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04)
“모자도 하나 더 쓸까?”
“……그냥 이대로 나갈래요.”
하나 벗으면 두 개를 더 씌울 것 같아서 포기했다. 두 사람은 곧장 현관으로 내려왔다.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일리아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본격적인 외출이었다.
그들이 탄 마차는 아주 느리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한참 지나, 번화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달 만에 저택 밖으로 나왔더니 조금씩 바뀐 구석이 보였다. 특히 일리아와 카르한의 결혼을 기념 삼아 기증한 시계탑 공사가 제법 진행된 상태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일리아는 제 옆에 선 헤인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둘이서만 외출하기는 무척 오랜만이라 괜히 어색했다. 신경이 온통 헤인리에게 쏠려 있을 때였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렸다.
“앗.”
일리아의 몸이 휘청거린 순간, 헤인리와 프란체, 말렉이 동시에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 있던 헤인리가 일리아의 팔을 붙잡아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프란체와 말렉이 빠르게 일리아를 살폈다. 헤인리가 일리아의 팔목을 놓아주며 물었다.
“일리아, 다친 곳은?”
“넘어지기 전에 잡아주셔서 괜찮아요.”
“……많이 놀랐겠어.”
그제야 헤인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일리아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세 사람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돌부리를 노려보았다.
“뽑아버려야겠습니다! 도로 한가운데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 있다니.”
프란체는 돌부리를 위험물 취급하며 화를 냈다.
“관청에서 시설 관리를 소홀히 한 탓으로 보입니다. 당장 민원을 넣어야겠습니다.”
말렉이 말을 받자, 마지막으로 헤인리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매년 겨울마다 예산이 넘쳐서 애꿎은 도로를 엎더니, 정작 보수가 필요한 곳은 하지 않은 모양이야.”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공직자를 찾아내서 문초라도 할 기세였다. 세 남자가 돌부리 하나를 두고 난리 치자, 일리아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거니, 이만 가요.”
돌부리를 맹렬하게 노려보던 그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일리아를 둘러싼 채 걸으며 연신 두리번거렸다. 뭔가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당장 치워버릴 듯한 태도였다. 이러다가 조금 있으면 융단을 구해서 바닥에 깔아줄 것 같았다.
행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일리아의 뺨이 달아올랐다. 일리아는 일단 가게라도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 어느 가게부터 가실 거예요?”
“음, 도착했구나.”
헤인리가 멈춰 서자, 일리아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의 건물은 장난감 가게가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찻집이었다.
“쇼핑은요?”
“굳이 다리 아프게 걸을 필요는 없지.”
“?”
헤인리는 의아해하는 일리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일리아가 먼저 푹신한 소파에 앉고 헤인리가 옆에 앉았다. 공간은 넓었으나 손님이 없어서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일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메뉴판을 집어 든 헤인리가 물었다.
“뭐 마실래?”
“……과일 음료요.”
헤인리는 곧장 점원을 불러 음료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내려놓은 헤인리가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나는 부모님처럼 무턱대고 가게를 사는 건 좋아하지 않아.”
“…….”
“그럼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떠맡아야 하니까.”
일리아는 헤인리의 소비 습관을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블로든 가문 사람치고 헤인리는 검소한 편이었다. 뭔가에 욕심낸 적이 드물었으며 쇼핑도 즐기지 않았다. 취미도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것이니 돈 들어갈 구석이 적었다.
그나마 가끔 가족들 생일 선물을 살 때나 목돈을 쓰곤 했다. 뭔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게부터 사들이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는 성향부터 달랐다. 일리아가 그럴 수 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편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 시켰단다.”
헤인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게 문이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상자 몇 개씩 들고 온 그들은 일리아와 헤인리 앞으로 걸어왔다.
“말씀하신 대로 특별히 엄선한 상품만 가져왔습니다!”
헤인리가 일리아를 보며 눈매를 접었다.
“고르기만 하렴, 일리아.”
헤인리는 외출 전, 수도의 가게들에 연락을 싹 돌렸다. 가장 좋은 물건만 선별해서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말이다. 판매업자들은 줄을 서서 상품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딸랑이를 보시면 안에 금가루와 다이아몬드를 넣어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아주 좋지 않습니까?”
우아하게 찻잔을 든 헤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딸랑이를 팔게 된 남자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다음 물건을 꺼냈다.
“다음 물건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안목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헤인리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기회였다.
‘무슨 최고의 장난감 선발 대회도 아니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일리아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헤인리가 속삭였다.
“마음에 드는 게 있니?”
“그냥 이 사람들을 저택으로 부르지 그랬어요.”
헤인리는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너랑 외출하고 싶었거든.”
일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헤인리와 사이가 좋아진 후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미안하면서 한편으로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목마는 황실에 납품하려고 했던 것인데, 특별히 먼저 선보이는 겁니다.”
