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2)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척 나쁜 결말이었다. 얼마나 나쁘냐면 차라리 에반테온 소공자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 정도였다. 침묵 속에서 비올레가 깍지를 풀었다.
“여기서 우리가 결정을 내려봤자, 어찌할 수 없어요.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일리아가 설득한다고 해서 들을 성격이었으면 리하트와 약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올레는 종이 뭉치를 잡고 책상에 툭툭 내리쳤다.
“다만,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직접 확인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혹시 변변찮은 놈이라면 협박을 해서라도 헤어지게 만들자고 눈짓했다. 그녀의 의견에 두 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인리가 정리된 종이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소공자를 한번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백작부부는 헤인리에게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일리아 없는 블로든 가문 회의가 끝났다.
***
아침 식사를 마친 일리아는 홀로 저택에 남았다.
아버지는 몇 주 후에 있을 전시회 준비로 바빴고, 어머니는 사업 때문에 외출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아침 일찍 황궁으로 출근했다.
일리아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제게 온 서신을 전부 분류한 후에 오늘은 무슨 일을 할지 고민에 잠겼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니 날이 무척 좋아 보였다. 새파란 하늘을 부유하는 조각구름을 구경하던 일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후원에서 차라도 마실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리아는 후원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후원 입구에 도착하자, 목련 나무가 보였다. 목련이 잔뜩 심긴 곳을 지나쳐 후원 안으로 쭉 들어가니 등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져 있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등나무 아래를 걸었다. 아직 개화하지 못한 등나무 줄기가 사방에 뻗어나갔다.
걸음을 멈춘 곳에 둥근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일리아가 테이블 앞에 앉자, 고용인이 다기를 준비해주었다. 적당한 온도의 물을 따르자, 꽃차 향기가 은은히 퍼져나갔다.
“향이 좋네.”
일리아의 말에 고용인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는 저번에 찻집을 매입하면서 함께 고용한 직원이었다. 재개발로 가게가 사라진 후, 저택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었다. 비록 귀가 들리지 않지만 차 우려내는 솜씨는 무척 훌륭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하면 입 모양을 보고 알아들어서 의사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요즘 일리아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지금까지는 항상 리하트와 붙어 있었는데, 그와 헤어지고 나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게다가 만날 만한 친구도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리하트와 연관된 이들이었다. 그때도 리하트 때문에 마지못해 어울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마음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사람과의 관계에서 많이 덴 일리아는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번에 리하트 일로 완전히 마음을 닫게 되었다.
‘앞으로 뭘 하지…….’
일리아는 지금까지 미래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테르시안 후작부인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하트와의 결혼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지금부터라도 파혼하고 나면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사실 평범한 영애라면 결혼했을 나이였지만, 리하트 때문에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러다가 혼기를 놓치면 혼자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일리아는 지금까지 깊이 처박아두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업을 이끌어보고 싶어.’
블로든 백작가는 사업으로 성공한 가문이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레 사업에 흥미를 붙였다.
비록 재물운이 무척 좋아 별다른 노력 없이 성공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직접 참여하고 계획하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까지 혼자 이뤄둔 사업이 없었고, 가업은 언젠가 장남인 헤인리가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여러 조건을 보아도 헤인리가 유력한 후계자감이었다. 물론 본인은 사업하기 싫다며 황궁에서 녹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말이다.
‘파혼부터 하고 다시 고민해보자.’
일리아는 차를 마시기 위해 다시 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고용인 하나가 저 멀리서부터 걸어왔다. 두 팔엔 엄청난 크기의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뭐지……?”
누가 제게 선물이라도 보냈나 싶어서 빤히 보는데, 고용인이 멈춰 섰다.
“아가씨, 테르시안 후작가에서 서신과 선물이 왔습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고용인이 서신과 페이퍼나이프를 건네주었다. 일리아는 서신만 받아, 아무렇게나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냈다.
