갑자.
한 갑자에 이르는 내공을 모으기 위해 육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내공.
육십 년이라고는 하나, 일반적으로 인간이 평생을 수련하여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진 공력과 깨달음이다.
즉, 세운이 지닌 내공은 평생 동안 무공에 매진한 스무 명의 무인(武人)이 지닌 힘이나 다름없었다.
“커어으으으-”
카가가각!
수백 개의 다리를 파도처럼 일렁이며 세운에게 돌진하던 지네가 머리를 뒤로 빼며 급격하게 몸을 멈췄다.
그저 검을 들고 가만히 중단세를 취하고 있을 뿐인데, 지네는 세운의 뒤에서 정체 모를 위압감을 느낀 것이다.
이게 바로 제왕검형에 담긴 왕의 위엄.
아니.
– 성흔이 혈랑전설의 설화에 반응합니다.
– 성흔의 첫 번째 능력, ‘공포’가 깨어납니다.
성흔의 힘까지 담긴 제왕검형은 인계(人界)의 왕이 아닌 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감히 왕의 앞에서.
감히 신의 앞에서 한낱 마물 따위가 무얼 하겠는가?
고개를 숙이는 걸로도 부족하다.
쿵!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수백 개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야생 특유의 생존 본능이 전신을 자극하더라도, 신의 위엄 앞에서는 감히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왕검형(帝王劍形).
그 위엄을 증명하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내공이 소모되기에 여태까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상승무공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십 갑자에 이르는 내공과 성흔의 힘이 어우러진 제왕검형은 그 어떤 공격보다 뛰어난 무게를 지녔다.
“커으으으으-”
세운이 검을 들었다.
다른 검술처럼 머리 위까지 치켜든 것도 아니다.
아주 살짝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검을 바닥에 틀어박힌 지네를 향해 내린다.
벤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로 느리게.
마치 신하의 공적을 치하하듯이 위엄 넘치는 그 모습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양의 내공이 담겨 있었다.
뚝.
무언가 끊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아니, 착각이었다.
애초에 검은 지네의 몸에도 닿지 않았고, 검에서는 희미한 검기조차 발현되지 않았다.
그저 그 압도적인 위엄으로 인해 지네의 이성이 끊기고, 스스로 자신의 생을 끝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폭식의 권능으로 ‘서른 번째 가지’ 전체를 지정하였습니다.
– 폭식의 어금니가 몬스터를 덮쳐옵니다!
베엘제붑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어금니를 선보이며 먹잇감을 집어삼킨다.
단 하나. 백현이 부탁했던 보스 몬스터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모든 힘을 확인했다기에는 아직 부족하나, 몸을 풀기에는 딱 적당한 난이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동안 엘하임의 모든 가지를 휩쓸고 싶었지만, 엘 아브르에서의 일도 멈출 수는 없다.
– 성좌, ‘배고픈 왕자’가 톡톡 터지는 벌레의 식감에 황홀경을 느낍니다.
마치 아직까지 살아 있는 듯한 보스 몬스터의 모습에 백현이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며 세운이 발걸음을 돌렸다.
* * *
그 이후, 세운은 하나의 루틴을 만들었다.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다급하게 자신을 찾아오는 현자들에게 조언을 건네거나 연구를 돕는다.
점심 식사 후에는 대도서관에 앉아 서적들을 읽거나 마몬에게 신언을 배운다.
다음에는 간단한 저녁 식사 후, 몸을 풀 겸 의뢰소에서 의뢰를 받고 엘하임의 사냥터에 들른다.
중간중간에 유서아를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강한철과 대련을 하는 등의 변수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루틴을 따라 움직였다.
–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아직 절반도 못 왔는데 어디서 만족감을 드러내냐며 부리로 당신의 정수리를 조준합니다.
“하아…….”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이 신언이라는 건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듣자 하니 신언은 신이라고 모두 알고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신 중에서도 절반 이하. 아니, 사분에 일 정도만이 알고 있는 언어였다.
그 의미를 익히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신력과 신성력까지 필요하니, 실질적으로 인간이 익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신언을 완벽하게 익힌 사례 역시 존재하지 않았고.
‘그럼 이 서적은 신이 직접 쓴 거란 말인가?’
세운이 반쯤 훼손된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 익히면 내용이 어느 정도 이해될 거라 생각했는데, 신언은 조금 익혔다고 조금씩 해석되는 게 아니었다.
단어와 단어의 연결이 모두 완벽해져야만 그 뜻이 완벽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아직 서적의 내용을 십 분에 일도 해석해 내지 못했다.
–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지금 넋 놓고 있을 여유가 있냐며 얼른 다음 페이지를 넘기라며 재촉합니다.
마몬의 메시지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보니, 슬슬 몸을 풀러 일어날 시간인가 싶었을 때쯤.
