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05)
외전 3장
***
시간이 흘러, 초여름이 찾아왔다. 황궁에서는 오랜만에 국무 회의가 있었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헤인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붙잡지 말라는 어조에 다들 눈만 깜빡였다. 카르한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헤인리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먼저 자리를 뜨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요즘 각하께서 입이 귀에 걸리셨군.”
“부인께서 회임하신 후로 회의가 끝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가 버리시니, 대화를 나눌 틈도 없습니다.”
귀족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불평하는 말과 달리 회의장에는 훈훈함이 감돌았다. 그중 자식이 많기로 유명한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는 제게 육아 비법까지 물어보셨지 뭡니까.”
“아니, 유모들이 다 키울 텐데…….”
“아버지가 되는 건 처음이라 잘 해내고 싶다 하시더군요.”
몇몇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다른 이들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축하할 일이지요.”
“아이가 태어나면 블로든 가문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참.”
이제는 상상하는 것도 두렵다는 어떤 이의 말에 모두가 동감했다.
그리고 한편. 회의장을 빠져나온 카르한과 헤인리는 곧바로 마차를 타고 블로든 저택으로 향했다. 퇴근이 이렇게나 즐거울 수 없었다. 저택에 도착한 카르한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향했다.
“왔어요?”
이제는 많이 불러온 배를 감싼 채 일리아가 일어섰다.
“힘들 텐데 누워있으십시오.”
“그래도요.”
카르한은 일리아를 반쯤 강제로 눕힌 후에 책을 집어 들었다. 태교에 좋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이 시간쯤엔 항상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카르한이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자,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나름 목소리에 변주까지 주어서 구연동화를 이어갔다.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일리아는 깜빡 졸았는지 급하게 고개를 바로 했다.
“깜빡 졸았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많이 졸리면 한숨 자는 게 어떻습니까?”
“아까도 낮잠 많이 자서 괜찮아요.”
임신한 후로 일리아는 겨울잠에 들어간 것처럼 잠이 많아졌다. 그 모습까지 사랑스러워서 카르한의 눈꼬리가 잔뜩 휘어졌다. 그런 그의 시선에 아무것도 신지 않은 일리아의 맨발이 들어왔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양말은 신고 있는 게 좋습니다.”
카르한은 몸을 일으켜, 비단 양말을 꺼내왔다. 일리아가 두 발을 뻗자 카르한은 큼직한 손을 꼼질거리며 양말을 신겨주었다. 꼼꼼하게 양말을 신겨준 후에야 카르한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 먹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음, 그럼 과일 좀 먹을래요.”
카르한은 곧장 고용인을 불러, 과일을 가져오라 일러두었다. 고용인이 과일을 가져오자 카르한은 포도를 한 알씩 떼어내 일리아의 입에 넣어주었다. 다람쥐처럼 우물거리는 일리아가 귀여워서 카르한은 막 떼어낸 포도를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많이 먹었어요?”
일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묻자, 카르한은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내며 속삭였다.
“지금보다 더 먹어도 됩니다.”
순식간에 포도 두 송이를 먹어버린 일리아는 배부르다는 표시로 배를 문질렀다. 카르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리아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온몸에 키스비가 내려앉자 일리아는 간지러웠는지 웃음을 흘렸다.
“아……!”
일리아의 외침에 카르한이 우뚝 멈추었다. 카르한은 안절부절못하며 일리아를 살폈다.
“어디가 아픈 겁니까?”
당장 의원을 부를 기세에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싼 채 제 배 쪽으로 당겼다.
“들어봐요.”
배 안에서부터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카르한이 그대로 굳어졌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친 카르한은 감격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카르한은 헛기침을 내뱉은 후에 다시 배에 얼굴을 기댄 채 속삭였다.
“아버지란다.”
고작 한마디 하고서는 더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르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머니 말 잘 듣고.”
일리아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덩치만 커다란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일리아는 카르한을 끌어올려,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제 배에 있는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엄마아빠 사이가 이렇게 좋단다.”
서로에게 기댄 두 사람은 아이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날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정원은 푸릇한 녹음으로 가득 찼다.
그사이 일리아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는데, 의원은 쌍둥이 혹은 세쌍둥이일 거라 진단 내렸다. 카르한이 만났던 점술사가 했던 예언이 들어맞은 것이다.
그 후로 일리아는 먹는 것을 조절해야 했다. 아이가 너무 커버리면 조산할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쑥쑥 커져갔고, 일리아는 이제 방을 나가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호흡도 불편했고 허리가 아파서 잠을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일리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발만 동동거릴 뿐이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 침대에 누워 독서하던 일리아는 책을 내려놓았다.
방금 배에서 태동이 느껴졌다. 아직 쌍둥이일지 세쌍둥이일지는 모르겠지만, 배 속이 비좁은지 요즘 들어 자주 움직였다. 의원은 조산할 확률이 높다며 출산 준비를 미리 해두라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일리아는 걱정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들에게 불안함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배 속의 아이가 다시금 꿈틀거렸다.
