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675)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675화 (완결)(675/675)
추르륵-
머리를 꿰뚫린 폐왕의 신형이 무너져 내린다.
남은 신성을 전부 파멸의 힘으로 치환하여 폐왕을 완전히 불태웠다.
살점 한 조각도, 가루조차 남지 않도록 확실히 불태운 세운이 폐왕을 뚫고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을 잡은 채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말…… 끝이다.”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나태의 권능이 시간을 다한 탓일까?
아니다.
신좌에 오르고 신성이 높아진 덕분에 나태의 권능이 끝나더라도 이전과 같은 극심한 후유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심지어 이번에는 나태의 권능을 사용하고 힘을 별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뭐랄까.
“정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본래의 세운이었어도 그랬을 텐데, 지금은 여태껏 거쳐 왔던 수많은 회귀의 기억까지 돌아온 상태.
그 모든 노력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았다.
약간의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철컥.
세운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갈무리하는 사이, 사라진 폐왕 너머에서 힘겹게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보였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오직 폐왕을 막을 생각만으로 들어왔기에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세운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내부가 밝아졌다.
그리고, 세운은 이 공간이 익숙했던 이유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마키나.”
아무도 모르는 탑의 지하에 위치한 공간.
탑을 관리하고, 신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을 담당하고 있는 이곳은 바로 세운이 톱니바퀴를 만졌을 때 이동 당한 그 방이었다.
즉, 세운이 회귀 전에 따랐던 성좌의 방이었다.
……철컥.
방의 상태는 세운이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벽을 이루는 수많은 장치가 전부 멈춰 있었다.
움직이고 있는 건 오직 하나.
방의 중앙에 놓여 있는 톱니바퀴뿐이었다.
“마키나.”
세운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톱니바퀴 앞에 섰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세운은 여전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톱니바퀴를 어루만졌다.
– ……정세운 플레이어님.
그제야 그녀의 흐릿한 잔상이 톱니바퀴 위로 떠 올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회귀 전, 세운의 성좌이자 탑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아니, 시스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자.
세운이 고유 스킬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여정의 지침표 역시 마키나의 손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권능이었다.
“고생 많았다.”
세운이 지금까지 지나쳐 온 회귀.
그곳에서 고생한 건 세운만이 아니었다.
회귀를 거칠 때마다 그녀는 힘을 잃어가고,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갔다.
그 증거가 바로 이 방이다.
돌아온 기억에서 가장 처음 보았던 이 방은 아름다운 톱니바퀴와 그것들이 작동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마키나는 세운을 걱정해 주었다.
이미 몸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 흐릿한 잔상만이 남았으면서 말이다.
“성공했다. 마키나.”
세운은 신을 증오했다.
판에게 농락당하고, 신들의 유흥에 피해를 입으며 신 따위는 믿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며 생긴 부작용에 가까웠다.
세운은 그녀를 통해 깨달았다.
신이 모두 나쁜 게 아니라고.
사람 중에서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신도 그럴 뿐이라고.
선신과 악신의 차이가 아니라, 그저 신마다의 성격이 다를 뿐이라고.
–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 그녀의 계획을 들었을 때, 이제 막 탑에 들어왔을 뿐이었던 세운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탑이 아우터를 가두고,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것들을 물리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니.
이를 누가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세운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남 일인 것처럼 탑을 오르다…… 아우터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 저 때문에 그 모든 고난을 뚫고 여기까지 도달하시다니…….
그 이후, 당연하게도 세운은 그녀의 사도로서 시간을 역행하여 다시 탑을 올랐다.
그녀는 여정의 지침표를 통해 세운에게 앞길을 알려 주었고, 시간 축이 고정되는 것을 막아 세운을 계속 과거의 축으로 되돌려 주었다.
문제는.
‘폐왕.’
세운이 만마전에서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를 작동하기 직전, 폐왕이 기어코 그녀의 방을 찾아왔던 것.
시스템을 빼앗는 데는 실패했지만, 세운과 함께 시간 축이 어긋나 세운이 회귀하는 곳마다 따라오고 말았다.
아무튼, 할 말이야 정말 많았지만…….
“약속은 지켰다.”
– 네, 약속. 지켜 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우터를 쓰러트리고, 탑을 지켜낸 후.
