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ed the God's Warehouse RAW novel - Chapter (79)
마신의 창고를 털었습니다-83화(79/675)
제 83화
탑에 들어가자마자 세운을 맞이해 준 것은 낮은 천장이 아닌, 튜토리얼 때보다 더욱 높게 느껴지는 하늘이었다.
하얀 구름이 느긋하게 유영하고, 밝은 태양이 망토에 비춰 금빛 자수를 빛낸다.
아무리 탑이 크다고는 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게 탑이었지.’
탑에서 상식이 통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이곳은 말만 탑이지 한 층, 한 층이 좁게는 하나의 건물, 넓게는 작은 행성에 비견될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의 환경 역시 마찬가지.
환상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신수들이 살아가는 층도 있었고, 사체가 일어나 꿈틀거리는 무덤도 존재한다.
그게 바로 탑.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탑을 오르는 이들이 바로 플레이어였다.
“후…….”
탑에 진입하자마자 세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분명 탑의 내부에 들어온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바깥보다 더 깨끗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추억을 회상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무렵, 세운의 눈앞으로 탑의 진입을 환영하는 메시지들이 가득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의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탑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탑의 첫 번째 층인 ‘쉼터’에 입장하였습니다.
-튜토리얼에서 획득하였던 개인 공적치가 모두 초기화됩니다.
-튜토리얼을 랭킹 1위로 통과하여 새롭게 기본 공적치 100,000point를 획득합니다.
개인 공적치의 초기화. 무려 150만이라는 놀라운 수치의 공적치를 쌓았던 세운이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남는 장사지.’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마스터키로 짐작되는 열쇠와 함께 무려 S-급 아이템인 태조 무황제의 전포까지 획득하였다.
150만이라는 공적치가 아깝지 않은 보상이었다.
게다가, 시스템 메시지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튜토리얼을 수행하며 행한 업적이 쌓이며 설화(說話)의 토대가 생겨납니다.
-설화명, ‘혈랑전설(血狼傳說)’.
-플레이어 ‘정세운’에게 또 다른 이름인 ‘혈랑(血狼)’이 생겨납니다.
-새로운 이명으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새로운 이명으로 인해 ‘공포(恐怖)’에 대한 잠재력이 생겨납니다.
‘결국 이걸로 고정됐네.’
뭐, 예상은 하고 있었다. 세운이 튜토리얼 중에 행한 업적은 설화가 생겨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업적이 어떤 이명으로 발현되냐는 것이었는데.
이명의 존재조차 모르는 박정필이 멋대로 지어준 이명을 시스템이 인정해 버린 모양이다.
‘뭐, 나쁘진 않네.’
이명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아니었다.
잠재력.
이명과 설화에는 무릇, 그에 따른 힘이 따르게 마련이다.
공포라는 잠재력을 가진 플레이어를 본 적은 없었지만, 이미 전장에서 몇 번이고 사용해 본 효과였다.
일대 다수의 전투를 주로 벌이는 세운의 전투 특성상, 다수의 의지를 무너트리는 공포의 효과가 매우 어울려 보였다.
게다가 모든 능력치가 열 개나 상승할 정도면 S급 이명인 게 확실했다.
그 증거로, 세운이 회귀 전 얻었던 이명은 민첩을 열 개 정도 올려주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일단 클랜부터 찾아야 할 텐데.’
대충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 하나 싶던 찰나, 누군가가 세운과 눈을 마주치며 앞으로 다가왔다.
우람한 덩치에 제법 잘 갖춰진 장비, 얼굴에 새겨진 상처가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뭐야? 너, 설마 이제야 튜토리얼의 통과한 거냐? 늦게도 들어왔네. 뭐, 어디 구석에서 숨어 있기라도 했던 거냐?”
“누구지?”
“으하하하! 잘 물어봤다.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튜토리얼의 랭킹을 세 자릿수로 통과한 랭커! 헤드릭이라고 한다!”
소개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허세에 찌든 엑스트라 단역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만약 랭킹에 자신이 있었다면 ‘세 자릿수’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랭킹을 소개했겠지.
말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아 대충 팔구백 위 정도로 생각되었다.
“비실비실한 게 장비는 제법 좋아 보이잖아? 좋아, 내 특별히 이 몸의 클랜에 받아주지. 운 좋은 줄 알아라.”
가끔, 이런 놈들이 있었다. 어떻게든 클랜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탑의 입구에 진을 치고 앉아 있는 것들.
강한 플레이어에게는 굽신거리며 자신의 클랜에 들어와 주길 빌지만, 약한 플레이어에게는 지금처럼 강압적인 태도로 나온다.
아무리 약한 플레이어라도 잡일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클랜에 꽤 유용하니까. 그도 아니면 전투에서 고기 방패로 내세우든가.
“싫다면?”
“으하하하! 네놈이 탑에 늦게 들어와서 아직 감각이 무딘가 본데, 여긴 그렇게 개념 없이 굴면서 살아남을 만한 곳이 아니야. 그래도 싫다면…….”
자신을 헤드릭이라 소개한 남자가 세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비웃음에 가깝던 미소가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험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큰 덩치와 더러운 인상, 거기에 얼굴에 난 상처까지. 그 모든 게 어우러져 제법 흉흉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신고식으로 이 몸한테 아이템 몇 개는 상납하고 들어와야 할 거야.”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올리며 위협을 가하는 녀석.
대충 훑어봤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쓸 만해 보이는 검이었다. 물론, 뒤랑달과 비교할 만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창고의 보물을 사용하기 위한 일회성 무기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하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세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그게 무슨…….”