[저번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후작가에 방문해줘. 언제든지 좋으니 기다릴게. 이 꽃은 내 마음이야.]“하.”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사이에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직접 찾아오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걸까.
일리아는 고용인에게서 꽃을 받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닥에 패대기쳤다. 신발로 콱콱 밟으니 예쁘게 담겨 있던 장미꽃이 마구잡이로 으스러졌다. 일리아는 꽃잎이 다 떨어진 꽃다발을 노려보았다.
“내 마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황한 얼굴로 지켜보는 고용인에게 일리아가 말했다.
“소각장에 태워버리렴.”
꽃다발을 소각장으로 보낸 일리아는 리하트에게 직접 찾아오라는 답신을 써서 보냈다.
***
다음 날, 테르시안 저택에서 리하트의 대리인이 왔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대리인은 구구절절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 집어치우고 결론만 말하자면, 블로든 백작 저택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리아는 리하트가 블로든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 왔다가 내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집에 초청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
사실 일리아도 리하트를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괘씸해서 직접 오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럼 날짜를 정하고 밖에서 만나자고 전해줘요.”
어차피 파혼 동의를 얻기 위해 한 번쯤 제대로 만나야 했다. 서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으니, 타협점으로 밖에서 만나자고 통보했다. 리하트는 일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약속 당일이 왔다.
일리아는 완벽하게 치장을 끝냈다. 헤어지고 나서 더 완벽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리아는 침실을 빠져나와 현관으로 내려왔다. 현관 앞에 대기해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인사를 건넸다. 말렉이 마차 문을 열어주자, 일리아가 간이 계단을 밟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놈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들면 나서도 좋아.”
프란체의 두 눈이 번뜩였다. 말의 고삐를 풀어놓는 소리였다. 그래도 보험 들어놓을 구석은 있어야 했다. 괜히 둘이서 만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리하트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후로, 둘이서 제대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상념에 잠긴 사이, 어느새 마차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는데, 마침 맞은편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리하트를 발견했다.
“일리아……!”
눈이 마주치자, 리하트가 재빠르게 달려왔다. 그가 가볍게 일리아를 훑으며 말했다.
“오늘은 저번보다 더 예쁜데?”
일리아가 대꾸하지 않자, 리하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르한이 함께 왔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일리아의 뒤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앞으로 나섰다. 두 명이 동시에 노려보자, 리하트가 움찔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옮겨 찻집으로 들어섰다. 리하트가 뒤따라 들어오자, 일리아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카운터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밀크티 한 잔 주세요. 여기 선불이죠?”
계산을 마친 일리아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리하트는 당혹감에 가득 찬 눈으로 일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산은 항상 일리아의 몫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해진 율법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물어보지도 않고, 제 것만 쏙 계산해버린 것이었다.
일리아가 완전히 자리를 잡자, 리하트는 허둥지둥 주문했다. 그는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인상을 팍 썼다.
마차에서 지갑을 가져와 겨우 계산을 마쳤을 때, 이미 일리아는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다. 리하트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이유는요?”
리하트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눈을 내리깔았다. 아랫입술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자존심 상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리하트가 물었다.
“나와 파혼하겠다니, 진심이야?”
일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종이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파혼 동의서’라는 단어를 본 리하트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어째서…….”
몰라서 묻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리하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그 일 때문에 그래? 아니면 에반테온 소공자 때문이야?”
“둘 다예요.”
일리아의 대답에 그의 안면이 좀 더 구겨졌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이지? 연회에 만나서 첫눈에 반했다는 것도?”
취조에 가까운 물음이 이어졌다. 꽉 쥔 주먹이 떨리는 것을 확인한 일리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믿기 싫으면 말아요. 난 진심이니까.”
“네가 에반테온 소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적어도 당신보다는 잘 아는 것 같은데.’
일리아는 대꾸해주려다가 참았다. 아직까지는 오해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나았다. 소문만 믿고 카르한에게 덤벼들 생각도 못 할 테니 말이다.
리하트는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어깨가 위로 솟았다가 꺼졌다.
