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632)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632화(632/675)
회귀 전, 세운은 91층에 도착하여 저 수많은 적을 마주하는 순간.
‘도망쳤지.’
바닥의 갈라진 틈을 이용해 몸을 숨겼다.
조금만 삐끗해도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졌겠지만, 모험가로 활약하던 당시의 세운에게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승산이 있었다.
그리고 여정의 지침표를 사용해 적들을 피해 끝없이 이동했다.
도중에 여러 사연이 있었지만, 모두 제쳐 두고 그 마지막에 ‘계약’이란 것을 발견했다.
‘계약이라 해도 일단은 보물의 형태에 가까웠지만.’
계약에는 수많은 글귀가 쓰여 있었지만,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쓰인 것이 이 갈등의 이유라는 것을.
그 증거로 계약을 꺼내 들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대지의 적들이 모두 미친 듯이 세운을 노려왔다.
여정의 지침표가 아니었다면 기껏 단서를 찾아 놓고 그대로 죽을 뻔했었다.
‘공략법이 그거 하나는 아니겠지.’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든, 그림자에 숨어 무언가를 찾아내든, 지식을 통해 해결법을 구상하든.
그 어떤 플레이어든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하여 시련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카샬락카스의 경우도 힘을 조금만 더 잘 이용했으면 다른 방식으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예를 들자면, 그 힘으로 조금만 더 깊숙이 파고들어 ‘계약’을 부수는 식으로 말이다.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얼른 방법을 내놓아라.”
“뭔가 착각하나 본데.”
“뭐라?”
“나는 애초에 시련을 공략법을 알려 준다고 한 적이 없다.”
“이 몸을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따라오는 건 너겠지.”
뭔가 기대하고 있었나 본데, 세운은 그녀에게 공략법이나 알려 주자고 같이 올라온 게 아니다.
애초에 그녀의 도움이 없더라도 시련은 통과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만약 멱살을 잡고 이끌어 등반을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그녀가 아니라 디아블로 길드를 도와주었으리라.
“용신이 되겠다면서 내 뒤나 졸졸 따라올 생각은 아니었겠지?”
“이놈이!”
“용신이 되겠다면, 네 힘으로 돼라.”
진심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남의 도움을 받아 탑을 등반한다면 정상에 오른다고 해도 결국은 원하는 바를 이를 수 없다.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올라야만 한다.
뭐, 그래도 그녀가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힌트를 주었으니, 약간의 도움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다.
“힌트를 주자면, 힘은 충분할 테니 조금만 머리를 식혀라.”
“무슨 소리냐!”
“흥분하지 말고 조금만 더 차분하게 머리를 굴리면 찾을 수 있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세운이 바다 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오오오오오!!”
방금 흥분하지 말라는 조언을 내뱉었는데, 뒤쪽에서 광분한 카샬락카스의 포효가 들려왔다.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다잡고 있는 건지 다짜고짜 세운의 등 뒤로 브레스를 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계약을 찾긴 할 텐데.’
세운이 전방의 적들을 살펴보았다.
물고기, 상어, 고래, 오징어, 문어 등, 다양한 형태를 한 몬스터들이 심해에서부터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방에는 미끄럽게 생긴 물고기들이 무언가를 내뱉으며 땅을 갯벌처럼 질척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해양 생물들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라면 마법이 적당했겠지.’
주변을 이용하여 물이나 번개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면 금방 정리될 거다.
다만, 이번 기회에 시련을 오르기 직전에 받은 새로운 열쇠의 힘을 확인하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인 세운이 곧바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아르스 게티아.”
철컥-
열쇠가 돌아가고, 세운의 뒤로 끝없는 심연이 펼쳐졌다.
세운의 호출을 허락한 마왕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세운이 지금까지 열쇠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직접 나왔던 마왕들이 돌아가 소문을 내며 상황이 달라졌다.
샤이넬에 머무는 동안, 꽤 많은 수의 마왕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부를 마왕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응답하라, 욕조의 공작.”
심연이 꿈틀거리며 그 색이 푸르게 물들어 갔다.
마치 심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검푸른 구멍 안에서, 은발에 호박색의 고양이 눈을 가진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런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불러내다니, 센스 있는데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기 어려운 중 중성적인 목소리.
윤곽밖에 보이지 않아 생김새를 알 순 없었지만 꽤나 아름다운 형태의 마왕인 것 같았다.
“서열 49위의 마왕, 크로셀.”
보통 서열이 높은 악마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세운의 호출을 거절하는 편이었는데, 처음으로 50위권 내의 마왕이 호출을 받아주었다.
바다라는 환경 때문일까? 탑에 나타나자마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그의 힘을 빌려야 하는 세운에게는 긍정적인 일이었다.
“크로셀.”
– 힘을 빌려주면 되는 거죠?
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열쇠, 아르스 포울리나를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스아아아-
심연에서 진득한 습기가 흘러나왔다.
습기는 세운의 의지에 따라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는 적들을 둘러쌌고.
– 추위는 좀 익숙하니?
까드드득!
바다를 얼리기 시작했다.
“바다가 얼고 있다!”
“바, 바다는 얼지 않는다!”
“하지만 얼고 있다!”
“어째서!”
“바다가 어째서!”
