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1)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정신 차린 일리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카르한이 우뚝 멈춰 서고, 일리아는 지나가듯 칭찬을 내뱉었다.
“안목이 있으시네요.”
잠시 그는 말이 없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얼어붙은 땅 위로 햇볕이 내려앉은 것처럼 그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웠다. 딱딱한 표정도, 간격이 좁던 미간도 풀어져 있었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카르한의 표정이 평소처럼 되돌아왔다. 하지만 붉어진 귓불은 숨길 수 없었다.
일리아는 생각보다 그에게서 읽어낼 감정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의 옷을 골라주며, 서로의 취향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일단 이걸로 갈아입고 와요.”
일리아는 오늘 고른 옷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냈다. 카르한은 곧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새 옷을 입은 카르한의 모습에 직원들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일리아는 잠시 말없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이상한가요……?”
카르한은 어색한 듯 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상하다뇨, 아무리 봐도 카르한 당신 옷이에요.”
쏟아지는 칭찬에 카르한의 귓불이 다시 붉어졌다. 쑥스러운 듯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잘생긴 얼굴에 옷까지 갖춰 입으니 빛이 났다. 부드러운 색감 덕분에 매서운 인상도 누그러져 보였다.
게다가 그는 항상 품이 넉넉한 옷을 입었는데, 체형에 딱 맞는 옷을 입으니 몸이 부각되어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번은 더 뒤돌아볼 정도였다. 리하트에게도 옷을 많이 사줬지만, 이렇게까지 뿌듯했던 적이 없었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일리아의 반응에 카르한은 안심한 듯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옷은 이제 다 고른 것 같으니 나갈까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빠르게 계산대 앞으로 나섰다.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계산한다고?’
일리아는 정말로 지갑을 꺼내고 있는 카르한을 보고 당황했다. 연애를 시작한 후 리하트는 데이트를 하면서 돈을 먼저 낸 적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일리아가 계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리아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일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사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받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제가 보답하고 싶습니다.”
저번에 사례금을 내밀었다가 일리아가 화냈던 것을 마음에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받을 수 없었다. 왜냐면…….
일리아는 말없이 계산대가 놓인 벽면을 가리켰다. 카르한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벽에는 익숙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블로든 가문의 문장이었다.
“여기 제 가게거든요.”
카르한이 지갑을 떨어뜨렸다. 늘 새로운 반응에 일리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을 텐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속 저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지갑을 주워 그에게 내밀었다.
“앞으로 옷장처럼 쓰세요.”
옷이 필요하면 여기서 입고 나가도 된다고 일리아가 말했다.
“…….”
카르한은 지갑만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는 열심히 포장하던 직원에게 물었다.
“리하트 테르시안이 다녀갔나요?”
“예, 며칠 전에도…….”
직원의 대답에 일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런 짓을 해놓고도 제 가게를 들락날락하다니. 심지어 전부 공짜로 들고 갔을 터였다. 일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앞으로 리하트를 포함해서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은 전원 출입 금지해요.”
그에게 줬던 모든 혜택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
일리아와 카르한이 쇼핑을 하는 동안, 세 남자는 바깥에서 대기했다.
일리아가 자리를 뜨자 주위가 무척이나 조용해졌다. 프란체는 힘껏 테시온을 째려보았다. 아까 테시온이 일리아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일을 마음에 담아둔 것이었다. 소공자의 보좌관이니 차마 뭐라고 하진 못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나 테시온은 프란체를 무시한 채 유리창을 통해 가게만 들여다보았다. 혹시 카르한이 실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 둘 사이에 낀 말렉은 한숨을 삼켰다. 사실 말렉 또한 프란체와 마찬가지로 테시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들끼리 앞으로 계속 엮일 텐데, 아랫사람들 사이가 나빠서 좋을 것은 없었다.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프란체가 배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렉을 불렀다. 말렉의 말에 테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테시온 헤르벤입니다.”
“아가씨의 호위를 맡고 있는 말렉 셰이드입니다.”
말렉은 이름을 밝힌 후 프란체를 힐끗 보았다. 프란체는 입술만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나 테시온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 오히려 프란체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친해질 기미가 전혀 없는 두 사람을 보고 말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말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공자께서는 좋으신 분 같습니다.”
카르한 이야기가 나오자, 테시온은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렇지요? 겉모습만 보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테시온은 카르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 보였다. 카르한을 칭찬하며 가까워지면 되겠다고 말렉은 생각했다. 그때 뚱하니 있던 프란체가 눈치 없이 소리쳤다.
“우리 아가씨도 좋으신 분입니다!”
아니, 너는 왜……. 말렉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프란체를 바라보았다. 프란체는 슬쩍 몸을 틀어, 테시온과 말렉 쪽을 향했다.
“제가 호위 기사로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전부 아가씨 덕분이니까요.”
프란체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폈다.
“검술도 배우게 해주시고 취업까지 시켜주셨습니다!”
