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548)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548화(548/675)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알 수 없었다. 세운이 느낄 수 있는 거라고는 드문드문 공격해 오는 몬스터로 인한 통증과 사다리의 뭉툭한 형체뿐이었으니까.
통증을 제외한 감각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사다리는 끝날 생각을 안 한다.
평소에는 귀찮아하던 마신들의 메시지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뒤.’
–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서걱.
통증이 느껴지기도 전에 휘두른 검에서 미약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심연을 타고 내려가며 수많은 몬스터의 기습을 받다 보니 세운의 육감은 놀랍도록 발달해 있었다.
이제는 몬스터의 공격에 당하기도 전에 그 기척을 인지할 지경.
물론, 그게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하나.
세운이 몬스터를 쓰러트리며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이 몬스터들 전부가 소용돌이로 빨려든 놈들이다.’
아비지옥에 들어오기 전에 떠올랐던 메시지.
[ 활성화된 아비지옥의 입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아비지옥의 도전자를 괴롭힙니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조금 애매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 소용돌이를 통해 들어온 몬스터가 세운을 공격하고 있었다.
다만, 여기에는 또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소용돌이의 규모나 위력을 보았을 때, 못해도 지금의 수십 배는 많은 몬스터가 세운을 공격해 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몬스터의 공격은 무척이나 뜸한 편이었다.
‘다들 도망치지 않은 건가.’
세운은 그게 디아블로 길드의 노력일 거라 확신했다.
분명 던전에 진입하기 전, 해리에게 길드원을 데리고 섬으로 돌아가 있으려고 말해 두었는데.
그들은 세운의 지시를 어기고 소용돌이의 주변에 남아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길드장의 명령을 어기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 더더욱 포기할 수 없지.’
세운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지쳐가던 몸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더욱 빠르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
기계적으로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지만, 손바닥의 감각마저 미약하여 사다리를 제대로 잡고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전의 내공이 바닥나고, 몸을 보조하기 위해 사용하던 서클의 마나마저 다 떨어져 간다.
그렇다고 휴식을 위해 잠시 사다리에 몸을 고정하고 움직임을 멈추려 하면.
사아아아-
아비지옥의 악풍이 세운을 덮쳐왔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내공의 회복은커녕 쉴수록 손이 더욱 떨려온다.
저 악풍은 단순히 수분을 건조시키는 바람이 아니라 닿은 생명체의 힘을 건조시키는 바람이었다.
필파라침(必波羅鍼).
언젠가 서적에서 보았던 악풍의 이름을 떠올리며, 세운이 다시 팔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몬스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아…….”
디아블로 길드도 지치기 시작한 걸까?
몬스터의 수가 많아진 것이 체감되었다.
‘하긴,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세운이 고생하는 만큼, 위에서도 오랜 난전이 지속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 감각이 들지 않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최소한 하루는 지났을 거다.
솔직히 체감상으로는 하루가 아니라 보름의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지만 말이다.
서걱!
무공을 사용할 힘도 없었다.
탈진되어 축 늘어진 근육을 억지로 끌어당겨 검을 휘두르는 게 고작이다.
간신히 몬스터 하나를 벤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이게 맞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아비지옥의 공략법이 틀린 게 아닐까?
사다리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공략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여정의 지침표가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의 결정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아냐, 맞다.’
세운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살갗이 터졌음에도 피가 제대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아비지옥의 악풍이 세운의 혈액마저 말려 버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의심하면 안 된다.’
스스로의 결정을 믿었다.
위에서 자신을 믿고 싸우고 있을 디아블로 길드원을 믿었다.
“그오…….”
“그오오…….”
더 이상 검을 휘두를 힘도, 마법을 사용할 마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운은 전신을 뒤덮는 끔찍한 통증을 견디며 묵묵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럴수록 커다란 무력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쿵!
세운이 사다리에 머리를 찧었다.
힘이 빠져 그런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무력감을 떨쳐내기 위하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통증’을 사용한 것이다.
아마,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겠지만 액체가 흐르는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으니, 세운은 계속해서 묵묵히 사다리를 내려갔다.
아비지옥(阿鼻地獄).
이곳은 세운이 경험해 온 그 어떤 팔열지옥보다도 지옥 같은 곳이었다.
“하아, 하아…….”
입을 벌리고 숨을 쉬면 안 된다.
이동할 때는 악풍이 미약해진다고는 해도, 입을 벌리는 순간 체내의 수분이 전부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세운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못 쓰러져.”
세운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아우터를 쓰러트리고, 탑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 이게 세운의 소망이 맞았던가?
세운은 구세주가 아니다.
세운은 영웅이 아니다.
누구보다 높은 곳까지 탑을 올랐지만, 거기에 탑을 구하겠다는 목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운은 언제부터 이런 목표를 떠올리고 있었을까? 아니, 이게 세운의 목표는 맞았던가?