“괜찮아 보이네요.”
일리아가 처음으로 거들자, 헤인리는 식사하지 않아도 배부른 것처럼 미소 지었다.
“우리 가문에만 파는 조건으로 세 개 사도록 하지요.”
“세, 세 개나!”
판매업자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납품한다 해도, 블로든 가문만큼 값을 잘 쳐줄 것 같진 않았다. 판매업자가 고맙다고 인사하려는데, 헤인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망가질 수도 있으니 전부 세 개씩 사야겠구나.”
그 말에 판매업자들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만족스러운 쇼핑이 끝나고 판매업자들은 전부 되돌아갔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헤인리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계속 앉아 있었으니 좀 걸을까?”
일리아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찻집을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가게를 발견한 헤인리가 혼잣말했다.
“나중에 각하께 드릴 건강식품을 사야겠어.”
일리아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처음 카르한을 만났을 때 천적을 상대하듯 탐탁지 않아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챙겨주고 있었다. 헤인리만 보면 도망치던 카르한도 요즘은 함께 외출할 정도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라버니.”
“응?”
일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충동적으로 꺼낸 질문은 아니었다. 물을까 말까 계속 고민해왔고, 가족이니 한 번쯤은 짚고 갈 문제이기도 했다. 그대로 멈춰 선 헤인리가 대답했다.
“별로 생각이 없구나. 아직은 일하는 게 좋거든.”
헤인리는 일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희 두 사람이 잘 사는 건 보기 좋지만, 나는 아직 가정을 꾸려야 할 필요성을 모르겠어.”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줄곧 하던 생각을 내놓았다.
“부모님도 재촉하지 않으니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정략혼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정략혼은 저도 반대예요.”
일리아가 미간을 좁히자 헤인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후계자 문제가 있으니 부모님도 고민이 많으시겠지.”
“그건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눈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헤인리가 속삭였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만약 내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네 아이에게 물려주는 건 어떨까?”
깜짝 놀란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에요?”
“그래. 네가 둘 이상 낳아야 가능하겠지만. 그리고 조카의 의견도 중요하겠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어느 정도 생각을 해둔 듯했다. 일리아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나눠 봐요. 아직 모르잖아요.”
헤인리에게도 운명처럼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만약 헤인리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저는 오라버니의 생각을 존중하고 싶어요.”
헤인리는 팔을 들어 일리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다정한 손길이었다.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조금 걷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마차가 어찌나 느리게 달리는지, 저녁이 되어서야 블로든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거라.”
현관까지 마중 나온 클리프가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둘이 외출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무슨 바람이 분 거냐?”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지요.”
헤인리가 덤덤히 받아치자 클리프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클리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참, 선물을 샀단다.”
“……또 무슨 선물이요?”
“아까 나간 김에 아기 장난감을 구입했는데, 네 엄마도 똑같은 걸 사왔지 뭐냐.”
그래서 두 개가 되었다고 웃던 클리프는 지금 당장 보여주겠다며 먼저 걸음을 뗐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섰다. 아까 헤인리가 사들였던 것과 똑같은 장난감이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드니?”
클리프가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에 들긴 한데, 오늘 저도 똑같은 장난감을 샀거든요.”
“그래? 별 희한한 일이 다 있구나.”
신기하다며 다들 웃고 있을 때였다. 막 집으로 돌아온 카르한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퇴근하는 길에 사왔습니다.”
“뭔데요?”
“아기 장난감입니다.”
카르한이 들뜬 얼굴로 상자를 여는 순간, 모두가 웃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카르한만이 어리둥절해했다.
“제가 잘못 사왔습니까?”
“아뇨, 딱 좋아요.”
어쩜 다들 똑같은 장난감을 사온 건지……. 이래서 가족인 모양이라고, 일리아는 웃음을 삼켰다.
***
일리아는 마침내 온천 시설이 완공되었다는 서신을 받았다. 아직 본관과 여관만 지어졌을 뿐이나, 오랫동안 추진해온 대규모 사업이었기에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카르한.”
옆에서 뜨개질 하고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온천 공사가 끝났다는데, 한번 가볼래요?”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요.”
카르한이 작은 바늘처럼 보이는 뜨개바늘을 내려놓았다.
“개장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잘 지어졌는지 직접 보고 싶어요.”
카르한은 일리아의 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도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했으니……, 알겠습니다.”
일리아는 남들보다 배가 빠르게 불러왔지만, 아직까지는 문제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무섭다는 입덧도 일리아가 아닌 클리프가 해버렸으니 말이다. 물도 못 마시는 클리프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곰처럼 퉁퉁하던 그는 살이 쭉 빠져서 평균 체중이 되어버렸다. 그 모습에 비올레는 슬퍼하며 온갖 산해진미를 사들였다. 하지만 산해진미는 식욕이 늘어난 일리아의 입으로 전부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임신 전과 비교해서 불편한 점은 많았다. 그래도 몸이 아픈 건 아니니 다행이라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빠르게 외출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온천 부지로 향했다.