말렉은 속으로 헛웃음만 흘렸다. 프란체는 기회만 있으면 일리아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저 말도 이미 백 번은 더 들은 것이었다.
“그러니 누구보다 훌륭하신 분입니다.”
가만히 프란체의 말을 듣던 테시온이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카르한 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십니다.”
테시온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백작 가문의 삼남이며,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술에 딱히 재능이 없는 그는 하루하루 살아남기도 벅찼다.
“죽음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평등했지요.”
부대 하나가 전멸 직전에 이르는 일이 있었다. 다리를 다친 테시온은 동료들이 모두 도망칠 때, 전장 한복판에 홀로 떨어졌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피로 칠갑한 남자가 제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는 그가 자신을 죽일 줄 알았다. 태양을 등진 남자는 마치 사신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테시온을 둘러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타인을 도운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가 살인귀로 유명한 에반테온 소공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문이 어찌 되었든 카르한은 테시온을 구해주었다. 그 후로 테시온은 카르한을 따라다니며 보좌관을 자처했다. 설명을 마친 테시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카르한 님을 평생 따르기로 했습니다!”
테시온의 말에 프란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 아가씨는……!”
프란체는 다시 일리아 칭찬을 시작했고, 테시온도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말렉은 속으로 웃었다. 이럴 때는 죽이 잘 맞았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칭찬 싸움을 하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직원들의 합창과 함께 일리아가 가게를 나왔다. 프란체와 테시온이 목청 높여 떠들어 대는 걸 본 일리아가 멈춰 섰다.
“그사이 친해진 것 같네요?”
“친해지다뇨!”
“절대 아닙니다.”
프란체와 테시온이 곧바로 대답했다. 일리아가 갸웃거리자, 테시온은 곧바로 표정 관리를 했다.
“어쩌다 보니 말려들어서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제 와서 혼자 발을 쏙 빼자, 프란체가 들으라는 듯 혼잣말했다.
“제일 신났으면서…….”
“당신.”
테시온이 프란체를 흘겨보았다. 그 모습에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까만 해도 서로 상종하지 않을 것처럼 굴었는데, 티격태격하면서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다들 배고프지 않아요? 점심 먹을까요?”
모두가 동의하자, 일리아는 이전에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자리에 앉고 남은 이들은 따로 앉았다.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당신이 먹고 싶은 것으로 먼저 선택하세요.”
스스로 결정을 내린 적이 거의 없는 그를 위해, 일리아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줄줄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릇이 놓이니 서로의 취향이 보였다. 일리아는 육식파였고, 카르한은 야채가 들어간 요리를 좋아했다.
‘이런 야채만 먹으면서 몸은 어떻게 유지하는 거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르한이 고기가 담긴 접시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그가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두툼한 고기는 푸딩을 베는 것처럼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카르한이 접시를 일리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먹기 좋게 썰린 고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리아는 잠시 말없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진짜 데이트 하는 것 같네요.”
일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카르한이 멈칫했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거울처럼 일리아를 담았다.
“이런 게 데이트라면……,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열심히 배울 테니, 영애께서 가르쳐주십시오.”
“그럼 이제부터 이름으로 불러줄래요?”
카르한이 집어 들려던 스푼을 놓쳤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일리아는 조금 웃고 말았다.
***
식사를 마친 후, 일리아와 카르한은 가게 몇 군데를 더 들렀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이만 헤어지기로 했다.
일리아가 타고 왔던 마차 앞에 도착했을 때,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괜찮았습니까?”
“나쁘지 않았어요.”
처음엔 고장 난 것처럼 삐걱대더니, 나중엔 그래도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일리아의 반응에 그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제 성격 때문에 영애께서 곤란하셨을까 봐…….”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계약 기간 동안 폐 끼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소심하지만 열정 있는 신입 직원을 보는 기분이었다. 처음 계약할 때만 해도 걱정 많이 했는데, 이 정도면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부족했다.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소극적인 성격도, 자신감 없는 태도도 싹 바꾸고 싶었다.
“바뀔 수 있을 거예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똑바로 보며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앞으로 나도 열심히 도울게요.”
“……예.”
대답을 들은 일리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 최근 산 것 중에서 가장 쓸모없었던 것으로 가져와요. 포장을 뜯지 않았다면 더 좋고요.”
카르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설명해줄게요. 다음에 봐요.”
일리아가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카르한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세 사람이 떠나자,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카르한 님.”
테시온은 카르한을 따라 블로든 가문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블로든 영애는 좋으신 분 같습니다.”
실체를 밝혀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나왔는데, 도리어 일리아에게 설득 당했다. 특히 카르한의 얼굴만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힌 사람은 처음이었다.
테시온은 힐끗 카르한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언뜻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테시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카르한은 흔치 않았다. 이마저도 그와 오랫동안 함께해왔기에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분명 엄청난 성과였다. 테시온은 오늘 나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기겠군요.”
하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에반테온 가문 사람들은 카르한의 변화를 절대 두고만 보지 않을 터였다.
