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4)
“할 수 있어요. 힘내요.”
일리아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더 이상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카르한이 느릿하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환불하러 왔습니다. 환불하러 왔습니다…….’
몇 번이나 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비장하게 가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는 것을 본 점원들이 합창하듯 인사했다.
쏟아지는 햇빛과 함께 느릿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커다란 체구를 가진 카르한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인사를 건넨 점원들은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그에게서 막 전쟁터에 나가는 듯 흉흉한 기세가 느껴졌다.
교육을 잘 받은 점원들은 크게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나 물밑에서 시선 교환을 하며 누가 접대할 것인지 희생양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중 점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 가게에서 가장 능숙한 접객 실력을 지녔으며, 일주일 전에 카르한에게 물건을 판매했던 점원이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냥한 물음에 카르한이 천천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가게에 들어온 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긴장했는지 가슴팍이 아팠다. 머릿속은 소음으로 가득 차, 정작 하려고 했던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러다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 당황하면 인상 쓰는 버릇이 있어요. 표정 관리에 애써 봐요.
카르한은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애써서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자 상냥하게 웃고 있던 점원이 움찔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본 카르한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당황한 카르한은 버릇처럼 미간을 찌푸리려다가 멈추었다. 그 대신 입꼬리를 조금 올려보았다. 얼굴을 마주한 점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카르한은 빨리 용건을 끝내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르한이 굳게 다물린 입매를 달싹였다. 그러나 환불해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서툰 그에게는 최근 들어 가장 힘든 일이었다.
카르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손님……?”
점원의 부름에 카르한이 눈을 떴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에 점원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리자, 점원이 울먹거렸다. 조금 있으면 무릎 꿇고 사죄할 기세였다.
카르한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묵묵히 서 있었다. 조언이 필요했기에 유리창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밖에 서 있던 일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말렉이 씌워준 양산 아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일리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놀라서 딸꾹질하던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찰나였지만 점원은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카르한을 보았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상대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걷히기엔 충분했다.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환불을…….”
“예!!!”
카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원은 가게가 떠나가라 외쳤다. 뒤이어 점원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화, 환불 사유를 알아야 하는데…….”
“……치수가 맞지 않습니다.”
점원만큼 긴장한 카르한이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럼 다른 치수로 교환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조심스레 제안한 점원은 상자를 풀어 상품을 꺼냈다. 점원이 카르한과 신발을 번갈아 보았다. 누가 봐도 작아 보였다. 이보다 더 큰 치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점원이 말했다.
“……빠르게 환불 도와드리겠습니다.”
환불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상품 금액만큼 돌려줬을 뿐만 아니라, 위로조로 다른 상품도 어마어마하게 챙겨주었다. 다시는 오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된 듯했다.
환불에 성공한 카르한이 가게를 나가버리자, 점원들은 전부 동시에 한숨을 터뜨렸다.
“큰일 나는 줄 알았네. 가게 파괴될 줄 알았어.”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그냥 무섭더라.”
“뒷세계 사람인 줄 알았지 뭐야.”
재잘거리던 이들이 카르한을 접대했던 점원에게 물었다.
“괜찮아?”
다들 위로를 던지자,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진상 손님인 줄 알았는데, 내가 오해한 것 같아.”
카르한의 정중한 말투를 떠올리던 점원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잘 넘어가서 다행이라며 다들 웃는 사이, 누군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쩌지, 나 무슨 일 있을 줄 알고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경비대 불렀거든.”
***
가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리아는 카르한이 나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들어갈 때는 작은 상자 하나만 들고 갔는데, 나올 때는 한 짐 가득이었다.
“……환불하고 새로 샀어요?”
“전부 무료로 받았습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 잠깐 사이 지쳤는지, 그의 어깨가 조금 처져 있었다.
“어땠어요?”
“환불하긴 했는데…….”
카르한은 무척 찝찝해 보였다.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잘했어요. 과정이 어찌 되었든 훌륭하게 성공했는걸요.”
일리아는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그리고 당신이 환불하러 갔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 말에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부수적인 문제였다. 전부 자신감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감은 좀 생겼어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카르한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다음에는 지금보다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큰 산을 하나 넘었으니, 앞으로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면, 주위 사람들도 달리 볼 터였다. 적어도 물건을 강매당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일리아와 카르한은 가게 반경을 벗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날이 좋아서 산책하기에 알맞았다. 슬슬 점심시간이니 식사라도 하면서 지난번에 리하트를 만난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경갑을 갖춘 경비대가 우르르 걸어왔다.
‘뭐지?’
경비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일리아 쪽을 가리키며 다른 경비병들에게 뭐라고 말했다. 다들 일제히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경비병들이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일리아의 뒤에서 걷고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바로 경계했다. 여차하면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일리아는 나서지 말라는 뜻으로 팔을 들어 보였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경비대와 대척할 이유는 없었다.
순식간에 경비병들이 일리아와 카르한을 둘러쌌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경비대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신고 받고 왔습니다.”
“신고요?”
