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0)
황실 공문이라니. 설마……. 일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말렉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말렉의 설명이 끝나고 일리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일단 에반테온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서 약속 장소를 바꾸자고 해야겠어.”
***
황급히 약속 장소를 바꾸게 된 일리아는 번화가로 나왔다.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아서 오르골 가게에서 보자고 해두었다.
저번에 매입한 오르골 가게에 도착하자, 새로 뽑은 점원이 인사를 건넸다. 싹싹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니 응접실처럼 꾸며진 공간이 하나 있었다. 저번에는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아늑했다. 가게에 손님이 많지 않아서 임시 거점으로 삼아도 괜찮을 듯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으려는 그때, 가까이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카르한이었다. 인사를 건네려던 일리아가 잠시 멈칫했다.
카르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뒤편에 서 있는 암녹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본 일리아가 물었다.
“그쪽은?”
“……제 보좌관입니다.”
난감해하던 카르한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제 실수로 계약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일리아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보좌관이 파혼 동맹 계약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예.”
“그럼 됐어요. 제 호위들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카르한 측에서도 한 명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카르한에게서 시선을 뗀 일리아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테시온 헤르벤입니다.”
“반가워요.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인사를 마친 테시온이 일리아를 샅샅이 훑었다. 꼬투리 잡을 만한 걸 찾다 못해, 먼지까지 탈탈 털 기세였다. 탐색을 끝낸 테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약속 당일에 장소를 바꾸시다니……, 저희를 무시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테시온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일리아의 뒤편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험악해졌고, 카르한 또한 다급히 테시온을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 불찰이에요.”
순순히 사과해올 줄 몰랐다는 듯 테시온이 움찔했다.
“변명하자면, 약속 장소에는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거든요.”
“갈 수 없다니……?”
“오늘 황실에서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공문이 내려왔어요.”
“……예에?”
테시온은 당황한 나머지 멍청히 되묻고 말았다. 일리아는 익숙하다는 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종종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운이 좀 좋아서요.”
운이 좀 좋은 수준이 아닌데……. 테시온은 딱 그런 표정이었다.
이번 일로 일리아는 원래 시세의 50배나 되는 수익을 얻었다. 부동산 투자가 대박을 터뜨리며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것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돈보다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휴식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일리아의 재물운은 이게 문제였다. 시도 때도 없이 강제로 돈을 안겨주었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일단 앉으세요.”
카르한이 일리아의 맞은편에 앉고, 테시온은 가만히 서 있었다. 프란체와 말렉은 일리아의 뒤편에 섰다.
“급히 정한 장소라…… 대접할 게 없네요.”
“괜찮습니다.”
카르한이 덤덤히 말했다. 일리아는 열심히 테시온을 노려보던 프란체에게 부탁했다.
“프란체, 마실 것 좀 사다주겠어?”
“……예.”
프란체가 나가자 살벌하던 분위기가 조금 덜어졌다. 잠깐 침묵이 내려앉고, 테시온은 카르한을 한번 보았다가 일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블로든 영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세요.”
“계약을 파기해주십시오.”
테시온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말도 안 되는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애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르한 님을 끌어들이진 말아주십시오.”
그의 행동은 보좌관이라기보단 보호자 같았다. 바로 본론부터 꺼내며 벽을 치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의 실체가 들통 나지 않은 것은 전부 테시온 덕분인 듯했다.
“테시온.”
카르한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러나 테시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카르한 님께서는 타인과 엮이는 것을 싫어하시니, 이만 포기하십시오.”
차분히 그의 말을 듣던 일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테시온이 계약 연애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면 자신도 이해했을 것이다. 굳이 이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있냐는 식으로 나왔다면 침착하게 설득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카르한이 일리아와 엮이면서 남들 앞에 나서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소문을 방패 삼아 더욱 가시 세우고 타인을 배척하면, 지금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성격을 숨긴 채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 언뜻 보기엔 나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고립되는 길이기도 했다. 아이가 다칠까 봐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와 같았다.
“테시온이라고 했나요?”
“예.”
“당신은 정말 지금 소공자의 모습이 옳다고 생각하나요?”
꿰뚫어보는 듯한 일리아의 시선에 테시온이 움찔했다.
“보좌관이라면 알고 있겠죠. 소공자께서 어떤 소문에 시달리시는지.”
테시온은 침묵했다. 카르한에 대한 소문은 그의 귀에도 전부 들려왔다. 가끔은 반박하고 싶을 정도로 악의에 가득 찬 소문도 있었다.
“아무와도 엮이지 않는다면 당장은 편하겠죠. 하지만 평생 남들과 교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평생이라니, 그렇게까진…….”
테시온이 부정하려 하자, 일리아는 그의 말을 끊어냈다.
“오해는 점점 깊어질 거예요. 당사자가 부정하지 않는데, 누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어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테시온이 눈동자만 굴렸다.
“숨길 것이 아니라, 바꿔볼 생각은 왜 안 하는 거죠?”