거침없이 돌진하던 적들이 모두 다리를 멈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다에 닿아 있는 다리가 얼어붙었다.
냉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리를 타고 올라와 상체를 얼리더니, 이윽고 머리까지 들이닥치며 생명을 위협해갔다.
그때.
“무오오오오!”
저 먼바다에서 딱딱하게 얼은 표면을 깨고 몬스터 하나가 튀어나왔다.
몸의 1/3이 입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괴한 모습.
크로셀이 만들어 내는 냉기를 가뿐히 무시한 채, 파쇄선처럼 언 바다를 깨부수며 앞으로 돌진했다.
– 넌 추위에 익숙한가 보구나?
“무오오오!”
녀석은 크로셀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울부짖더니 꼬리를 내려쳐 얼음 조각을 날려댔다.
하지만, 얼음이 세운에게까지 날아드는 일은 없었다.
– 그럼, 더위는 어떠니?
치이이익!
세운에게 날아들던 얼음이 하얀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바다 역시 크로셀의 손짓에 따라 금세 녹아내리더니 이니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다.
“끄아아아악!”
“뜨거워어어!”
“사, 살려! 살려 줘!”
“크아악!”
욕조의 공작, 크로셀.
그는 물과 관련된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물의 온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힘이 특히나 위협적이었다.
특히나 저렇게 바다에서 살아가는 존재에게는 더더욱.
“무오오오옥!”
덕분에 큰 입을 벌리며 달려오던 몬스터 역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살이 노릇노릇 익어 가며 고소한 냄새까지 풍겨댄다.
– 성좌, ‘배고픈 왕자’가 침을 줄줄 흘려댑니다.
이 바다가 통째로 거대한 스튜가 된 셈이었다.
– 저렇게 아름다운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니, 아쉽네요.
크로셀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주술의 서로 발현할 수 있는 힘이 끝났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실제로 세운의 손에 들려 있던 열쇠는 주술의 서 특유의 푸른 빛을 대부분 잃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운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 번째 장, 제단의 서를 얻었습니다.”
– 제단의 서라면…… 아!
열쇠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갔다.
천사에게 받은 투박한 생김새의 열쇠.
“제단의 서, 아르스 알마델 살로모니스.”
– 아하하하! 제단의 서를 얻었다구요? 대단하네요, 정말. 사양할 것 없죠!
크로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아졌다.
심연 속으로 보이는 윤곽만 보아도 그녀가 화색을 띠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허락이 떨어진 이상,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세운이 곧바로 열쇠를 돌렸고, 그 순간.
– 아하하하!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닷냄새인지요!
심연에 잠겨 있던 크로셀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흐릿했던 은발의 머리칼이 아름답게 찰랑거렸다.
그렇다고 하여도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다. 반투명한 몸은 그가 완벽하게 구현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 내 생에 제단의 서를 이렇게 찬양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반투명하던 크로셀의 몸이 세운과 겹쳐졌다.
제단의 서, 아르스 알마델 살로모니스.
그 힘은 바로 마왕의 힘을 사용자의 몸에 강림시키는 것이었다.
이전에 세운이 레비아탄이나 베엘제붑의 힘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스아아앗-
세운의 몸에서 끈적한 습기가 한없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카락은 크로셀을 닮아 은색으로 물들었고, 눈 역시 호박색의 고양이 눈으로 변하였다.
– 아아, 이 공기! 이 향기! 이 소리! 너무나도 오랜만이에요!
세운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사방에 퍼져 있던 습기가 한데 뭉쳐 단단하게 굳어졌다.
시퍼런 얼음 칼날.
절대 녹지 않으며 베어 낸 모든 것에게 최악의 동상을 일으켜 살을 검게 물들이다가 썩어 떨어지게 만든다는 크로셀 고유의 권능이었다.
“가겠습니다.”
– 얼른 나아가요! 저 푸른 바다로!
세운이 날개를 접고 빠르게 아래로 추락하였다.
전신에 크로셀의 힘이 가득하다.
그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어떻게 뿜어내야 하는지, 그 모든 지식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겠지만, 탐욕의 권능을 사용하며 이와 비슷한 일을 매번 겪어온 세운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풍덩!
세운의 몸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바다로 빠져들었다.
이 온도 역시 크로셀이 조절하고 있었던 만큼, 크로셀의 힘이 스며든 세운에게는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끄어어어어!”
“우웅…….”
“키릭?”
위에서 봤을 때는 이미 모든 적을 쓰러트린 줄 알았는데, 바다 아래에는 아직도 수많은 적이 남아 있었다.
표면 온도는 극심히 높아졌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권능이 닿지 못해 온도 변화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 아하하하! 너무 좋아요! 얼른, 얼른!
“츄르르르.”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촉수를 내뻗으며 세운에게 다가왔다.
세운은 무신경하게 오른팔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바닷물을 가르더니.
서걱-
문어의 몸 중앙에 긴 빗금을 남겼다.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춘 문어.
이내 빗금을 중심으로 ‘까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붉은 피부가 검게 물들어 갔다.
– 오염시키고 싶어!
크로셀의 힘이 빙의된 이상 그 어떤 적도 세운의 앞길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이내 그의 힘으로 해류까지 움직여 세운의 등을 밀어주었고, 세운은 망설임 없이 ‘계약’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제 63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