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648)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648화(648/675)
96층의 근원이었던 운석이 올라가 있던 산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운과 하멜의 격렬한 전투 끝에 평지화하기는커녕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 자리 위.
먼지가 걷히자, 어느새 검을 집어넣은 둘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만족합니까?”
“어, 만족. 샤이넬을 떠난 이후로 검을 맞댈 상대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간만에 무척이나 재밌었어.”
처음에는 그저 적당히 받아 줘야겠다고만 생각했다.
프랜시스 하멜. 검제라 불리는 사람과 제대로 싸울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혹여나 싸웠다가 적이 된다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그에게 힘을 쏟으면 다음 시련의 공략 속도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운은 그와의 싸움 도중에 저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깨달음.
하멜과의 전투는 단순한 싸움을 넘어 세운에게 크나큰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지금까지 마몬의 보구에 의존하던 세운에게 자신만의 세상을 안겨 주었다.
“감사합니다.”
“뭘, 선배의 조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도 네 덕분에 깨달은 게 있거든.”
“깨달은 거라면?”
“탑에 아직 너 같은 상대가 있다는 거. 탑을 오르는 데에도 흥미가 생겼고 말이야.”
멸흑신무(滅黑神武).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무공의 묘리를 융합하여 만들어 낸 무공.
그 모든 묘리를 모아, 오로지 아우터와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
세운이 직접 만들어 낸 만큼, 이 무공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세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 아우터의 습격 때 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면, 혼자서도 녀석들을 밀어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우터에 대해서는 들었습니까?”
“저 용한테 대충 들었어. 탑을 무너트리려고 한다며? 직접 싸워 보니까 알겠더라.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 힘이 부족하다는걸.”
검제라 불리는 이가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깨달았다니.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가 플레이어 중에 가장 강하다고 하여도, 결국에는 인간.
신마저도 상대하지 못하고 탑의 멸망을 막지 못했던 아우터를 상대로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적절하게 운석이 있었고, 세운의 조언 덕분에 운석으로 만든 검을 휘둘러 아우터를 잡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탑을 오르려고.”
회귀 전, 세운은 회귀를 할 때까지 하멜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지만, 끝까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마음먹고 탑을 오르려 한다니.
그도 아우터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았으니, 아군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검제가 아군이라니.
카샬락카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든든했다.
“아, 그리고 아까부터 너한테 냄새가 나는데.”
“냄새?”
“뭐 가지고 있는 거 없냐? 신화경에 오르면 이 촉이란 게 있단 말이야. 촉이.”
“검제가 마음에 들 만한 거라면…… 무기 말입니까?”
“됐어, 난 무기에 집착하는 편이 아니거든. 드는 것마다 부서져서 이제는 나무작대기로도 만족해. 그거 말고 다른 거.”
“다른 거?”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마음에 들 만한 거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운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음에 들 만한 거는 아니지만, 프랜시스 하멜을 생각하며 준비한 게 하나 있기는 하였다.
“설마, 이걸 말하는 겁니까?”
세운이 꺼내 든 건 당근 케이크였다.
이전에 얼음 성의 성주로서 남아 있던 하멜의 잔재가 말했던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
혹시나 싶어 샤이넬을 떠나기 전에 김미정에게 부탁하여 가지고 있었다.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었기에 식거나 상할 걱정도 없었다.
분명, 과거의 하멜은 당근 케이크를 가장 싫어한다고 하였지만.
“오오! 역시 내 촉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이게 얼마만의 당근 케이크냐!”
지금의 하멜은 달랐다.
세운의 손에 올려진 당근 케이크를 그대로 가져가 한 입 베어 먹는 그.
그 표정은 아무리 보아도 황홀함 그 자체였다.
“당근 케이크…… 가장 싫어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이건 어떻게 준비해 왔고? 혹시 너도 당근 케이크 좋아하냐?”
“얼음 성에 도전했습니다.”
“아, 맞아. 거기 내 잔재를 떨어트려 놓았었지? 그놈이 말해 준 거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싫어하긴 했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당근 케이크를 접한 게 탑에 들어온 이후거든. 처음에는 질색했는데, 탑을 오를수록 계속 생각나더라고?”
하멜이 당근 케이크를 허겁지겁 베어 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래서 경매장에서 재료 사서 쉼터에서 요리사 찾아다니며 만들어 먹다가, 시련에 박혀 있게 되고 나서부터는 벽곡단 밖에 못 먹었지. 그때 가장 생각나는 게 바로 이거였어.”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다행이다.
“이거, 나 주는 거지?”
“식량은 널널한 터라.”
“고마워. 신화경에 접어든 선배로서 도움도 줬는데 이 정도는 공짜로 받아도 되잖아, 그치?”
당근 케이크를 반쯤 베어 먹은 그거 아공간 주머니로 보이는 곳에 남은 케이크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가 볼까!”
“진짜 탑을 오를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무엇보다, 너랑 한 번 더 붙으려면…… 나도 별에 도달해야 하지 않겠어?”
의도치 않게 새로운 등반 동료가 생겨난 순간이었다.
* * *
96층을 떠난 직후, 세운은 여태까지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시련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 97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 주제 : 노화
97층.
시간이 지날수록 힘은 약해지고, 주변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곳.
이번에도 역시 시련의 시작은 아르스 게티아로 열었다.
철컥-
97층에서의 전투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더욱 많은 마왕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에 세운이 선택한 마왕이 바로.
“응답하라, 눈먼 노인.”
성좌, 눈먼 노인.
그 초라한 이름과는 달리, 마왕 중에서도 순위권에 들 정도의 최강자 중 하나.
“서열 3위의 마왕, 바사고.”
예언의 귀공자라고도 불리는 대마왕, 바사고였다.
