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01)
외전 2장
***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주도하에 뒤풀이가 열렸다. 오감이 화려해지는 향연에 하객들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냈다.
피로연은 선상 파티였다. 석양이 질 무렵,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 위에서 작은 연회가 열렸다. 마지막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으며 마무리되었다.
길었던 결혼식이 끝나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기절하듯 잠을 잔 후에 아침 일찍 신혼여행을 떠났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남부령에 도착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새하얀 집들 사이로 저 멀리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깥을 구경하던 일리아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카르한, 여기부터 남부래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카르한이 일리아의 어깨를 감싼 채 대답했다.
“저는 남부는 처음입니다.”
“그래요? 저는 어릴 적에 두 번 정도 왔었어요.”
부모님 사업차 따라온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특히 에메랄드빛 바다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선착장으로 가는 겁니까?”
“그럴까 싶어요.”
관광은 마지막 날에 하기로 했고, 오늘은 곧바로 섬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마차는 해안을 따라 쭉 달려, 선착장 앞에서 멈추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이 양산을 펼쳐 들어주었다.
카르한은 바다에 정착된 배를 훑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여럿 보였다.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배가 하나 있었다. 블로든 가문 재력에 익숙해진 카르한은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겠다는 듯 유추했다.
“저기 제일 큰 배가 블로든 가문 것입니까?”
“맞아요.”
역시나.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선착장이 우리 가문 것이니, 여기 있는 배는 전부 내 거예요.”
카르한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예측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몰랐다.
“자, 타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카르한이 먼저 배에 올라타고, 일리아는 마차에 숨겨둔 향료를 꺼내왔다. 연인끼리 쓰기 좋다며, 스텔라가 선물해준 거였다.
향료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일리아는 특별히 주문한 속옷과 잠옷도 챙겼다. 그리고 의욕 넘치는 얼굴로 배에 올라탔다. 결혼도 했겠다, 가족들도 없겠다……. 오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인장이 박힌 배에 올라탔다. 섬에 들어가서 사흘 정도 머무를 예정이었기에, 고용인들도 함께 승선했다.
그들이 탄 배는 진주알 같은 하얀 포말을 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배 아래에 옅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눈앞에서 찰랑거렸다. 갑판 위에 서서 끝없는 수평선을 응시하던 카르한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사실 바다를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입니다.”
“정말요? 그래도 제법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제가 간 지역은 바다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행군할 때 아주 멀리서 본 적이 있긴 합니다.”
기억을 더듬던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너무 멀어서 색깔만 구별할 수 있었는데, 그때 본 바다는 푸른색이었습니다.”
“하긴 남부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의 바다는 푸른색이 대부분이죠.”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던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일리아와 함께 처음 바다를 보아서 기쁩니다.”
카르한은 남부의 태양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해진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나도 당신이랑 함께 본 바다가 평생 본 바다 중에서 제일 예뻐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갑판에 나란히 서서 더운 바람을 맞이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바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잔잔한 바다를 쭉 나아가니, 저 멀리 섬 하나가 보였다. 해변에 깔린 흰 모래와 뒤로 우거진 녹음이 대비되었다. 섬 뒤편에 배가 정착하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별장에 들어갔다.
이 섬에서 별장은 두 채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해변과 가까운 별장을, 고용인들은 섬 뒤쪽 별장을 이용할 예정이었기에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리아는 길이가 짧고 얇은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카르한은 쇄골이 드러나는 셔츠 한 장과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은 후 함께 해변으로 향했다.
흰 모래가 깔린 해변에는 라탄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파고라와 그네가 휴양지 느낌을 자아냈다. 백사장에 선 카르한은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여긴 우리뿐이니까요.”
“……그럼 바다에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좋아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신발을 벗어놓고 바다로 향했다. 수면이 얕아서 그런지 바닥이 유리처럼 깨끗하게 비쳤다. 고운 모래 사이로 작은 물고기가 헤엄쳤다.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던 카르한이 바다에 손을 담갔다. 그리고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
카르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일리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짜서…….”
