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506)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506화(506/675)
제 506화
디아블로와 청해 길드의 화합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산하 길드라고는 하나, 세운은 애초에 청해 길드를 부하가 아닌 동료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제논이 고개를 숙이며 저자세로 들어온 이상, 디아블로 길드원들 역시 청해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청해석으로 만든 갑옷은 분명 훌륭하네. 하지만, 자네들에게는 그것보다 해상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 더 어울려 보이네.”
“저도 생각은 해 왔습니다만, 제 실력이 부족한지 가죽으로는 높은 등급의 장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허허, 그거라면 내가 도와주지.”
“정말이십니까? 대장장이의 제련법은 친자에게도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이제부터 함께 탑을 오를 동료인데, 숨길 이유가 뭐 있겠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고창석이 청해 길드의 대장장이를 지도하고 있는 게 보인다.
수련터에서는 대련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고, 최수창은 청해와의 연계를 이루어 갖가지 훈련을 진행하였다.
“수중에서의 공격이 강한 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모든 전투를 수중전으로 벌일 수는 없잖아요?”
“네, 어쩌면 저희가 다음 쉼터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가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죠.”
“장점을 최대한 살린 지상전을 모색해 봐야 해요. 저도 학회에서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볼 테니 같이 노력해 봐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이곳에 들렀을 때, 청해는 그야말로 어둡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비록 그 수가 절반가량 줄었다고는 해도, 청해의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등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간만에 학회에서 벗어난 세운이 제논과 함께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께서 잘 말해 주신 덕분에 화합이 빨라졌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했지만, 제논은 오히려 더더욱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세운에게 예를 표했다.
제논이 그리 행동하자 청해의 길드원들은 당연하게도 그보다 더욱 엄격하게 세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더 말해 봤자 제논을 설득하긴 어려울 테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기에 세운이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가지.”
“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세운이 오늘 거점에 찾아온 이유는 길드원들이 잘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디아블로와 청해의 길드전에 앞서 제논이 했던 말.
‘네. 해신께서는 더 이상 당신을 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림포스에도 잘 말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제논이 아니라 그 윗선.
포세이돈에게 직접 받아야 하는 보상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포세이돈이 과연 말을 지킬까.’
신의 거짓말이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내뱉는 것만으로 자신의 격이 깎여 내려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존재가 명명 있는 주신급 성좌라면 더더욱.
물론, 포세이돈에 대한 내용은 세운과의 서면으로 나왔던 말일 뿐이지 계약서에 적힌 내용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딴지를 잡아 말을 어길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지하?”
“가지를 파 내려가 찾아낸 물관입니다. 해신께서 내려주신 신물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수분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나무를 해치는 짓이기는 해도, 보아하니 최대한 나무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한 흔적이 보인다.
하긴, 무리하게 물관을 해쳤다가는 그들의 거점인 이 가지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다.
나무가 워낙 거대한 탓에 물관의 크기도 엄청나다.
그 통로를 따라 움직이다 보니, 금방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게…….”
“네. 저게 해신께서 내려주신 청해 길드의 신물(神物).”
엘하임의 가지 속에 이어진 물관의 끝자락.
물관에 연결되어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조개의 속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진주가 담겨 있었다.
“진청(眞淸)의 진주조개입니다.”
우웅-
진주를 마주하자마자 성흔이 즉시 반응한다.
루인이 당장 저 진주를 삼키고 싶다며 재촉하는 듯했지만, 포세이돈과 아니, 올림포스와의 화해를 나눌지도 모르는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신탁은 이미 내려왔습니다. 아마, 바로 응답해 주실 겁니다.”
해신의 신물을 보고 있자니 세운의 머릿속에 튜토리얼의 바다에서 찾아낸 흑경의 심장이 떠올랐다.
그 역시 어인들과 레비아탄을 이어주는 유일한 소통구였지. 분명 이 진주조개 역시 그와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수와앗-
제논의 손이 조개 위에 닿자, 진주의 주위로 푸른 물줄기가 휘감겼다.
물줄기는 서서히 진주를 향해 깃들었고, 이내 진주 역시 바다와 같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 크흠. 네가 그놈이구나.
해일과도 같은 위압감이 세운의 어깨를 짓눌렀다.
판이나 트리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미 몇 차례고 성좌를 마주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성흔이나 튜리크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까 싶었는데, 철저한 오만이었다.
– 성흔이 심해의 공포를 집어삼킵니다.
– 압도적인 공포를 포식하며 혈랑의 이명이 강화됩니다.
펄럭!
성흔이 빛남과 동시에 튜리크의 날개가 세운을 껴안았다.
그제야 어깨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졌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 과연, 듣던 대로구나. 나와의 대면에서 고개를 빳빳이 드는 인간이라니.
포세이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성좌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위압감은 성흔과 튜리크의 힘으로 제거되었을 텐데도, 주신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육중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 건방지구나. 또한 오만해.
“나를 죽이라고 아들을 시켜 보낸 자에게 존대라도 하라는 건가?”
– 하아……. 그래, 그랬지. 트리톤, 그 멍청한 놈이 설마 흑해에 직접 강림하여 삼지창을 휘둘러댈 줄 몰랐지만 말이다.
트리톤의 얘기가 나왔지만, 포세이돈에게서 살기나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버럭 소리라도 낼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분위기에 세운도 적대감을 아주 살짝 낮추었다.