– 흘흘, 반갑네. 계약자여.
21위의 마왕, 모락스를 불러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엄청난 힘이 느껴졌는데, 3위의 마왕이라면 어떨까?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주변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그 가공할 만한 힘에 카샬락카스가 경계하며 뒤로 멀어졌고, 하멜은 그와는 반대로 가까이 다가오며 관심을 드러냈다.
– 내 직접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만, 아랫것들이 그리도 추태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네. 마왕의 이름에 먹칠을 할 줄이야.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세운이 최근에 불러들인 마왕 중에서 임무에 실패한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모락스.
그의 잘못이라고는 하기 애매하지만, 애초에 그에게 부탁한 목적이었던 운석을 파괴하는 데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니까.
– 성좌, ‘눈물의 군주’가 항변합니다.
– 성좌, ‘눈물의 군주’가 그것은 자신이 실패한 게 아니라, 저 인간이 착각하여 자신을 돌려보낸 것뿐이라 설명합니다.
– 변명, 변명. 아랫것의 추태는 내가 사과하지. 대신, 내 직접 자네를 도와주겠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던 모락스가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바사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72마왕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정치 싸움이 아닐까 싶었다.
뭐, 어찌 됐든 세운이 알 바는 아니다.
세운이 필요한 건 단 하나.
“부탁드립니다.”
– 그래, 그래.
97층을 공략하는 것뿐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바사고가 주변에 어둠을 널리 퍼트렸다.
세 번째 열쇠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심연의 바깥으로 자연스레 힘을 다루다니, 과연 서열 3위의 마왕다웠다.
– 흘흘, 기묘한 곳이로군. 시간의 축이 난잡하게 뒤섞여 있어. 내 예언이 수시로 뒤집힐 지경이야.
예언의 귀공자라 불리는 마왕답게 그의 예언이 시작되었다.
아르스 게티아만 사용한 상태에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서열 3위의 마왕답게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땅을 파라.
“……땅을?”
– 여러 길이 있지만, 너는 가장 가까운 길을 원하지 않느냐? 땅을 파거라. 그리하면 죽지 못함에도 죽어 가는 노인이 있을 것이로다.
스톨라스 때와 비슷하게 모호한 예언. 하지만, 스톨라스에 비하면 무척이나 직관적인 예언이었다.
어렵게 이해할 필요 없이 그의 말에 따라 땅을 파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감사합니다.”
– 흘흘, 간만에 바깥 공기도 마시고 좋았다. 혹여나 또 도움이 필요하다면 ‘감청색’을 따라라. 다른 것들보다는 도움이 될 터이니.
“초록빛이라면.”
– 그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없으니.
사라져 가는 바사고의 윤곽.
그가 말한 감청색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짜 정치 관계라도 있는 건가.’
칠대 마신은 전부 각자를 상징하는 색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감청색이라고 하면 분명 나태의 마신, 벨페고르.
아무래도 바사고는 벨페고르의 라인인 듯하고, 앞으로도 벨페고르 라인의 마왕들을 자주 불러 주라는 뜻이겠지.
갑자기 정치 관계에 엮인 기분이라 기분이 오묘했지만, 세운은 고개를 저으며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대화는 들었겠지?”
“크흥, 바로 시작하겠다!”
“땅파기라, 신박한데?”
97층에 들어서자마자 땅파기라니.
세운을 처음 접하는 이는 무슨 헛소리냐며 믿지도 않았겠지만, 카샬락카스와 하멜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카샬락카스였다.
그녀는 마법까지 일으켜 육체를 강화하더니, 드래곤 특유의 거대한 덩치와 단단한 발톱으로 포크레인처럼 흙을 파대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
그녀의 단순무식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업이었다.
반면에.
“하멜류 제3식.”
옆의 하멜은 검을 꺼내 바닥에 박아 넣더니 천천히 팔을 움직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며 검을 수직으로 올려 베니.
“끌어올려 베기.”
촤아아악!
그의 전방의 대지가 검 끝을 따라 끌어 올라가 하늘을 뒤덮었다.
단순한 올려 베기로 보이는 검술인데, 그로 인한 결과는 마법이라 해도 믿길 정도였다.
그렇게 둘이 땅을 파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운은 땅을 파는 대신 마나 서클을 회전하였다.
– 흑탑의 묘리에 따라 ‘디스페어 오브 윈드’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휘이이익!
뿜어져 나오는 바람.
공격용이 아니었기에 살상력을 최대한 줄인 채, 카샬락카스와 하멜을 향해 바람을 움직였다.
바람에 닿았음에도 둘의 옷자락 하나 펄럭이지 않을 정도로 세심한 마나 컨트롤.
바람은 둘이 퍼 나른 흙을 바깥으로 흩어 주고, 흙에 바람을 불어넣어 더욱 부드럽게 해 주었다.
“이야, 좋은데? 웨폰 마스터가 아니라 올 마스터(All master)라고 해야겠어.”
“크오오오오!!”
세 명이 힘을 합치니 바닥이 순식간에 꺼져 나갔다.
97층에 뜬금없이 생겨나기 시작한 구멍.
그럴수록 노화의 힘이 작용하여 셋의 힘을 약화했지만, 셋은 힘이 약화되기 전에 끝장을 보려는 듯이 신명 나게 땅을 파헤쳤다.
소음을 듣고 찾아온 몬스터들이 구멍 아래로 떨어졌지만.
“크아-켁!”
“쉬이이-잌!”
세운의 바람 마법이나 카샬락카스의 손톱, 하멜의 검무에 휩쓸려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워낙 순식간에 찢어 발겨진 터라 본래 어떻게 생긴 몬스터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물론, 셋 다 몬스터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제 64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