쑥스러운 듯 카르한이 뒷목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일리아가 물장난을 쳤다. 참방, 하고 카르한의 몸이 반쯤 젖었다. 그러나 일리아가 물을 뿌려도 카르한은 묵묵히 맞기만 했다.
“왜 가만히 있어요. 재미없게.”
그제야 카르한이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조심조심 물장난을 하는 모습에 일리아는 또 웃고 말았다.
한참 물에서 놀던 일리아가 멈추었다. 얇은 셔츠가 푹 젖어서, 그의 몸이 고스란히 비쳤다. 베틀로 짠 듯 잘 자리 잡힌 근육은 카르한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일리아의 귀가 붉어졌다.
“일리아?”
카르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이름을 불러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다른 것도 해보자며 그를 이끌었다.
둘은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름을 써보거나 예쁜 돌멩이를 모아서 쌓으며 놀았다. 늦은 점심으로는 요리사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먹었다. 한참 놀던 일리아는 진 빠진 얼굴로 말했다.
“아, 힘들다. 좀 쉬고 있을게요.”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쉬자며 일리아의 옆에 착 달라붙었을 텐데, 한창 신난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바다로 향했다. 라탄 의자에 앉은 일리아가 농담했다.
“물고기나 잡아 와요. 식량 떨어지면 구워 먹게!”
아무런 도구도 없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르한도 이 정도는 농담인 줄 알 것이다. 일리아는 라탄 의자에 편히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체력을 비축해두어야 했다. 오늘 밤은 아주 길 예정이니 말이다.
‘이게 바로 휴양이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공간. 완벽한 휴식이었다.
“일리아, 더 잡아 올까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일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그대로 멈추었다. 품에 물고기를 잔뜩 안은 카르한이 서 있었다.
‘아니, 진짜 잡아 왔잖아?’
놀란 일리아가 아무 말 못 하자 카르한이 다시 물었다.
“장작도 패 올까요?”
“…….”
한쪽은 휴양인데, 다른 한쪽은 섬에서 살아남기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카르한한테는 농담도 못 하겠다며,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에게 말했다.
“혼자 둬도 잘 살겠어요.”
카르한은 품에 안고 있던 물고기를 후두둑 떨어뜨렸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곰 같은 사내가 제 한 마디에 철렁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일리아는 견딜 수가 없었다.
“농담이죠. 누가 당신 혼자 둔대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팔을 잡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대로 이끌려온 카르한이 일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물고기는 어떻게 잡은 거예요?”
“손으로 잡았습니다. 예전에 식량이 부족하면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거든요.”
일리아는 카르한만 있으면 조난당해도 생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석양을 지켜보았다. 물감 통을 쏟은 듯 바다에 붉은색 물이 들었다.
그 위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려왔다. 두 사람을 위한 한 편의 극이었다. 어느새 떠오른 달이 어둠 위를 걸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백사장의 흰모래를 와르르 쏟은 것처럼 가득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깜깜해진 해변을 걸었다. 검은 물결이 밀려오며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남부라 그런지 저녁인데도 후덥지근한 기운이 아직 가시질 않았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사소한 이야기와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것들…….
“원로들이 계속 공작저를 비워둘 거냐고 묻더군요.”
카르한은 여전히 블로든 저택에 머무르며, 공작저로 출퇴근했다. 이제 결혼도 했으니 백작저를 나와 공작저에서 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저는 계속 블로든 저택에 살고 싶습니다.”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좋았다. 가끔 시간이 나면 함께 저녁을 먹었고, 아침에 출근할 때는 서로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주었다.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에반테온 공작저와 달리 블로든 저택은 행복한 추억만 가득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일이 바쁘면 공작저에 잠깐 머무르면 되죠.”
같이 가주겠다고 일리아가 속삭이자, 카르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사실 떨어지기 싫었습니다.”