원로들은 지금처럼 카르한이 꼭두각시로 남아주길 바랐다. 부모인 에반테온 공작부부는 카르한에게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원치 않는 약혼을 시켜 카르한을 팔아넘기려 들었다. 수많은 명문가를 제치고 델로타를 선택한 이유도 전부 돈 때문이었다.
테시온의 말에 카르한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내가 부족하니 노력해야지.”
모든 것을 자신 탓으로 돌리는 카르한의 모습에 테시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한은 오랫동안 순응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곪아버린 속이 치료되려면 한참 걸릴 터였다.
“일단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으로 갔으면 하는데.”
카르한의 말에 테시온은 그의 손에 들린 책들을 힐끗 보았다.
온통 분홍색인 표지가 아까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헤어지기 전,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떠넘겨준 책이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사주었나 싶어서, 테시온은 책 제목을 슬쩍 확인했다.
[연애 왕초보, 고수가 되다!] [좋은 연인이 되는 100가지 방법] [칭찬 듣는 데이트 코스]테시온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이 계약 연애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그는 조금 불안해졌다.
***
블로든 백작가에는 회의실로 쓰는 홀이 하나 있었다. 중요한 안건이 오갈 때만 모이는 곳으로, 제법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았다.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고작 세 사람만이 자리를 차지했다. 기다란 테이블의 상석에는 블로든 백작이, 오른편에는 백작부인인 비올레가, 왼편에는 헤인리가 앉았다.
회의실은 장례식장처럼 엄숙했다. 분위기만 보면 가문에 엄청난 위기가 닥친 것처럼 보였다. 긴 침묵을 깨고 장남인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헤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퀴 달린 코르크나무 판 앞에 섰다. 백작과 비올레가 몸을 틀어 헤인리를 보았다. 다들 웃음기 하나 없이 심각한 얼굴이었다.
“오늘 의제는…….”
헤인리가 펜을 꺼내 코르크나무 판에 핀셋으로 고정해둔 종이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일리아의 새로운 남자친구입니다.”
[카르한 에반테온]흰 종이에 적힌 글자에 백작부부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군요.”
“이름만 보고 판단하는 건 편협한 생각인 것 같지만, 이번만큼은 동감해요.”
백작의 중얼거림에 비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인리는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사실 헤인리는 여기서 가장 마지막으로 일리아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부모님이 말해주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리하트와 결혼식을 미룬다는 말은 직접 들었는데, 파혼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제가 조사한 자료입니다. 급하게 조사하느라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헤인리는 종이 뭉치를 백작부부에게 나누어주었다.
백작과 비올레가 종이를 빠르게 검토했다. 대부분은 에반테온 공작가문에 대한 정보였다. 카르한 에반테온에 관한 정보가 많으면 좋았겠지만, 사생활이 베일에 싸여있었다. 특히 후계자가 되기 전은 어디에 갇혀 살았나 싶을 정도로 자료가 거의 없었다.
“제가 보기엔 일반적인 공작가 차남과는 다릅니다. 열넷에 전쟁터에 보내진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차남이라고 한들, 공작 가문의 적자로 태어난 이상 전쟁터에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본인이 자청해서 출전할 수는 있지만, 미치지 않은 이상 스스로 사지에 걸어 들어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헤인리의 의견을 들은 비올레가 손을 들었다.
“내가 알아보기론 장남을 몰아낼 기반을 다지려고 출전했다던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출전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자, 백작이 말을 받았다.
“그저 살육이 좋아서 출전했다던 말도 있더군요.”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다들 에반테온 소공자를 둘러싼 소문은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
-야욕 때문에 형제를 내쫓은 자.
-개차반.
모두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들었던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일리아는 왜 그놈을 좋아하게 된 거지?”
백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회의까지 열었으나, 풀리지 않는 의문만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소공자 얼굴을 본 사람 있어요?”
비올레의 물음에 헤인리와 백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비올레는 두 손을 깍지 껴 테이블에 올렸다. 깍지 낀 손가락 위에 턱을 대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헤어지게 만들어야겠죠?”
“성 한 채 주고 우리 딸과 헤어지라고 할까요?”
백작이 재빠르게 의견을 냈다. 그러자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상대는 에반테온입니다. 우리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그쪽도 충분히 재력이 있을 테죠.”
백작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일리아에게 에반테온 소공자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어떻습니까?”
헤인리의 의견에 비올레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알고 있더라. 그리고 소문만 무성하고 증거가 없으니…….”
비올레가 한숨을 내쉬자, 헤인리는 우중충해진 얼굴로 침묵했다. 그 후로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정 떨어지게 하는 법, 단식 투쟁으로 뜯어 말리기 등등……. 하지만 일리아는 이미 리하트라는 대형 쓰레기를 만난 전적이 있었다. 일리아의 콩깍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온갖 의견이 오가던 중, 조용히 있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일리아에게 헤어지라고 강요했다가 리하트와 재결합하면 어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