뻑!
“커헉!”
뒤랑달의 손잡이가 헤드릭의 복부를 강타했다.
분명 검의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던 건 녀석이었는데, 검을 뽑기도 전에 세운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고작 손잡이로 한 방 맞았을 뿐인데, 그는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엎어져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컥, 이 새끼가 비겁하게!”
“비겁? 비겁해 보이면, 제대로 덤벼 보든가.”
“아이템 믿고 그러는가 본데, 그래 봤자 세 자릿수의 랭커인 이 몸에 두 번은 통하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네발로 땅을 기었으면서. 그래도 나름 플레이어라는 것인지, 빠르게 숨을 고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기롭게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모습이 꽤 자신만만해 보였지만, 세운에게는 그저 한 마리의 불나방으로 보일 뿐이었다.
깡!
“미, 미친?”
세운이 뒤랑달을 꺼내 든 게 아니었다.
검을 꺼내 들 필요도 없다고 느껴 주먹으로 헤드릭의 검의 측면을 강타했다.
그러자 검날이 격하게 휘청이며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반동 때문인지 녀석은 오른 손목을 붙잡으며 통증을 참아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약하네.’
꿀밤이라도 몇 대 먹여줄 생각이었는데, 저래서는 실수로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방법을 바꿀 수밖에.
짝!
“커억! 자, 잠깐.”
짝!
“머, 멈춰!”
짜악!
“죄, 죄송합니다!”
짜아악!
“살려주십쇼!!”
세운의 손바닥을 다섯 대도 견디지 못한 헤드릭이 고개를 숙이며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숨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는데, 세운의 예상대로 그는 랭킹 900위권의 랭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랭킹 998위의 플레이어였다.
* * *
“헤헤, 이쪽으로 오시지요. 튜토리얼을 끝내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제가 마침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아주 살짝 어루만져줬을 뿐인데, 헤드릭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와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하긴, 벌겋게 달아오른 뺨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
나름대로 위력을 조절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타격이 컸나 보다.
“됐고. 클랜 하나를 좀 찾으려는데.”
“오, 클랜이 있으셨습니까? 진작 말을 하시지! 제가 이래 봬도 1층의 마당발입니다. 어지간한 클랜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물론이죠! 클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름은 모르고.”
“네? 아니, 이름도 모르면서 무슨…….”
“뭐?”
“아, 아닙니다! 이름 모를 수도 있죠! 하하하! 그럼 그, 무슨 특징 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유명한 플레이어라거나.”
세운의 눈이 아주 조금 찌푸려지자마자 다급하게 말을 바꾸는 헤드릭.
녀석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박정필이 떠오르는 듯했다.
‘특징이라…….’
클랜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세운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라면 당연히 강한철일 텐데…….
“강한철이라고, 너보다 덩치가 더 크고…….”
“가, 강한철? 설마, 그 ‘폭력’ 말씀하시는 겁니까?”
“……폭력?”
세운이 설명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헤드릭이 먼저 반응을 해 왔다.
강한철의 성격이라면 1층에서도 조용히 지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바로 알아들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폭력이라니? 1층에서 싸움이라도 일어났던 것일까?
“터질 듯한 힘! 폭력의 강한철을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설마, 폭력이 그 폭력(爆力)이야?”
“당연하죠! 이야, 진짜 멋지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이명을 가지고 싶습니다!”
폭력이라니. 강한철이 직접 저런 이명을 지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시스템이 강한철에게 저런 이름을 지어줬다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박정필, 그놈 짓인가 보네.’
박정필의 짓이 분명했다. 세운에게 처음으로 혈랑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놈이었으니까.
폭력과 비교하면, 혈랑이라는 이명은 백 배는 나을 지경이었다.
클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위로를 해 줘야겠다 싶었다.
“설마, 디아블로 클랜 소속이셨습니까?”
“……디아블로?”
“네! 튜토리얼의 최강자들이 모여 있다는 최강의 클랜이지 않습니까! 디아블로 클랜의 소속이셨다니. 그렇게 강하셨던 게 바로 이해됩니다!”
디아블로 클랜이라니. 이건 박정필의 작명 센스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강한철이 소속되어 있는 클랜이라면 세운의 클랜이 맞는 듯했다.
그 생각은 헤드릭의 이어진 설명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수백의 몬스터를 도륙 내며 피바람을 일으킨다는 광풍의 유서아! 그 시체를 일으켜 죽음의 해일을 일으킨다는 시해의 백현!”
“…….”
“아마, 저희 층에서 그 무용담을 모르는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아, 특히……!”
세운이 강한철에 이어 유서아와 백현에게 동정심 느낄 때쯤, 헤드릭이 말을 멈췄고,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보아하니 박정필이 1층을 쏘다니며 무용담을 퍼트리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디아블로 클랜을 다스리는 고독한 피의 늑대! 혈랑군주(血狼君主)에 대해서는, 흡……!”
세운이 저도 모르게 헤드릭의 입을 막고 말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는데, 이건 서두부터가 상상하던 선을 넘어 버렸다.
가까스로 세운의 손아귀를 벗어난 헤드릭은, 세운의 눈을 바라본 순간 열리던 입이 꾹 닫혔다.
세운의 눈에서 자신을 ‘교육’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해.”
“……넵!”
세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며칠 안 봤다고 박정필에 대한 추억이 좋게 보정되어 있던 듯했다. 역시,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인가 보다.
클랜에 도착하자마자 박정필을 제대로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세운의 발걸음이 디아블로 클랜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