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507)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507화(507/675)
제 507화
진주의 푸른 빛이 꺼져간다.
엘하임의 물관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이렇게나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지, 이런 대화는 신물인 진주조개는 물론 포세이돈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아마 지금쯤 포세이돈은 바닥을 드러내 가는 신성을 회복하고 있을 것이다.
빠직.
진주조개 역시 금이 생긴 것을 보니 한동안은 물관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이며 상태를 회복해야 할 것이고.
“방금 제가 들은 것들은…….”
제논이 말끝을 흐렸다.
그저 자신의 성좌와 세운이 화해를 나누는 자리일 줄만 알았다.
솔직히 그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자신의 성좌가, 그것도 올림포스의 주신 중 하나인 포세이돈이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고개를 숙인다니.
아무리 포세이돈이 먼저 내린 신탁으로 결정된 계약이라 해도 과분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내린 예언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 버렸다.
올림포스와 운명의 세 여신, 마지막으로 세운을 보좌하라는 포세이돈의 명까지.
하나하나가 가볍게 넘겨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못 들은 걸로 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제논의 말에 세운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제논은 이미 한배를 탄 사이가 되었다.
그가 포세이돈의 사도인 이상, 정황상 그는 더 이상 단순히 포세이돈의 말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올림포스를 대표하는 자가 되었다.
“인지하고 있어. 어차피 한배를 타게 된 사이니까.”
“……알겠습니다.”
세운 역시 생각이 많아졌다.
마음 같아서는 운명의 세 여신에게 찾아가 무슨 운명을 본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다만, 만약 그녀들을 찾아간다고 하여도 자세한 얘기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몇 마디 내뱉은 것만으로도 신혈을 뿜으며 쓰러졌으니 말이다.
운명의 신이라 하더라도, 아니, 운명의 신이기에 더더욱 운명에 관해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같다.’
운명의 여신들이 끼어든 건 예상외였지만, 올림포스와 화해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오딘과 프레이야 역시 세운에게 우호적인 상황이니, 벌써 신계의 굵직한 세력을 셋이나 아우른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라면 신마대전을 막는 것도 문제없겠지.’
상황이 잘 안 풀리면 한쪽을 도와 한쪽이라도 피해 없이 온전한 무력을 남긴 후에 아우터를 상대할 생각이었는데.
이대로라면 피를 보지 않고 신과 마, 두 곳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조금 전에 보았던 포세이돈과 세운의 대화 때문일까? 제논은 한층 더 진지해졌다.
세운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두 달 후에 등반을 시작하겠다. 그전까지, 가능한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알겠습니다.”
* * *
두 달 후에 등반을 시작하겠다는 소식은 디아블로와 청해의 길드원 모두에게 공지되었다.
그 이후, 두 길드는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어르신, 이대로 하면 되겠습니까?”
“허허, 배움이 빠르구먼. 사람 수가 늘어나니 할 일도 많아지는구나.”
“청해의 장비는 제가 맡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르침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 한배를 타게 되었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청해 거점의 대장간에서는 고창석과 청해 소속 대장장이들의 망치질이 끊이지 않았고.
“청해석은 이게 끝이야?”
“네, 이것도 저희 길드의 이름으로 힘들게 끌어모은 것들입니다.”
“흐음, 부족한데. 언니, 그쪽은 어때?”
“한참 멀었어! 경매장에 또 들러야겠어!”
“나랑 같이 가자!”
“응!”
쌍둥이 자매는 대장간을 포함하여 거주지 등에 필요한 자재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소재를 사들이고 있는지, 이 둘로 인해 경매장에 올라온 소재들의 가격이 폭등할 지경이었다.
“일중 씨, 잠시 연구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새롭게 만들어 낸 언데드가 있는데, 혼자서는 실험하기가 까다로운 터라.”
“아, 물론입니다.”
그 외에도 백현의 언데드 연구나 박정필의 정보 수집 등.
모두가 탑을 등반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엘 아브르에 들러 지식을 배우고 전투력을 키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세운 역시 마찬가지다.
–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이제야 좀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다며 팔짱을 끼고 당신을 내려봅니다.
마몬에게 신언을 배우며 대도서관 3층의 서적들을 해석하고, 대현자들과 함께 연구나 실험을 진행한다.
오후에는 새로운 경지에 익숙해지기 위해 사냥터를 돌거나 강한철 등과 대련을 진행한다.
단순한 몇 가지 루틴의 반복일 뿐이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또 하나, 새롭게 내린 결정이 있었다.
“정말 저희가 먹어도 될까요?”
“당연하지. 다른 사람들도 전부 허락했잖아.”
세운의 손에 네 병의 포션 병이 들려 있었다.
분홍빛이 감도는 포션이었는데, 내용물이 범상치 않음을 증명하듯 은은한 빛을 끊임없이 흘려대고 있었다.
‘아룬의 꽃잎으로 만든 영약.’
얼마 전에 이하늘이 제조에 성공한 영약이었다.
꽃잎에 담긴 힘을 확인하기 위해 세운이 먹은 것 하나를 빼고 남은 네 개의 꽃잎으로 만든 영약.
그것들을 복용할 대상을 드디어 선택한 것이다.
