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
1장
2장
3장
4장
1장
“내 평생 이렇게 재물운이 좋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카드를 확인한 점술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참 심각한 얼굴로 카드를 훑다가 고개를 들었다.
“단순히 길을 가다가 돈을 줍는 정도의 재물운은 많지요. 하지만!”
점술사가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깜짝 놀란 일리아가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숨 쉬다가도 돈벼락을 맞을 운수입니다. 세상의 돈이 전부 당신을 따르고 있군요.”
신통하다더니 정말이었다. 점술사의 말처럼 일리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돈 문제로 골치를 앓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돈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다.
일리아는 유복한 백작가문에서 태어났다. 원래도 부자로 유명한 가문이었는데, 일리아가 태어난 후로는 돈이 끊이질 않았다.
손대는 사업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름도 몰랐던 먼 친척이 엄청난 유산을 남겼으며, 경품이 걸린 행사는 언제나 1등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외출한 날에는 길을 걷다가 금화를 주웠고, 들어간 식당에서는 만 번째 손님이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점술사의 말처럼 일리아는 재물운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일리아는 점술사 쪽으로 몸을 좀 더 끌어당겨 앉았다.
“사실 재물운은 저도 알고 있고……, 곧 결혼할 거라서 연애운이 궁금하거든요.”
“물론 봐드려야지요.”
새로 카드를 뽑아보라는 말에 일리아는 신중하게 카드 다섯 장을 골랐다. 전부 선택하자, 점술사는 카드를 하나씩 뒤집어나갔다.
카드를 확인하던 점술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마지막 카드까지 드러났을 때, 점술사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덩달아 긴장한 일리아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관에 누워있는 사람, 심장을 관통한 칼, 의자에 앉은 해골…….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연애운은…….”
카드를 전부 확인한 점술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씨가 말랐네요.”
“……네?”
“한마디로 망했다는 겁니다.”
안타깝다는 시선에 일리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니, 어째서요?”
3년 전에 약혼식을 치른 연인과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정략혼도 아니고, 연애하다가 결혼하는 것이었다. 약혼자와 관계도 순탄해서 딱히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침음을 삼킨 점술사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가씨의 연애운은 재물운이랑 바꿔먹은 것 같습니다.”
악담이나 다름없는 말을 듣게 된 일리아는 점술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 뻔했다가 겨우 참았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약혼자 있어요.”
“그래요? 곧 없어질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점술사는 카드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후에 제 말이 옳다면 그때 지불해주세요.”
점술사는 그렇게 일리아를 내보냈다.
가게를 나온 일리아는 무척이나 찝찝해졌다. 앞에 재물운은 기가 막히게 맞히더니, 연애운을 보는 실력은 영 형편없었다.
“찾아간 보람이 없잖아.”
수소문해서 일부러 갔건만, 연애운의 씨가 말랐다는 소리나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리아는 기분 전환을 하러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점술사가 했던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씨가 마르다 못해서 파멸해버린 연애운. 심지어 약혼자는 곧 없어질 거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심란했다.
길을 걷던 일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
자꾸 찝찝하고 거슬려서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약혼자인 리하트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나면 막연한 불안감도 해소될 것이다. 못 본 지 제법 되었으니, 지나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찾아왔다는 핑계를 대도 괜찮을 터였다.
일리아는 연락 없이 곧장 테르시안 후작가로 향했다. 후작 저택에 도착한 일리아는 못 보던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낯선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현관으로 걸어가자, 일리아를 발견한 고용인이 화들짝 놀라며 막아 세웠다.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 도련님께서 안 계시는지라…….”
일리아는 쩔쩔매는 고용인에게 질문했다.
“손님이 온 것 같은데. 저 마차의 주인은 누구죠?”
“그건…….”
당황했는지 고용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나쁜 직감이 들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직접 확인해봐야겠어요.”
일리아는 고용인을 뒤로한 채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에 속도가 붙을수록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마침내 일리아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블로든 님……!”
고용인의 만류보다 일리아가 문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누군가가 발칵 화를 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 ……일리아?”
일리아를 본 리하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윗옷을 입지 않은 채였다. 일리아의 시선이 옆으로 빗겨갔다. 침대 위에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여자가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속옷까지 확인했을 때, 일리아는 점술사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연애운은 박살났다는 것을.
***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제대로 기억나질 않았다. 정신 차리니 침대에 엎드려서 울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오해야.
아무 사이도 아니다. 누님의 손님인데, 옷에 음료를 흘려서 벗고 있던 것이다. 리하트는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뻔한 변명을 내뱉었다.
충격에 휩싸인 일리아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자, 리하트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돌변했다.
-아무리 약혼자라고 하지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다니 불쾌한데.
-노크 없이 남의 방에 들어오다니. 예의부터 갖추는 건 어때?
리하트는 사과하기는커녕 일리아를 탓하고 비난했다.
일리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 죽여 울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화살처럼 제 몸을 찌르고 헤집었다. 심장이 짓이겨진 것처럼 너무 아파서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리하트는 일리아의 첫사랑이었다. 하나뿐인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혼자 짝사랑했다. 그러다 갖은 노력 끝에 약혼식까지 치르게 되었다.