일리아는 말없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백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끝없이 이어졌다. 수평선부터 달려온 파도가 나란히 새겨진 발자국을 지워갔다.
밤이 깊어지자 일리아와 카르한은 별장으로 돌아왔다. 일리아는 별장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바다에 들어갔으니 바로 씻는 게 좋겠어요.”
옷은 거의 다 말랐지만 아직도 몸에 소금기가 남아 있었다.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핑계를 대려고 했다.
“욕실이…….”
일리아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아차, 욕실이 너무 많았지.’
욕실이 하나니까 같이 씻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너무 말도 안 됐다. 일리아는 순발력을 발휘해 말을 정정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별장이라서 욕실을 하나밖에 못 써요.”
“그럼 먼저 씻으십시오.”
역시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카르한부터 씻어요. 미리 물 받아두라고 말해뒀는데, 확인만 할게요.”
일리아는 냉큼 욕실에 들어갔다. 집에서 쓰는 것보다 조금 작은 욕조에 미지근한 물이 받아져 있었다. 스텔라가 준 향료를 꺼내 물에 풀었다. 달콤하면서 매혹적인 향이 은은하게 들어찼다. 일리아는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욕실을 나왔다.
“들어가요.”
카르한이 먼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일리아는 잠시 문 밖에 서서 기다렸다. 막 욕조에 몸을 담근 것인지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새어나왔다.
일리아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문을 열었다. 욕조에 반쯤 기대 눈을 감은 카르한은 일리아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리아가 얇은 원피스를 벗기 시작했다. 사르륵,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카르한이 번쩍 눈을 떴다.
“!”
화들짝 놀란 카르한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가득 채워진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쳤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원피스 어깨 끈을 내리며 속삭였다.
“역시 씻지 않고 돌아다니려니 찝찝하더라고요. 같이 씻어도 되죠?”
뻣뻣하게 굳어진 카르한이 욕조 손잡이를 잡은 채 입만 벌렸다. 부정이나 긍정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빠르게 옷을 벗은 일리아는 수건으로 몸을 살짝 가린 채 카르한에게 다가갔다.
카르한의 몸은 불씨가 남은 장작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일리아가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욕조가 꽉 차며 촤악, 물이 밀려나는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잔뜩 긴장한 카르한의 무릎에 일리아의 무릎이 닿았다. 지금껏 옷에 가려 본 적도 없던 무릎이 부딪치자 카르한이 움찔거렸다. 카르한은 고목처럼 굵고 강인한 팔로 욕조 팔걸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뒤로 조금 물러나려고 했으나 욕조가 작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순진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서서히 열이 차올랐다. 껴안고 키스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카르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일리아의 승낙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일리아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듯 몸을 좀 더 가까이 했다.
“이 다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카르한이 손을 뻗어 일리아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가르쳐주신다면, 잘 배울 자신이 있습니다.”
욕조에서부터 흘러나온 달콤한 향기가 욕실 가득 퍼져나갔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허리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큼직한 손에 비해 무척이나 부드러운 힘이었다. 기울어진 일리아의 몸이 카르한에게 쏟아지며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일리아는 널찍한 가슴팍에 손을 짚은 채 그를 받아들였다. 물안개를 머금은 듯 입가가 점점 젖어갔다. 카르한은 횡단하듯 입술 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좀 더 뜨거워진 숨결이 피부 위를 덮어왔다.
출렁이는 물소리가 낮에 들은 파도 소리보다 더 강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입을 맞추던 카르한이 일리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수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몸이 완벽하게 밀착했다.
입술을 떼어낸 일리아는 카르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아까 본 밤하늘처럼 어둑했다. 그의 달아오른 숨결이 일리아에게 닿았다.
“여긴 좁지 않아요?”
명백한 유혹에 카르한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촤악, 밀려나간 물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카르한은 두 팔로 일리아를 단단히 안아 든 채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금 급한 얼굴로 속삭였다.