“……!”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혼란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껏 일리아를 마주 보던 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한이 그를 불렀다.
“테시온.”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테시온이 천천히 카르한을 보았다. 카르한은 냉정할 정도로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새파란 눈동자만큼은 별처럼 무수한 말들을 품고 있었다.
“지금까지 신경 써줘서 고맙다.”
수많은 말을 골라서 내놓은 한마디에 테시온이 울컥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 바뀌고 싶다.”
테시온은 충격 받은 듯 입술만 벌렸다. 지금까지 카르한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으로부터 격리한 것은 테시온 자신이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카르한도 제 의견을 묵묵히 따라주었다. 하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테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르한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다녀왔습니다!”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프란체가 안으로 들어섰다. 양손 가득히 음료를 든 프란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잠깐 멈춰 섰다.
프란체가 말렉을 쳐다보았다. 지금 분위기 왜 이래? 그가 눈으로 묻자, 말렉이 똑같이 눈빛으로 대답해주었다. 아가씨가 한 놈 교화시켰다.
잠시 멈춰 서 있던 프란체는 상황을 파악하고 목청을 높였다.
“아가씨! 종류별로 사왔습니다.”
프란체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테이블에 음료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엇을 사오라고 지정하지 않았기에 가게를 다 털어온 듯했다.
“일단 뭐 좀 마시고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일리아는 쌉싸름한 자몽주스를 집어 들었다. 수많은 음료를 눈앞에 둔 카르한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홍차가 든 컵을 집어 들었다.
“왜 그거 드세요? 과일음료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이 멈칫했다. 그러자 테시온이 대신 대답했다.
“카르한 님께서는 단 거 안 드십니다.”
“단 거 싫어해요? 먹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이 머뭇거렸다. 테시온의 눈치를 보던 카르한이 조용히 말했다.
“……단 거 좋아합니다.”
크게 충격 받은 듯 테시온이 입을 벌렸다.
“아니……, 단것을 좋아하신다고요?”
정말로 처음 들어본다는 물음에 카르한이 한마디 했다.
“다들 권하지 않아서.”
테시온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껏 가장 가까이서 카르한을 모셔왔지만 취향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는 침울해졌다.
테시온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일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영애께서는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얼굴에 쓰여 있던데요.”
“……?”
미궁에 빠진 듯 테시온의 머리 위에 물음표만 그려졌다. 그는 다시 카르한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딱 그런 표정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테시온을 보던 일리아가 음료를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우리가 계약하게 된 이유를 말해줘야겠군요.”
일리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카르한과 자신은 목적이 일치해서 계약을 맺었다는 것. 당분간 연인 행세를 하며 약혼자를 떨쳐낸 후에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했다고 설명을 마쳤다. 테시온은 그제야 납득한 눈치였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테시온이 부끄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불순한 목적으로 카르한 님께 접근한 사람들이 워낙 많은지라…….”
“이해해요.”
솔직히 말해서 일리아도 카르한의 진짜 성격을 몰랐다면 거래를 청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연회에서 처음 만났더라면 소문만 믿고 아예 엮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테시온은 계약서에 적힌 조항을 짚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가짜 연인으로서 서로에게 충실할 것.
“가짜연인 행세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 남들 앞에서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인 척하는 거예요.”
일리아의 설명에 테시온의 눈동자가 스르륵 카르한에게 향했다.
“……그런 거 못하시는데.”
“그런 것 같더라고요.”
이미 리하트를 만났을 때 느꼈다. 카르한은……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 연기를 못하면 표정이라도 다채로웠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웃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일리아는 저번에 카르한에게 한 번만 웃어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꿈에 나올 것 같았지…….’
입꼬리만 올린 카르한은 악당 그 자체였다. 억지로 웃는 얼굴은 안 하니만 못했다. 사실 그걸 다 떠나서 일단 서로 가까워지는 것부터가 시급했다.
“그럼 오늘 만난 김에 연습을 좀 하는 건 어때요?”
결정을 내린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콕 집어서 물었다.
“소공자, 연애해본 적 있어요?”
주위는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그리고 카르한은 침묵했다. 설마 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테시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방금까지 열심히 떠들어대던 테시온이 눈을 피했다.
‘뭐, 그래……. 바빠서 연애 못 해봤을 수도 있지.’
일리아는 제 뒤에 서 있는 프란체와 말렉을 바라보았다. 말렉 또한 테시온과 마찬가지로 눈을 내리깔았다.
말렉은 이미 아이가 두셋 정도는 있을 나이였으나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다.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본인이 딱히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프란체는…….
‘너는 연애 안 하는 게 좋겠다.’
겉모습과 속이 너무 달라서 연인이 도망칠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엔 학문에 전념할 것 같은 차분하고 곱상한 도련님인데, 실상은 온갖 깽판을 치고 다녔다.
결국 이곳에서 유일한 연애 경험자인 일리아가 제안을 던졌다.
“우리 이제부터 데이트 하러 갈 거예요.”