자신은 분명, 그런 대의(大義) 따위가 아니라 조금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기적인 무언가를…….
턱.
“하아, 하아…….”
세운의 발이 지면에 닿았다.
사다리가 아니었다.
지면.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길고 긴 사다리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하지만, 아비지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심연의 끝에 다다른 죄인이여.”
사방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여섯 명의 야차가 뜨겁게 달구어진 창을 들고 세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다리밖에 존재하지 않던 하늘에서는 검은 쇠로 만들어진 매들이 세운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운은 이미 뒤랑달을 움켜쥘 힘마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운은 가까스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루인.”
성흔이 빛났다.
세운의 앞으로 검붉게 일렁거리는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상 세계에 불림 당한 이후로 세운의 부름에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던 루인이 나타나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 ……불렀나.
도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인은 세운을 완벽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약해진 상태에서 루인이 여전히 세운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심상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운을 집어삼키려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세운은 담담하게 루인의 코 위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부탁한다.”
털썩.
그 명령을 끝으로 세운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 * *
철컥.
세운의 귓가로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만, 그 소리가 조금 이상하다.
닳고, 부서지고, 녹이 슬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톱니바퀴를 누군가 억지로 돌리고 있는 것처럼 쇠 긁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이곳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공간.
녹슨 톱니바퀴의 한중간에 세운에게도 익숙한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여정의 지침표.”
회귀 전, 세운의 유일한 힘이자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었던 고유 스킬.
회귀 전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운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영원의 동반자.
세운이 가까이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올리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의 톱니바퀴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큭!”
세운은 감당키 어려운 두통을 느꼈다.
물리적인 통증이 아닌, 정신적인 통증으로 인해 눈앞이 아득해졌다.
– 오랜만입니다.
– 현시점에 대한 분석을 시작합니다.
– 시기 X_6.
– 분기 R_87.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오는 듯했다.
– 정도와의 유사성 95.1%.
– 정도에 어긋나는 변수 72.9%.
– 예상 가능성 29.9%.
그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머리가 아파져 왔지만, 그와 반대로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일 텐데, 세운은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 영혼의 어긋남 81.3%.
– 위험 가능성 높음.
– 응급처치를 시도합니다.
드르르륵!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방의 톱니바퀴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직.
멀쩡하지 않은 톱니바퀴를 저렇게 움직여대는데 장치가 성할 리가 없었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녹슨 톱니바퀴가 일그러지고, 위태롭던 톱니바퀴에 더욱 큰 균열이 새겨졌다.
심지어 몇몇 톱니바퀴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까지 했다.
– 영혼의 어긋남 49.9%.
– 현재로서 최대 안정 수치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와 반대로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 익숙함 때문에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질문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세운은 복잡한 머릿속에서 수많은 질문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너는…… 누구지?”
대체 누구의 목소리이기에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세운이 질문하는 순간, 사방에서 들려오던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멈췄다.
잠깐의 정적.
곧이어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 회상으로 인한 변수 가능성 71.0%.
– 대답할 수 없습니다.
–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해당 장면을 묻어 두겠습니다.
스스슷-
그 대답과 함께, 톱니바퀴로 가득했던 방 안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세운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고, 모든 톱니바퀴가 사라진 곳에는 여정의 지침표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 정세운 플레이어.
–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운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크윽…….”
세운이 몸을 일으켰다.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에 눈을 뜨니, 잔혹하게 헤집어진 야차들의 시체가 보였다.
사라졌던 감각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세운이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세운은 여전히 심연의 밑바닥이었다.
“루인, 고맙다.”
우웅-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세운을 인정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루인은 세운을 공격하는 대신 쓰러지기 직전에 남긴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비지옥의 끝에 존재하는 열여섯 마리의 야차를 상대하면서 말이다.
[ 히든 던전, ‘아비지옥(阿鼻地獄)’을 완벽하게 공략하였습니다. ] [ 보상으로 개인 공적치가 10,000,000point 상승합니다. ] [ ‘찢어진 분노의 경전(8)’을 획득하였습니다. ]열여섯 마리의 야차가 아비지옥의 마지막 관문이었는지, 던전 공략 메시지가 나타났다.
앞선 팔열지옥에 10배에 해당하는 공적치와 함께 찢어진 경전이 나타났다.
‘이게, 마지막 경전.’
곧이어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던 일곱 개의 경전이 덩달아 튀어 나오더니 조각조각 이어져 완벽한 하나의 경전이 되었다.
경전을 통해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
분노의 신성이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 찢어진 분노의 경전이 모두 모였습니다.
– 분노의 경전이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찾아갑니다.
쿠구구구-
시꺼먼 아비지옥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경전의 주위로 거대한 신전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이 세운의 목표였던 분노의 신전.
– 분노의 신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세운이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한 마지막 칠대 마신.
분노의 마신, 사탄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제 54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