그녀는 세운에게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 하지만, 죄송해요. 힘이 부족해서…… 약속을 완벽하게 이행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남은 힘을 쥐어짜서라도…….
“아니, 무조건 지켜야 할 거다.”
약속.
기억을 되찾는 순간부터 생각해 왔다.
그녀에게 무엇을 빌어야 할까?
지구로 되돌려 보내달라?
아니면 최고의 신이 되게 해달라?
그도 아니라면, 탑의 시스템 권한을 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세운이 바라는 게 아니다.
부탁을 정한 세운은 굳은 눈빛으로 그녀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죽지 마라.”
– ……네?
솔직히 어색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전부 돌아왔지만, 이제는 그녀와 함께한 나날보다, 함께하지 못한 나날의 기억이 더욱 많고 더욱 선명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사라지면, 내 과거들은 허상이 되어 사라지니까.”
세운은 그녀가 필요했다.
오직 검만으로 탑을 오르며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려 하였던 첫 번째 회귀.
혼자서는 힘들 거라 생각하며 동료를 모으고 그들을 수호하기 위해 방패를 들었던 두 번째 회귀.
더 이상 상처 입는 게 두려워 활을 잡고 뒤에서 피해 다니며 탑을 오르던 열 번째 회귀 등.
실패한 모든 기억은 오직 세운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만약, 그녀가 사라진다면, 이 기억은 세운의 허상이 될 뿐이다.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이는 곧 허상일 뿐이다.
“죽지 마라. 그게 내가 원하는 약속의 대가다.”
너무나도 간단해 보이는 부탁.
하지만, 그녀에게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부탁이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 이행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스러져 가고 있어요.
– 남은 시간도 얼마 없고요.
– 다른 부탁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최대한 들어드릴게요.
수십 번, 어쩌면 백 번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세운의 회귀는 전부 그녀의 힘이 있기에 가능했다.
즉, 세운이 회귀를 거칠수록 그녀의 힘은 약해져만 갔다.
솔직히 한 명의 성좌로서 이렇게나 많은 힘을 쓰고서 아직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수준이다.
제우스나 오딘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힘을 버티지는 못했을 테니까.
– 저에 대한 기억도 다시 지워 드릴게요.
– 지금까지 고생하신 만큼, 원하는 바를 이루며 편안하게 쉬세요.
그 결과.
그녀의 힘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이번에 세운이 폐왕을 쓰러트리지 못했다면,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며 폐왕이 습격하기도 전에 탑의 시스템이 붕괴했을지도 모른다.
– 그러니까…… 다른 부탁을 말해 주세요.
“아니.”
세운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부탁?
그런 건 없다.
미래는 스스로 만들어 나가면 그만이다.
세운에겐 지나온 과거를 기억해 줄 사람만 있으면 된다.
“살아라.”
폐왕의 습격을 막은 주역.
대외적으로는 세운이 활약했지만, 그녀가 없었더라면 시작조차 불가능했을 계획이다.
이대로 그녀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살아야만 한다.”
세운이 톱니바퀴를 향해 신성을 불어넣었다.
타인의 신성을 불어넣는다고 해도 이미 닳을 대로 닳아 버린 마키나의 신격이 돌아오기는 어렵다.
기껏해야 명줄을 조금 늘릴 뿐.
하지만, 세운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그거 아나?”
세운은 애초에 그녀의 사도였다.
지금은 수많은 회귀를 거치며 그녀와는 전혀 다른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세운이 가진 신성은 애초에 그녀의 신성으로 시작되었다.
“100층을 오르고 내 별로 갔을 때. 네 방처럼 망가진 별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 있었다.”
폐왕과의 전투로 인해 메말라 있던 신성을 쥐어 짜내 톱니바퀴에 밀어 넣는다.
그럴수록 반투명하던 그녀의 형상이 점점 진해졌다.
– 안 돼요. 그렇게 무리하게 힘을 쏟아부으면 정세운 플레이어님이 위험해져요. 어차피 전 스러질 몸이에요. 더 이상…….
그녀가 세운을 말리려 하였지만, 잔상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세운을 말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신성을 계속 불어넣으며 세운이 말을 이어 갔다.
“당시에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웅-
성흔이 점차 뜨거워진다.
없는 힘을 억지로 끌어 올리다 보니 성흔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모양이다.
“네 자리였던 것 같다.”