– 본론이라.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아들놈의 일은 사과하겠네. 내 자네에게 과거의 일로 어떠한 것도 문제 삼지 않겠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아닌가? 네가 해야 할 건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일일 텐데.”
“디, 디아블로 마스터…….”
분위기가 잘 흘러가는가 싶은 상황에 세운이 다시 살기를 높이자, 이에 당황한 제논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가 디아블로의 아래에 들어오겠다고 선언하고 포세이돈과의 만남을 준비하던 중, 세운에게 올림포스와의 악연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들었으니까.
이에 아주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고, 긴장하려던 찰나, 다행히도 진주조개를 통해 자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하네.
포세이돈의 목소리를 들은 제논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신탁을 통해 압도적인 위엄을 드러내던 올림포스의 성좌가 사과를 입에 담다니.
이는 결코 가벼운 상황이 아니었다.
– 올림포스의 주신 중 하나로서 사과하겠네. 이는 이미 형님과도 말을 나눈 상황이니 곧 올림포스의 의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올림포스의 주신 중 하나인 포세이돈이 형님이라 할 수 있는 이는 한 명뿐이다.
올림포스의 최고신.
신중의 신이라고도 알려진 번개와 하늘의 신, 제우스.
그 역시 세운에게 아들인 판의 목숨을 잃었음에도 이 사안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뜻이다.
“무슨 일로 생각을 바꾼 거지? 길드전 때문에 고개까지 숙여올 줄은 몰랐는데.”
형식적인 사과 정도는 생각했지만, 지금 포세이돈의 태도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의 선에서 넘어간 게 아니라 제우스에게까지 말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는 결코 길드전의 패배 정도로 설명될 게 아니었다.
“게다가 목적이나 수순이 어찌 되었든, 올림포스의 성좌 둘을 죽인 플레이어를 가만히 두기는 힘들었을 텐데.”
판과 트리톤.
올림포스에서 녀석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몰라도, 형식적으로는 엄연히 순수 신혈(神血)을 이어받은 신의 자식이다.
그것도 무려 올림포스의 주신이라 불리는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자식.
아무리 버려진 자식 취급받고 있다고 해도 올림포스의 성좌가 죽었는데 주신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못난 자식들이 잘못한 것으로 화를 낼 생각은 없다. 트리톤 녀석을 보낸 것도 복수보다는 올림포스의 입지를 위함이었으니. 물론, 녀석이 선을 넘었지만 말이다.
– 그러니 녀석의 일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 다만, 네 말이 맞긴 하지.
세운의 말을 알아들은 포세이돈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성좌의 속셈을 모두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올림포스의 외인에게 정보를 어디까지 알려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조개의 진주가 푸르게 일렁이며 사방에 물결 같은 빛을 흘려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마쳤는지 포세이돈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모이라이가 찾아왔다.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게 들려오는 포세이돈의 목소리.
제논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였지만, 세운은 그 단어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운명의 여신들?”
올림포스에서 운명을 관장하는 세 명의 여신.
노파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생명을 관장하는 실을 관리한다고 알려진 신들이었다.
– 엉덩이가 무겁기로 소문나 몇천 년 동안 처소에도 나오지도 않고, 주신이 찾아가서 청을 올려도 들은 채도 안 하던 이들이 형님을 찾아왔다.
– 장녀인 클로소가 피를 토하며 고하더군. 그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운명의 여신은 그저 운명을 관망할 뿐, 인위적으로 운명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운명의 실을 잣고, 감으며, 끊을 뿐이다.
실이 흐르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그 손에는 결코 그들의 의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 여신들이 제우스를 찾아와 자신들의 계약을 깨고 피를 토하면서까지 예언을 전했다고 한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피를 토했다는 건, 격이 무너질 것을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는 뜻일 테니…….’
운명을 관망한다는 자신들의 역할을 깨고, 자신들이 지키겠다고 맹세한 약속을 깨고, 신성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계약을 깨고 내뱉은 말.
‘그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 참 신기한 일이지.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형님을 포함한 올림포스의 열두 신이 동시에 자네를 떠올렸다.
– 그토록 소심하던 티케까지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원탁 앞에 서서 자네를 대변하더군.
아르카나의 성좌, 행운의 여신 ‘티케’.
아무래도 그녀가 이때다 싶어 세운을 대변해 준 모양이다.
– 그 즉시 회의가 열렸다네.
– 나와 형님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디오니소스가 술잔까지 엎으며 말도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 하지만, 그 순간 모이라이의 차녀, 라키시스가 피를 토하며 입을 열었다.
장녀에 이어 차녀까지.
그만큼이나 그녀들이 보았던 운명의 어느 부분이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그녀들이 보았던 게 올림포스의 멸망인지, 세계의 멸망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라키시스가 내뱉은 말은 ‘지킬 수 있습니다’ 였지.
– 라키시스가 쓰러지고, 막내인 아트로포스가 입을 열자마자 아테네를 시작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이 운명의 예언에 찬성하였다.
“무슨 말이었습니까?”
– 이번에는.
회귀 전에는 들은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회귀 전에도 그녀가 탑의 멸망을 지켜보고 신들에게 미래를 예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게 있다.
– 이번에는, 지킬 수 있습니다.
– 모이라이가 선혈을 토해 내면서까지 내뱉은 운명의 예언이었다.
이번 생에서의 운명은, 세운에게로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