“다 알고 있어. 어차피 진짜 좋아서 만나는 것은 아니잖아.”
순간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뭔가 알고 있나 싶어서 귀를 기울이자, 리하트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실은 내가 질투하게 만들려고 만나는 거지?”
‘미친놈인가?’
순간 프란체에게 배운 온갖 욕설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리하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 지금까지 잘 지냈잖아.”
조용히 꺼내는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얽히고, 짙은 붉은색 눈동자에 일리아가 비쳤다.
“세 달 후면 결혼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을 텐데, 이런 일로 우리가 헤어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리하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앞으로 펼쳐졌을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리아가 얼마나 결혼식을 손꼽아 기다려왔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결혼식이 열릴 장소와 초대할 하객들, 신혼여행지……. 일리아는 리하트를 만날 때마다 결혼식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했다.
“우리 남부로 신혼여행 가기로 했잖아. 노을 지는 바다를 보자고 약속했던 거 생각나?”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꺼내자, 일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떨림은 이윽고 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리하트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리아, 너는 내 첫사랑이야.”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사랑을 속삭이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확신했어. 우린 운명이라고.”
리하트는 항상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라 말했다. 일리아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에 빠졌던 그날 리하트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제 목숨을 구해준 그에게 운명을 맡겼다.
“처음 데이트 했던 날 기억나?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식사만 세 시간이나 했잖아. 그리고 우리 꽃놀이 갔을 때…….”
리하트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좋았던 추억을 꺼내놓았다. 그에게 배신당한 후로 내다버렸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앞에 놓였다. 전부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가 내놓은 기억들은 일리아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왜 당신을 좋아했을까?’
배신당했던 그날부터 수천 번 넘게 던져본 질문이었다. 대답할 말은 많았다. 운명이라고 느꼈기에, 제게 다정했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첫 연애였기에, 진심이라고 생각했기에…….
리하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제 목숨을 구해준 후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돈만 보고 알랑대던 이들과는 다른 행보였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많은 일리아는 처음에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리하트는 그들과 달랐기에 점점 끌렸고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
분명 리하트와 함께한 순간은 행복했다. 달콤함에 취해 꿀통에 익사하는 꿀벌처럼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사랑이 마냥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연애할 때와 너무도 달라진 그의 태도. 리하트의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여자들. 가끔 다투었을 때, 그의 눈치를 보던 나날들. 연락이 되지 않아서 혼자 초조해하던 일. 좋아하던 것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들…….
생각해보면 그와 연애하는 동안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행복 아래에 늘어진 불안이란 그림자가 더 크고 깊었기에. 그래서 그날 점술사의 말을 듣고 리하트를 찾아갔는지도 몰랐다.
이제 일리아는 자신이 믿던 행복이 전부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
리하트가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불안했는지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윽고 리하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덤덤하던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일리아는 제게 고개를 숙이는 리하트의 모습에 눈을 깜빡였다. 그가 먼저 사과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바람이 아니라고 우기던 리하트는 결국 용서를 빌었다.
“앞으로 정말 잘할게.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줘, 일리아.”
일리아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반전된 눈높이에, 일리아는 리하트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카락을 살피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리하트가 고개를 들었다. 용서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신 말은 잘 들었으니까, 이제 내가 대답할 차례죠?”
일리아는 테이블에 놓아둔 파혼 동의서를 그의 눈앞에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에 서명하세요.”
“뭐……?”
리하트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일리아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를 위해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여기에 서명하라고요.”
일리아는 손수 펜까지 내밀어주었다. 리하트는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파혼 동의서와 일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원망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미안하다고 했잖아!”
“용서는 내 마음인데 왜 강요해요?”
지금 리하트의 태도는 사과씩이나 했으니, 당연히 받아들여줘야 한다는 것처럼 보였다.