– 그만 해요, 제발……. 이러다가는 지금까지 쌓아 온 신격이 전부 사라지실 거예요.
“신격은.”
성흔이 인두로 지져지는 것처럼 뜨겁다.
그런데도 세운은 신성을 더욱 끌어 올렸다.
“다시 쌓으면 그만이다.”
신성을 전부 써 버려 신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다시 탑을 등반하면 그만이다.
여기서 그녀를 잃는다는 것은 곧 과거를 잃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미래도, 현재도, 과거도.
세운은 그 무엇도 잃을 생각이 없었다.
“루인.”
– 나의 주인이시여.
“조금만 기다려라.”
– 얼마든지.
루인의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우물을 파내고 또 파낸 탓에 우물 그 자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어째서…… 기억이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먼 기억일 텐데…….
마키나의 중얼거림에 세운은 마지막 대답을 내뱉으며 성흔을 터트리면서까지 남은 신성을 그녀에게 모두 불어넣었다.
“넌, 내 과거니까.”
철컥-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끼이익-
첫 번째 쉼터.
그곳에 숨겨져 있던, 지하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건 세운.
전신에 상처가 가득하고, 성흔이 있던 자리에는 새까만 그을음만이 남아 있었다.
신성은 영혼이 가진 힘 그 자체나 다름없는 법.
신성을 모두 잃은 뒤 걷는 것도 대단한데, 세운은 한 여인을 부축까지 하고 있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탑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성좌.
실질상 관리소의 주인이자 탑과 이 세상의 인과율을 다스리고 있는 여신.
“아…….”
첫 번째 쉼터 특유의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밖에 나오니 정말 모든 게 끝났다는 게 실감 나며, 온몸에 힘이 쫙 빠진다.
무릎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쓰러지려던 찰나.
“세운 씨.”
누군가가 세운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유서아.
튜토리얼 때부터 세운의 편이 되어 주었던 그녀였다.
탓.
“한동안 대련은 못 하겠군.”
강한철이 세운 대신 마키나를 들어 올렸다.
원래도 듬직한 그였지만, 넓은 어깨가 오늘따라 더욱 듬직해 보였다.
“고생했어요.”
고생이라.
이미 마키나한테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인데도 감흥이 새로웠다.
강한철과 유서아.
그들은 세운의 현실과도 같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우터를 쓰러트리지도 못했을 것이며, 쓰러트렸다고 해도 이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마키나와 함께 저 방 안에서 쓰러져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모르지.
“아우터는…….”
“전부 정리됐어요. 아, 신계는…….”
“물론, 전부 정리되었느니라.”
하늘에서 보랏빛 별이 떨어진다.
탐욕의 마신, 마몬.
한없이 고귀하게만 느껴지던 그녀였는데, 오늘따라 그 누구보다 눈빛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 성좌, ‘네 번째 날’이 당신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 성좌, ‘행운의 여신’이 울먹입니다.
– 성좌, ‘격노의 군주’가 호탕하게 웃습니다.
그녀에 이어서 성좌들의 메시지가 떠 오른다.
이제는 그 얼굴을 직접 보았기 때문인지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는 메시지들.
메시지만 보아도 그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고생하셨습니다. 정세운 플레이어님.”
튜토리얼 때부터 인연이 되어 세운을 봐주었던 관리인, 튜닝.
그가 시스템 메시지를 활짝 벌려 문을 열자, 그 안에서부터 세운과 인연을 쌓아 왔던 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스터.”
“으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소!”
“괜찮으세요? 상처가 무슨…… 얼른 치료해 드릴게요.”
디아블로 길드.
발할라 길드.
청해 길드.
그 외에도 세운과 함께해 주고, 세운을 믿고 따라 주었던 이들.
세운의 ‘미래’가 되어 줄 이들이었다.
“세운 씨, 이제 어쩌실 거예요?”
떠오르는 건 많다.
우선 떠오르는 건 올림포스나 아스가르드처럼 세운의 별 주위로 디아블로의 은하를 꾸며보는 것.
강한철이나 유서아는 물론 하멜이나 카샬락카스도 넘어올 것 같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디아블로 길드원도 올라올 테니까.
아니면 최강을 외치던 카샬락카스처럼 신계에서 다른 신들과 무위를 겨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은…….
“가자.”
“네!”
모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제는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 모두와 함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