“후회하지 마라.”
“후회 안 해.”
“하하, 감사합니다. 세운 씨. 절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유서아와 강한철, 그리고 백현.
세운을 제외하고 디아블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영약을 쭈욱 들이켰다.
그러자마자 그들의 몸에 새겨진 성흔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더욱 정교한 왕관을 세공할 수 있겠다며 독니를 번들거립니다.
–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당장에라도 계약자의 힘을 확인하고 싶다며 지면을 쿵쿵 울려댑니다.
–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이걸로 마음 놓고 ‘두류의 시체 산’을 확장할 수 있겠다며 콧김을 내뿜습니다.
영약을 섭취한 이들이 눈을 감고 각자 편한 자세를 취했다.
유서아는 무릎을 꿇으며 단정하게 앉았고, 강한철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꼈다.
백현은 잠시 일렁이는 기운을 느끼더니, 이내 눈을 뜨고서는 체내에 들어온 기운을 느끼며 그 기운을 이끌었다.
마치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연구, 실험하듯이.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영약을 건네받은 여인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 제가 마셔도 되겠어요?”
“마시라니까.”
“정말, 정말요? 늑대 씨, 아직 저 안 믿는 거 아니었어요?”
아르카나의 목소리가 세운을 간지럽히는 듯했다.
물론, 세운 역시 최근까지 이에 대해 걱정했다.
그녀가 세운을 따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충성이나 소속감이 아닌 호기심 때문이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렸으니까.
흥미가 떨어지면 언제 어디서든 등을 돌리고 떠날 사람에게 아룬의 꽃잎으로 만든 영약을 건네줄 수는 없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티케가 올림포스에서 내 편을 들어줬다.”
“어머, 우리 무능한 여신님이요?”
“그리고 너를 잘 부탁한다고까지 했지.”
“우리 여신님, 최근에는 하는 것도 없어서 늑대 씨 쪽 마왕한테 갈아탈까 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요~”
듣고 있자니 성좌들에게 큰 호감이 없는 세운도 티케가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뭐가 좋다고 아르카나를 위해 손을 들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저렇게 막말을 들어가면서까지 말이다.
어쩌면, 과거에 계기가 될만한 사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꿀꺽.
“향기가 제법 좋은데요?”
세운의 머리가 복잡해질 찰나, 그녀가 영약을 들이켰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성좌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성흔으로 영약의 힘이 스며들어 간다.
마치 세운처럼 말이다.
* * *
“이보게, 적의 대현자! 그러지 말고 이번 실험까지만 같이하세. 이 실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자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제발 마지막 초식만 좀 봐주시오. 이제야 검결의 끝에 다다랐는데, 그대가 이렇게 떠나시면 나는 어쩌나.”
“필요한 거 없나? 뭐든 줄 테니 이것까지만!”
“부디!”
네 명의 대현자가 세운의 팔다리를 한쪽씩 붙잡고 매달렸다.
그중에서는 세운을 가장 먼저 초대했었던 청의 대현자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크흠, 그러게 말일세.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게.”
“연구 지원금이 부족한 거라면 우리가 어떻게 해 볼 터이니…….”
세운을 붙잡는 건 당장 매달려 있는 대현자들만이 아니었다.
체면을 지키느라 매달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열 명이 넘는 대현자들이 세운을 졸졸 따라오며 설득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게 다 세운이 엘 아브르를 떠나 등반을 시작하겠다고 하자마자 일어난 반응들이었다.
그전에도 세운을 붙잡는 건 같았지만, 당일이 되자 대현자들의 반응이 더욱 격해졌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목적은 탑을 오르는 것입니다.”
“아니, 거 좀 미룰 수도 있지!”
“이번 연구가 끝나면 등반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암, 그렇고말고!”
“벽력뇌화탄! 기억하지 않나! 박정필인가, 그놈도 제조법을 배워갔다네. 이번 연구도 자네 길드의 전투력 강화의 핵심이 될 것이네!”
대현자들이 가까운 예를 들며 세운을 붙잡았지만, 세운의 발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어느새 엘 아브르의 출구 계단의 끝에 다다른 세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사지에 달라붙은 대현자들을 떼어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아아, 사람이 뭐 그리 급한가.”
“조금만 더 있다 가면…….”
“대현자님들에게 필요한 건 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대현자님들에게 필요한 건 바깥입니다.”
엘 아브르의 대현자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여 있었다. 엘 아브르라는 깊고 넓은 우물에 만족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제아무리 넓은 우물이라 하여도, 우물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결국 썩게 마련이다.
세운이 보기에는 지금의 대현자들이 딱 그런 꼴이었다.
“막혔다고 생각된다면, 저를 찾기보다는 바깥으로 나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세운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엘 아브르의 출구를 활짝 열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대현자인 만큼, 그들은 세운의 말을 가볍게 넘겨듣지 않았다.
“바깥이라…….”
청의 대현자의 중얼거림에, 다른 대현자들 역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음 목표는 탑의 아홉 번째 쉼터. 검은 대지, 플라카였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71층부터 80층까지의 시련을 아우르고 있는 장소.
통칭, 마계(魔界)라 불리는 곳을 통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