갑자기 웬 신고?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들이 카르한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장이 신고 내용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여기에 폭력 조직 우두머리가 있다는 신고입니다.”
범죄자 의심 신고였다.
경비병의 말에 일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처구니없어서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테시온이 펄펄 날뛰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신고가 들어온 이상, 저희로서는 확인을 해야 하는지라.”
테시온이 역정을 내자, 경비 대장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의심 섞인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카르한을 위아래로 훑던 그가 물었다.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대장 옆을 제외한 경비병들은 이미 칼집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여차하면 칼을 뽑으려는 것이었다. 마치 악당을 상대하는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대장이 턱을 치켜들고 당당히 말했다.
“신분패를 보여주십시오.”
일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경비병들의 태도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허위라도 신고가 들어왔으면 확인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때 대대적인 폭력 단체 소탕 작전이 있었던 만큼, 제국은 암흑세계 조직을 완전히 근절하길 바랐다. 이해는 되지만,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은 듯한 그들의 태도에 열이 뻗쳤다.
신고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사유 없이, 겉모습만 보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끔 보았다. 다들 화가 나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카르한은 차분했다. 환불하는 것보다 이런 상황이 더 익숙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괜히 가슴이 아렸다.
“이분은 나의 상관이시고, 이건 내 신분증입니다!!”
테시온이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거칠게 내밀었다. 대장은 그것을 힐끔 보았다. 테시온의 가문인 헤르벤은 수도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백작가였다. 대장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것으로는 안 됩니다. 본인의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여전히 입장을 고수하던 대장은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눈빛이 흉흉한 것이, 제국의 안전을 위해 꼭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듣다 못한 일리아가 나섰다.
“당신들 입장이 이해 가지만, 벌써부터 범죄자 취급하니 기분이 좋지 않네요.”
그러자 대장이 고압적인 시선으로 일리아를 훑었다. 잘사는 귀족 가문 아가씨라고 판단 내렸는지, 경비 대장이 말했다.
“공무 집행 중이니, 아가씨는 나서지 마십시오. 괜히 귀족 아가씨가 흠 잡힐 일이 생기면 되겠습니까?”
그는 걱정하는 척 경고를 내뱉었다. 불쾌해진 일리아가 비뚤게 미소 지었다.
“경비 대장님도 조심하셔야겠어요. 하루아침에 봉급이 삭감될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에 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경비대는 기본적으로 녹봉을 받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서 귀족에게 기부금을 받았다. 황실 기사단 관리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기 때문에, 황실에서도 기부금을 용인해주었다.
그리고 블로든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후원금을 내고 있었다.
“어느 집 아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가씨 댁 후원금이 없어도 제 봉급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겁니다.”
경비대를 후원하는 귀족 가문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며, 대장이 불쾌한 티를 팍팍 냈다.
팽팽하던 기류는 험악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심기가 불편해진 프란체가 칼집을 달칵거렸다. 거슬리는 소리에, 경비병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칼집에 새겨진 문장을 본 경비병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황급히 대장에게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했다.
“블로든……?”
대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경비병들의 눈에 동요가 서렸다. 제국에서 블로든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경비 대장이 다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블로든 가문의 상징인, 환한 금발을 확인한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저어……, 블로든 가문 영애십니까?”
대장이 조심스레 묻자, 일리아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에 대장이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뻣뻣하게 굴던 대장과 경비병들이 쩔쩔매며 눈치 보기 시작했다.
봉급 삭감이고 뭐고, 블로든 가문에서 정식으로 항의하면 평민인 이들은 직장에서 잘릴 수 있었다. 일리아는 이때다 싶어, 우두커니 서 있던 카르한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카르한, 많이 속상하죠?”
경비병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르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렇게 흉흉하게 생긴 사람이라면 딱 한 명뿐일 터였다.
카르한 에반테온. 요즘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이자, 온갖 소문을 두르고 다니는 소공자였다.
경비병들의 얼굴이 아예 탈색되어버렸다. 에반테온 가문은 황실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쥔 공작 가문이었다. 이제는 직장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할 때인 것이었다.
일리아는 경비병들을 힐끗 봐준 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체념으로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를 보니 속이 탔다.
기껏 자신감을 좀 올려뒀더니……. 무덤덤해 보였지만, 분명 속이 쓰라릴 터였다. 일리아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물었다.
“다들 소공자께서 상처 받으신 거 안 보이나요?”
“……?”
일리아가 진심으로 외치자, 경비병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카르한을 힐끔댔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엔 상처 받기는커녕 상처 입힐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고 소리쳤다.
“법 없이도 사실 분인데!”
테시온과 프란체와 말렉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병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조용히 있던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자, 경비병들이 술렁였다. 진짠가? 아니, 그래도 그건 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해요?”
일리아가 되묻자, 대장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대장의 깍듯한 인사와 함께 경비병들도 예를 갖추었다.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낙인찍지 않아줬으면 좋겠어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가요, 카르한.”
일리아는 곧바로 카르한의 팔을 끌어당겼다. 카르한이 뒤늦게 반응했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일리아의 손에 붙들린 팔에 꽂혀 있었다. 경비병들과 멀어지자, 일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기분 나빴죠?”