일리아는 가볍게 배를 쓰다듬어준 후 고개를 돌려 빈 의자를 응시했다. 최근 들어 저 의자와 한 몸이 된 카르한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공작저로 출근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올 테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었다.
“도대체 분쟁지에 가 있을 땐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깐 낮잠을 잤는데도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아는 스르륵 잠들어버렸다.
***
꿈속에서 일리아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원피스 밑자락이 나부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야……, 여긴 어디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조각구름이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과 초록빛 잔디로 가득 채워진 들판만이 전부였다. 일리아는 뒤늦게 제 품에 안긴 단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난다 싶었더니, 단지에 꿀이 가득했다.
꿀단지를 고쳐 안은 일리아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저 멀리서부터 아장아장 걸어오는 까만 형체가 보였다.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 좀 더 가까워지자 형체가 선명해졌다. 세 마리의 아기 곰이었다.
‘곰이 두 발로 걷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눈앞의 아기 곰들은 두 발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바로 앞에서 멈춰 선 세 마리의 아기 곰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일리아는 제 무릎까지 오는 아기 곰을 물끄러미 보다가 꿀단지를 가리켰다.
-이거 줄까?
아기 곰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일리아는 꿀단지에 들어있던 나무 국자로 꿀을 퍼, 한 마리씩 먹였다. 입가에 꿀을 묻힌 채 냠냠 먹는 곰들을 보며 일리아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더 달라고?
신기하게도 일리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부지런히 꿀을 퍼주었다.
세 마리라서 그런지 먹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꿀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어서 일리아는 곰들이 점점 커져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일리아는 안 되겠다 싶어서 꿀단지를 내려놓았다.
-자, 사이좋게 나눠 먹자.
그러자 아기 곰들이 옹기종기 앉아, 단지에 손을 집어넣어 꿀을 퍼먹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일리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만 해도 무릎까지 오던 곰들이 눈에 띄게 커진 것이다. 정신없이 꿀을 퍼먹던 곰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어느새 일리아의 키를 넘기고 말았다.
-어, 어어?
깜짝 놀란 일리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어느새 아기 곰들은 나무만큼 커져서,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
손바닥보다 작아진 꿀단지를 샅샅이 핥아먹은 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체격 차이에 일리아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일리아가 말했다.
-……이제 없어.
곰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무룩해하는 모습에 일리아는 괜한 말을 덧붙였다.
-우리 집으로 가면 꿀 많은데…… 갈래?
세 마리의 곰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일리아에게 달려들었다.
***
“헉!”
잠에서 깬 일리아는 식은땀을 훔쳤다. 평소에는 꿈을 꿔도 잊어버리는데, 이번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노크와 함께 비올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비올레는 잠깐 멈춰 섰다.
“혹시 자는데 깨운 거니?”
“아니에요. 좀 전에 깼어요.”
비올레는 안도하며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일리아도 꾸물꾸물 일어나 침대 머리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
“제가 들판에 서 있는데…….”
방금 꾼 꿈을 전부 말해주자, 비올레가 웃었다.
“태몽 같은데?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구나.”
비올레의 말에 일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깐 카르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르한이 요즘 뜨개질에 취미를 붙였다고 말해주자 비올레가 웃었다.
“둘이 참 잘 만났구나.”
일리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랑 어떻게 만난 거예요?”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져서요.”
일리아는 비올레와 클리프가 마을 축제에서 첫눈에 반해서 결혼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서로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어,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는지 문득 궁금했다.
“말하자면 좀 길 거야.”
“괜찮아요.”
잠시 회상에 잠긴 비올레는 과거를 되짚어갔다. 대대로 검사를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난 비올레는 어린 나이에 여검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실의에 빠졌다. 아무리 남들보다 뛰어난 공적을 세워도 벽에 가로막힌 듯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표였으나, 여자는 선발 기준에도 들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그녀의 가문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기에, 빨리 결혼하라고 종용하는 상황이었다. 현실주의자인 비올레는 그때부터 검술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중, 마을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올레는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축제에 참가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을 축제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발견했다.
-우리가 돈이 부족해서 그런데, 좀 빌려줄 생각은 없어?
-돈이 없어서 술을 못 마시고 있지 뭐야.
사내 여럿이 한 남자를 둘러싼 채 협박하는 중이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비올레는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저런, 당연히 빌려드려야지요.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정말 돈이 필요한 이에게 빌려주는 것처럼 말똥말똥한 눈으로 돈을 내밀었다.
-오오, 생각보다 훨씬 부자잖아?
-혹시 귀족 아냐?
-귀족이 이런 마을 축제에 올 일이 뭐 있겠어.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던 사내들은 더 큰 탐욕을 부렸다.
-옷이랑 장신구도 전부 내놓고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