지잉-
손목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대도서관의 3층에는 대현자가 아닌 이상 입구를 지키는 수호병도 출입하지 못하니, 급한 경우 내부의 대현자를 호출하기 위한 아티펙트를 제공한다.
진동의 강도나 횟수로 호출인을 알 수 있게 설정해 둔 덕분에, 세운은 그 정체가 유서아라는 것을 깨닫고 길드챗을 열어보았다.
[ 유서아 : 세운 씨, 많이 바쁘신가요? ] [ 정세운 : 무슨 일이지? ]그녀도 세운이 이 시간에 대도서관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지간하면 방해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 유서아 : 청해 길드의 마스터가 세운 씨와의 대면을 요청했어요.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 [ 정세운 : 제논이? ]아무래도 오늘은 사냥터에 들르지 못할 것 같았다.
– 성좌, ‘배고픈 왕자’가 비명을 지르며 ‘제논’에게 적대감을 한껏 드러냅니다.
베엘제붑의 메시지를 뒤로 하고, 세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청해 길드의 거점이 세워진 엘하임의 가지.
길드전에서 이긴 덕분에 디아블로의 거점이 되어 버린 이곳은 예전과 분위기가 썩 달라졌다.
거점을 가득 채우고 있던 푸른 갑옷의 경비들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청해의 위상도 보이지 않는다.
길드전이 벌어진 후로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미 청해를 잊고, 이곳을 디아블로의 거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본관에 들어서자 푸른 갑옷을 입은 여인이 세운을 반겨주었다.
분명 이전에 길드전에 대한 회의를 거칠 때 보았던, 청해에서도 제법 영향력 있는 자였는데.
그때와는 다르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꽉 깨물더니 등을 돌리고 세운을 안내한다.
‘분위기가 좋지는 않네.’
하긴, 당연한 일이다. 단순히 친선전에서 패배한 것도 아니고 길드가 가진 모든 것이 걸린 길드전에서 패배하였으니.
엘하임 최고 길드라는 명성은 바닥에 추락하고, 덩달아 길드원들의 자신감과 자부심도 바닥을 찍었을 터다.
‘사람도 안 보이고.’
거점을 오르고, 본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청해의 길드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르며 마주친 청해 길드원의 수가 열 손가락을 채우지 못할 지경이다.
설마, 길드를 나간 것일까?
하긴, 이미 길드의 자부심이 바닥을 찍었으니 길드원들이 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달한 문 앞.
똑똑.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논과 함께 아름다운 수족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착각일까?
분명 전과 똑같은 수족관인데, 어쩐지 이전에 느꼈던 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청해 길드의 상황처럼 축 처진 분위기.
이전에 소개받은 해마 역시 산호초에 꼬리를 묶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디아블로의 마스터.”
“오랜만이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제가 즐겨 마시던 적수역을 우린 냉차가…….”
“본론부터 얘기하지. 부른 이유는?”
“……하하. 여전히 성격 한번 급하십니다.”
어쩐지 기운 없어 보이는 웃음.
하지만, 그 눈빛에서는 확고한 결심이 묻어나왔다.
“이전에 하신 제안, 많이 고민해 보았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라 청해의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렇군.”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 하하, 당연하겠죠. 길드의 수장인 제가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입니다.”
“결정은 했나?”
“……네.”
제논이 수족관 앞에 섰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수족관 안에 있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명예와 명성을 잃고 디아블로 길드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음에도 끝까지 자신을 따라와 준 길드원들. 끝까지 충성을 맹세하며 푸른 창을 바로잡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있으면 청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디아블로 길드의 아래에서 세운과 함께라면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용의 머리는 되지 못하겠지만, 용이 지닌 날카로운 발톱이 되어 닭의 머리로 자리 잡았을 때보다 더욱 높은 명성을 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뭐지?”
“당신이 탑을 오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빠직.
수족관 안에 있던 해마의 등에서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이 수족관에서도 그가 가장 아끼고 소중히 하였던 소룡종.
처음에는 이토록 작아 보여도, 끝없이 탈피하며 결국에는 바다를 다스리는 해룡(海龍)으로 성장한다는 파도의 선지자.
“과거를. 아니, 미래를 다시 쓰기 위해서.”
해마의 등에 난 균열이 더욱 크게 갈라지며, 그 안에서 태양에 비친 수면처럼 눈부신 피부가 드러났다.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해마가 탈피를 거치며 더욱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러고는 허물을 버린 채로 수면을 향해 나아갔다.
더 높고, 더 밝고, 더 아름다운 곳으로.
“그렇군요.”
그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세운의 대답 때문일까?
미래를 다시 쓰기 위함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도, 제논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청해 길드의 마스터, 제논. 지금부터 디아블로의 마스터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엘하임 최고의 길드라 알려졌던 청해 길드가 디아블로의 산하로 완전히 소속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