잠시 말이 없던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장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막 수도로 귀환했을 때는 이보다 더 심했습니다.”
기운을 억누르지 못해서 흉악 범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그가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히 과거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괜찮았습니다.”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괜히 가슴이 아렸다. 카르한을 보다 보면 동정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도와줄게요.”
“예.”
카르한의 대답에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뾰족하던 얼음 조각이 녹아 둥근 눈송이가 된 것처럼 이전에 비해 표정이 부드러워 보였다. 정말 보기 드문 착한 남자인데, 왜 그렇게 오해를 하는지.
“해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 일단 식사라도 하러 가요.”
일리아가 카르한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앞서가고, 뒤따르던 테시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영애께서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러자 프란체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듯 치켜 올라갔다. 그것 보라는 듯 프란체가 말했다.
“제가 뭐랬습니까. 우리 아가씨가 최고입니다.”
***
한 남자가 벽에 딱 달라붙어서 몸을 숨겼다. 수상쩍은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전부 무시한 그는 한곳만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는 일리아와 에반테온 소공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미행하는 남자는 헤인리 블로든으로, 그는 귀한 휴가까지 사용하여 일리아를 따라 나왔다. 블로든 가문 회의에서 지령 받은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군.”
처음에는 에반테온 소공자를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얼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뚜렷한 특징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인리는 곧바로 에반테온 소공자를 발견했다. 소나무처럼 우뚝 솟은 저 남자가 틀림없었다. 멀리서 봐도 강렬한 인상이라 그런지 유독 눈에 띄었다.
헤인리는 유심히 카르한을 살폈다. 세상의 어둠을 모두 끌어온 듯한 검은 머리카락,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와 짙은 눈썹, 단단한 체구……. 프란체의 어법을 빌리자면, 싸가지 없게 생긴 얼굴이었다.
흉흉한 분위기를 걷어내면 잘생긴 얼굴인데, 이미 편견으로 휩싸인 눈은 단점만 찾고 있었다.
‘그래도 겉모습만 보면 리하트 놈보다는 낫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헤인리는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면접관이라도 된 것처럼 더욱 엄격하게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이동하자, 헤인리는 벽에서 몸을 떼어내고 쫓아갔다.
두 사람은 어느 가게 앞에 도착했다. 남성 신발 전문점이었다. 그리고 카르한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기 물건 사는데, 내 동생을 밖에서 대기시켜?”
햇볕이 이렇게 뜨거운데 일리아를 방치해두는 행태에, 헤인리는 이를 갈았다. 어떤 이유이든 좋게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한이 가게에서 나왔다. 제대로 쇼핑했는지 손에 짐이 한가득이었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헤인리는 대화를 듣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저 멀리서 경비병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사건이라도 터졌나?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고 신고했는지도 몰랐다.
헤인리가 급하게 몸을 숨기는데, 경비병들이 가는 방향이 이상했다. 순식간에 경비병들이 일리아와 카르한 주위를 에워쌌다. 그것을 본 헤인리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사이 범법 행위까지 저지른 모양이구나……!’
갑자기 리하트와 우위를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일리아의 남자 보는 눈은 역시 최악이었다.
***
일리아와 카르한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간단히 점심 식사를 끝낸 후, 차를 주문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제 약혼자를 만났어요.”
일리아는 어쩌다가 리하트를 만나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파혼해달라고 했지만, 예상대로 거부하더군요.”
리하트에게 자신은 물주였다. 그것도 돈이 끊이지 않는 황금단지였다. 그러니 그가 순순히 파혼해줄 리 없었다.
사실 약혼은 결혼과 달리 법적인 제재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명백히 한쪽의 잘못으로 약혼 관계가 파탄 날 경우에도, 위자료를 지불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약혼식 때 작성한 서약서가 관청에 보관되기 때문에, 파혼 동의서를 받지 못하면 약혼 상태가 유지된다. 다른 누구와도 약혼하거나 결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은 합의를 거쳐 파혼하지만, 가끔씩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는 재판을 받는데, 소송 과정이 길어서 몇 년씩 걸리곤 했다.
“지긋지긋한 자식.”
일리아의 혼잣말에 카르한이 움찔했다. 괜히 눈치를 보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쪽에서 방해 공작이 들어올 거예요. 우리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겠죠.”
리하트는 치졸하고 오만한 놈이었다. 카르한만 치우면 다시 재결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사이를 공고히 하면 좋겠어요.”
리하트 입장에서는 카르한의 눈치가 보이니 마구잡이로 날뛸 수는 없을 것이다. 그사이 일리아는 리하트가 파혼할 수밖에 없도록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그를 궁지까지 몰아넣을 만한, 그런 계획 말이다.
“가족들에게 당신에 대해 말해뒀어요.”
“반대하지는 않으십니까?”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알고 있는 카르한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뭐……, 괜찮아요.”
리하트를 격렬하게 반대했던 가족들은 도리어 카르한에 대해서는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가 좀 반대하시긴 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