“제가 나중에 씻겨드리겠습니다.”
***
얇은 커튼 사이로 시곗바늘처럼 뾰족한 햇살이 쏟아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오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직도 꿈을 헤매는 듯 몽롱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일리아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었다.
“윽…….”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특히 허리와 배가 찌르르 아팠다. 일리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머리맡으로 시선을 옮겼다. 침대 머리판이 반쯤 부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안 부서져서 다행이네.’
일리아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카르한은 지금껏 유지해온 인내심을 전부 내려놓고 일리아를 탐했다. 처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행위가 눈에 띄게 능숙해졌다. 그러다 카르한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대 머리판을 부수고 말았다.
카르한은 무척 당황해하더니, 일리아가 부서질까 봐 겁이 났는지 그때부터 아주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감질 난 일리아가 카르한의 어깨를 잡았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역시 전직 사령관의 힘을 얕보아서는 안 됐는데.”
상념에서 빠져나온 일리아는 겨우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카르한은 이미 일어나 있는 일리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리아, 벌써 일어났습니까?”
“저절로 눈이 뜨였어요. 어디 갔다 왔어요?”
“잠시 섬 뒤편 별장에 다녀왔습니다.”
일어나면 바로 식사할 수 있도록 음식을 받아왔다고 카르한이 말했다. 일리아가 고용인들과 최대한 마주칠 일 없도록 직접 다녀온 것이다.
“나중에 갔다 올 걸 그랬습니다.”
침대 귀퉁이에 앉은 카르한이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말투와 달리, 카르한은 평소보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기력이라도 보충한 것처럼 아주 반짝반짝해 보였다. 아직도 허리가 아픈 일리아는 괜히 심술을 부렸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카르한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일리아는 심술부리려던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저렇게 좋아하니, 괜히 부끄럽고 머쓱해진 것이다. 일리아 쪽으로 조금 더 당겨 앉은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몸은 어떻습니까?”
“근육통이 조금 있어요. 오늘은 침대에서 쉬어야겠어요.”
“어제 제가 절제를 못 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카르한이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조용히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난 좋았어요.”
그제야 카르한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일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살짝 기댔다.
“다음에는…… 더 자제하겠습니다.”
“다음이라뇨?”
일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자, 카르한이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에 일리아는 결국 웃고 말았다. 이러다가 카르한을 놀리는 데 재미 들리면 어쩌나 싶었다. 겨우 웃음을 거둔 일리아는 카르한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질였다.
“꼭 다음이어야 해요? 아직 휴가는 끝나지 않았는데요.”
그 말에 카르한이 기울였던 몸을 똑바로 해, 일리아를 마주했다. 자연스럽게 침대 머리판을 잡으려던 카르한은 조금 급하게 속삭였다.
“여긴 안 될 것 같으니…… 옆방으로 가겠습니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훌쩍 안아들었다. 제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응시하던 일리아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첫날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일리아와 카르한은 섬에서 사흘을 보냈다. 가끔 해변을 산책하거나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침실에 박혀 있었다. 산책하는 사이에 고용인이 와서 방을 치우고, 그 외에는 카르한이 손수 돌봐주었기에 불편한 점은 딱히 없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아침. 섬에서 출발한 일리아 일행은 점심 무렵 육지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는 도시를 돌며 관광하고 내일 오후에 수도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유명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친지들에게 나눠줄 관광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쇼핑을 시작했다.
“이건 특이하네. 열 개 주세요.”
“옙!”
일리아의 말에 가게 주인은 잇몸이 보일 정도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부호가 방문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다들 일리아가 들어오면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상자를 포장하는 사이, 일리아는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유리로 만들어진 볼을 만지작거렸다. 투명한 유리 안에 흰 모래와 조개껍질이 담겨 있었다.
“마음에 들면 사요. 그건 수도에서도 구하기 힘드니까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고민하다가 유리 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이건 방에 두고 싶습니다.”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고 카르한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열 개 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