일리아는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지금껏 노력했다. 리하트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을 주워듣고 성격까지 바꾸었다. 늘 미소를 달고 다녔으며, 친절하고 상냥한 약혼자가 되려고 애썼다. 심지어 리하트가 말한 이상형에 가까워지려고 취향과 취미까지 바꾸었다.
리하트는 그런 일리아의 노력을 당연시했다. 못내 서운했지만 표현이 서투른 사람이라 그렇다고 납득했다. 저를 좋아하지 않으면 약혼식까지 치를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전부 착각이었던 것이다.
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중하게 가꾸었던 사랑이었다. 크기는 달라도 함께 가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관심도 없었고 저 혼자만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일리아는 매일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함께했던 추억이 모두 끄집어내지고, 마지막에는 저를 비난하던 얼굴만이 떠올랐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격한 감정이 한 꺼풀 걷히자, 그제야 외면해온 일이 하나씩 떠올랐다. 언제나 연락을 기다리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항상 필요할 때만 일리아를 찾았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늘 구걸하듯 청해야 듣곤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수많은 감정을 태우고 태워서 남은 것은 증오라는 찌꺼기뿐이었다.
“뺨이라도 때릴걸.”
누워 있다가도 그때 생각이 나서 열이 올랐다. 따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집으로 돌아온 것이 후회됐다.
일리아는 애꿎은 베개를 잡아 뜯었다. 이게 리하트의 머리카락이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현장을 발각한 그때 엎어버리는 건데.
일리아는 베개를 집어던진 후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허리까지 굽이치는 환한 금발과 맑은 자색 눈동자가 비쳤다.
일리아는 찬찬히 살펴 내려갔다. 수척해진 제 모습이 낯설었다. 살도 제법 빠졌고, 핏기가 없어서 아파 보이기까지 했다. 외출은커녕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리아는 시선을 다시 위로 한 채 제 얼굴을 보았다. 내려간 눈꼬리나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는 선할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지게 했다. 심지어 늘 웃고 다녔기에 일리아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거울에 비친 일리아는 무표정했다. 버릇처럼 웃지 않는 스스로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됐어.”
착한 척하느라 지금까지 얼마나 참고 살았던가. 화가 나도 성격을 죽이느라 웃음으로 무마한 적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더 이상 상냥한 약혼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식 때문에 손해 본 게 얼마야.”
마음뿐만 아니라 돈도 엄청나게 퍼주었다. 아마 자신이 준 돈으로 여자랑 놀아나기나 했을 것이다.
“배려심이 많은 게 아니라 호구였지.”
일리아는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을 욕하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한 달 동안 침실에 박혀 있었더니, 계속 잠옷 차림이었다.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를 훑던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커다란 방 안을 가득 채운 드레스는 전부 리하트의 취향이었다.
“……옷부터 새로 맞춰야겠어.”
적당히 편해 보이는 옷을 고른 일리아는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침실 문을 열자,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화들짝 놀라서 다가왔다.
“아가씨…….”
고용인이 울먹였다. 오랫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많이 걱정한 모양이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이젠 괜찮아.”
일리아는 살짝 웃어준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오라버니는 황궁에 계신가?”
“다들 외출하셨어요.”
“그래?”
그러고 보니 가족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리하트를 챙기느라 그간 가족들을 등한시한 것이다. 과거를 되새겨보던 일리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지금 외출할 건데, 준비해주겠어?”
일리아는 고용인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치장을 끝낸 후 곧바로 현관으로 내려왔다.
아치형의 현관은 수십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 그곳에서 화려한 마차 한 대와 함께 두 남자가 일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위 기사인 프란체와 말렉이었다.
“아가씨……!”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이 놀란 목소리로 일리아를 불렀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아 보였다. 한참 망설인 끝에 말렉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아프신 곳은 없으시죠?”
프란체의 물음에, 일리아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물쭈물하던 프란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일단 번화가로 가자.”
일리아는 목적지를 말해준 후 마차에 올라탔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상념에 잠겼다.
자신이 고통 받은 만큼 리하트의 눈에서 눈물을 뽑고 싶었다. 그럼 그 전에 파혼부터 해야 하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까맣게 잊고 있던 점술사가 떠올랐다.
-저 약혼자 있어요.
-곧 없어질 겁니다.
생각해보면 점술사는 일리아의 은인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리하트와 결혼할 뻔했다.
-오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후에 제 말이 옳다면 그때 지불해주세요.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프란체에게 말했다.
“은행부터 들러야겠어.”
부드럽게 굴러간 마차는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수도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한 은행이었다.
일리아가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들어서자, 번듯하게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달려왔다. 이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리아 블로든 님. 무슨 용무로 오셨는지요?”
“내 금고에서 돈을 좀 찾아야겠어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내가 곧바로 일리아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특별한 손님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응접실이었다. 신경 써서 꾸민 것 같으나, 백작 저택의 남아도는 방보다는 못했다.
일리아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다른 직원이 차를 내어오는 사이, 사내가 종이를 내밀었다.
“인출하실 금액을 써주십시오.”
일리아는 원하는 액수를 쓰고 하단에 서명했다. 금액을 확인한 사내가 곧바로 직원을 불렀다. 돈을 꺼내오는 동안 일리아는 차를 홀짝였다. 잠시 후 인출한 돈을 전부 마차에 실었다는 보고에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대단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