데이트라는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일리아도 리하트와 연애한 경험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연애라는 이름을 붙이면 안 되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결국 여기서 정상적으로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일리아는 오르골 가게를 나섰다. 일리아를 선두로 네 명의 남자가 졸졸 따라왔다. 왠지 새끼 오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어미 오리가 된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데이트를 했더라.’
제 입으로 데이트 하자고 큰소리치긴 했는데, 막상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참고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던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리하트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데이트는 전부 리하트와 했었다.
‘그 자식이랑 데이트할 때는 항상 쇼핑을 했지…….’
대부분은 상점가를 돌아다녔고, 가끔씩 인기 있는 연극이 있을 땐 극장을 찾았다. 좀 더 특별한 것을 찾으려고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을 마친 일리아가 제안했다.
“옷 보러 갈래요?”
“……네?”
“저번에 급하게 옷을 고른 게 생각나서요. 가볍게 쇼핑부터 해요.”
카르한이 삐걱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나온 후로 그는 고장 난 것 같았다. 일리아는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얼굴은 정말 잘생겼는데……. 솔직히 말해서 얼굴만큼은 일리아의 취향이었다. 인기 연극배우의 뺨을 몇 대나 후려칠 만한 미남이었다.
거기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훌륭한 몸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나워 보이는 인상만 어떻게 하면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이들이 줄을 설 터였다.
“그리고 앞으로 서로 이름으로 불러요. 연인처럼 보여야 하니까요.”
아직 어색한 듯 그는 입술만 달싹였다.
“카르한, 일단 제 옆에 서줄래요?”
이름이 불리자, 카르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뻣뻣한 몸을 움직여 일리아의 옆에 섰다. 여전히 냉랭한 얼굴인데, 단정한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붉어진 귀가 보였다.
그 정도로 쑥스러워 하다니. 테시온이 카르한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괜히 막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카르한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엔 심각하게 여린 남자였다.
‘소문은 너무 개차반처럼 났고, 적당히 나쁜 남자 정도만 되면 좋겠는데.’
하지만 지금 하는 걸 봐서는 나쁜 남자도 과욕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어느 옷가게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간판을 확인했다. 리하트가 가장 좋아하던 옷가게였다.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가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렉이 가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다 같이 들어가면 번잡할 것 같아,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은 바깥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블로든 님!”
“어서 오십시오!”
흩어져 있던 직원들이 블로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뛰쳐나왔다. 활짝 웃으며 일리아를 맞이하던 그들은 나란히 들어온 카르한을 보고 멈칫했다. 당연히 리하트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굴렀던 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웃으며 말을 걸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천천히 구경할게요.”
일리아의 대답에 직원들은 전부 뒤로 빠졌다. 카르한은 잘 길들여진 맹수처럼 조용히 일리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먼저 남성복이 걸려 있는 곳으로 향한 일리아는 옷 한 벌을 꺼내들었다.
“카르한, 이거 어때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괜찮다는 말에 일리아는 직원에게 건넸다. 고민 없이 구매가 결정된 것이었다. 일리아는 옷 두 벌을 더 꺼내들며 물었다.
“둘 중에서는요? 아, 왼쪽이 더 나아요?”
뒤에서 지켜보던 직원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카르한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일리아는 얼굴만 보고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직원들은 몰래몰래 카르한을 훔쳐보았다. 한파가 몰아칠 것처럼 차가운 인상이었다. 매서운 눈빛을 보고 있으면,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어느 놈을 죽일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한의 표정을 본 직원들은 더더욱 미궁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가장 놀란 사람은 카르한이었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않았는데, 일리아는 그를 완전히 파악했다.
“이건 별로예요?”
카르한의 표정을 살피며 일리아가 물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자, 일리아가 작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이런 걸로 화 안 내요.”
옅은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상냥해 보였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 얼굴을 보면 좀 더 솔직해졌다.
“……색감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요? 요즘 유행이라던데.”
일리아는 카르한의 몸에 옷을 대어봤다. 역시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일단 사요!”
사놓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옷장에 전시해두면 된다는 것이 일리아의 지론이었다. 일리아가 열심히 카르한의 옷을 고르고 있는데,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옷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요?”
진심이냐는 눈빛에 카르한이 움찔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일리아가 고른 옷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옷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서 한 달 내내 아래위로 새 옷을 입어도 남을 듯했다.
“……이제 제가 골라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먼저 나서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일리아는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드레스가 잔뜩 걸려 있는 곳으로 걸어가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미술품을 분석하기라도 하듯 무척 진지한 태도에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건성으로 하는 법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카르한이 드레스 한 벌을 꺼내왔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촌스러운 걸로 골라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목이 괜찮았다. 푸른색 드레스는 일리아의 밝은 금발과 잘 어울렸다. 원단도 지금 계절과 알맞았고, 사이즈도 적당했다. 순간 건성으로 제 옷을 골라주던 리하트가 떠올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 자식은 자기 옷만 열심히 골랐는데…….’
일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카르한이 바로 발걸음을 뗐다.
“역시 다른 옷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