일리아는 건물 외관을 둘러보고 감탄했다. 원형으로 지어진 건물은 햇빛을 받아 흰색으로 반짝거렸다. 규모가 크다 보니 웅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도안을 받았을 때도 만족스러웠는데, 완공된 걸 두 눈으로 보니 훨씬 마음에 들었다.
“도안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옆에 서 있던 카르한도 덩달아 감탄했다. 기둥에 새겨진 문양이 무척 섬세해서 미술관에라도 온 것 같았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당신이 첫 손님이에요.”
“돈 내야 할까요?”
카르한의 물음에 일리아는 작게 웃다가 제 뺨을 가리켰다.
“입장료는 입맞춤으로 받을게요.”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뺨이 아닌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너무 많이 받았으니까, 일주일 치로 쳐줄게요.”
인심 썼다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정식으로 개장하지 않아서 주요 시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쭉 이어진 회랑을 걸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호수처럼 커다란 온천탕과 그 주위를 둘러싼 건물이 한눈에 보였다.
“여기에 가게들을 입점시킬 거예요. 실컷 놀다가 바로 식사하거나, 휴식 공간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데리고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카르한은 일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시선에 일리아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온천 이용해 볼래요?”
“……지금 말입니까?”
카르한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시험해보니 피부가 미끈해지더라고요. 발만 담가 봐요.”
일리아는 작은 탕으로 카르한을 이끌었다. 가족끼리 이용하기 좋아 보이는 탕에는 온천이 쉴 새 없이 퐁퐁 솟아나는 중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임신한 후로 항상 들고 다니는 가방에서 방석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방석에 일리아를 앉힌 카르한은 치맛자락을 잡고 묶어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탕에 발을 담갔다. 예상보다 뜨거웠는지 카르한이 흠칫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온천은 처음이라서 이렇게 뜨거운 줄 몰랐습니다.”
카르한은 신기한 듯 온천을 살폈다. 금방 온도에 적응했는지 카르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온천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깐 온천을 즐기던 카르한은 허리를 숙여 일리아의 발을 잡았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마사지를 해주었다. 손에 힘을 다 빼서 그런지 묘하게 간지러웠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왠지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 발을 카르한에게 내어준 일리아가 다른 쪽 발을 들었다. 그대로 발을 내리치자 촤악, 하고 물이 사방에 튀었다. 순식간에 카르한의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일리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 젖어버렸는데 이제 어떡해요?”
서서히 허리를 편 카르한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검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내리깔았던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가고,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일리아를 담았다. 그 시선에 일리아는 웃음을 멈추었다.
외투 안에 입고 있던 셔츠가 점점 젖어들자 그의 몸이 드러났다. 저 아래에 숨겨진 몸이 얼마나 좋은지는 일리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군살 없는 탄탄한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자 숨이 턱, 막혀왔다. 말없이 일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같이 가주실 겁니까?”
“……이제 여관도 사용할 수 있어요.”
카르한은 두 팔을 뻗어 일리아를 안정적으로 안아들었다. 그가 제 품에 쏙 안긴 일리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두 사람은 곧바로 온천과 이어진 여관 건물로 향했다. 아직 개장하지 않아서 썰렁한 느낌이었으나, 다행히 침대와 침구는 구비되어 있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깃털처럼 사뿐히 침대에 내려놓았다.
뒤돌아선 그가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일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발을 짚고 일어선 일리아가 뒤에서 카르한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셔츠 마를 때까지 쉬다 갈까요?”
일리아의 속삭임에 그의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젖은 셔츠가 바닥에 떨어지고 카르한이 천천히 뒤돌았다. 일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경직된 근육이 풀어져서 그런지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리아를 내려다보는 카르한의 시선은 심상치 않았다. 겨우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안정기에는 괜찮다고 했어요.”
“……그럼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은 카르한이 일리아를 침대에 눕혔다. 일리아는 어느새 제 위로 올라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쭉 뻗은 목덜미와 옴폭 팬 쇄골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손을 뻗어 쇄골을 살살 만지자, 카르한의 어깨가 움칠했다. 카르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살짝 거친 입술이 피부 위를 문질러왔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큼직한 손이 일리아의 원피스 리본 끈을 빠르게 풀어 헤쳤다. 원래도 품이 넉넉하던 임부복은 리본 끈이 풀리자 금방 벗겨졌다.
입술을 떼어낸 카르한은 일리아의 흐트러진 금발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마주했다. 달뜬 시선은 앞으로 주어질 쾌락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