일리아는 조소했다. 만약 그의 부정을 알게 되었던 그날, 리하트가 저를 붙잡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자신은 사랑에 눈이 멀었으니, 어리석게도 리하트가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동안 당신이 나를 찾아와서 용서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일리아는 어리석게도 방 안에 틀어박혔던 기간 동안 하염없이 울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리하트가 저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이 지났을 때는 인정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혹시나 했던 기대는 비참함으로 덧씌워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리하트가 과거를 꺼냈을 때, 좋았던 감정보다 분노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을 짓밟은 사람은 리하트였다.
일리아는 리하트가 좋아하던 상냥한 미소 대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고 이만 서명해요.”
리하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내밀어진 파혼 동의서만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절대 동의 못 해.”
리하트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프란체와 말렉이 일리아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말렉의 경고에 리하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단숨에 손을 뻗은 그가 파혼 동의서를 낚아챘다. 그리고 사정없이 찢어발긴 후 허공에 뿌렸다.
리하트가 이제 어찌할 거냐는 시선을 보냈다. 일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새로운 파혼 동의서를 꺼내들었다. 흔들리는 붉은색 눈동자를 보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서로 더러운 꼴 보기 전에 얌전히 파혼해요.”
일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리하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항상 바르고 고운 말만 하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리하트에게는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사랑 받고 싶어서 착하고 이해심 많은 척해왔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서로 진짜 모습을 모르고 연애한 거네.’
일리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후회할 거야. 사교계에서 소문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알고 있잖아!”
“그래서요?”
리하트는 도리어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리하트는 자존심 때문에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절대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일리아의 새로운 연인은 무려 에반테온 소공작이었다. 앞에서 대놓고 떠들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력이 있는데 그깟 소문이 무슨 상관이람.’
재력과 권력이 있으면 소문쯤이야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것이 사교계였다. 심지어 카르한은 더 나빠질 평판도 없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저와 거래를 맺은 것이었다.
“마음대로 해요. 소문 같은 건 상관없으니까.”
“…….”
“그리고 먼저 바람을 피운 건 당신이잖아요?”
좀 전에 리하트는 일리아에게 용서를 빌었다. 바람을 피웠다고 본인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리하트가 빈정거렸다.
“혼자 깨끗한 척하지 마. 에반테온 소공자도 여자가 있잖아. 결국 너도 바람피우는 거 아니야?”
일리아는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스텔라가 카르한의 스토커이며,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까지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하트는 의기양양해져서 입을 나불댔다.
“에반테온 소공자에게 너는 그저 불장난일 뿐이야.”
금방 버려질 거라며 리하트가 속삭였다.
“일리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전부 정리하고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는…….”
그의 말을 흘려듣던 일리아는 발치에 조각조각 흩어진 파혼 동의서를 내려다보았다. 저것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인다고 해도 원래 형태와 다를 것이다. 자신과 리하트의 관계처럼.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지고 왔던 파혼 동의서를 전부 꺼내서 그에게 뿌렸다.
“뭐 하는 짓이야!”
리하트가 발칵 화를 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보며 일리아가 말했다.
“이 세상에 나랑 당신만 남아도 재결합은 없어요.”
그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다. 리하트가 순순히 파혼을 받아들인다면 자신도 적당한 선에서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하트는 그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동의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동의하게 만들 것이다.
“제발 파혼해달라고 빌게 만들어줄게요.”
“……내가 가만히 두고만 볼 것 같아?”
으르렁거리듯 그가 들끓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리하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황실에 연줄이 있는 제국의 고위 공직자였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라고 한들, 권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리하트보다 더 큰 권력을 등에 업었다. 카르한을 통해 에반테온 공작가문을 끌어들일 예정이니, 제 아무리 테르시안 후작이라 해도 활개 칠 수 없을 터였다.
“마음대로 해요.”
일리아는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마지막 타협은 결렬되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완전히 자리를 뜨기 전 일리아가 멈춰 섰다.
“아참. 계속 소식이 들려와서 하는 말인데……, 내 이름 그만 좀 팔아요.”
일리아는 리하트가 그랬듯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구질구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