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5)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을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무척 미안했으나, 계약 연애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기로 한 것이 조건이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오래 유지되는 법이었다. 이미 보좌관과 호위 기사들이 알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말을 조심해야 했다.
“당신은 저에 대해 가족들에게 말씀드렸어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은 침묵했다.
“슬슬 말하는 게 좋을 텐데요.”
카르한과 스텔라 델로타는 집안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저번에 듣기로 카르한은 모르고 있다가 약혼 상대를 통보받았다고 한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약혼식 날짜를 잡을지도 몰랐다.
“……적당히 시기를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물 먹은 솜처럼 축 가라앉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궁금하긴 하나, 가족사는 예민한 문제니 먼저 말해줄 때까지 캐묻고 싶지 않았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다음에 만날 때는 거절하는 연습을 해봐요.”
확실히 거절할 수 있게 되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게를 나왔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은 먹구름 사이로 숨어버리고, 굵직한 빗줄기가 달아오른 대지를 식혔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물안개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탄식했다. 헤인리의 말을 듣고 우산을 챙겨 오긴 했는데, 바보같이 마차에 두고 왔다. 아까 날씨가 좋았던 탓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잠시 가게 차양 아래에 섰다. 비는 쉬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사람들도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갔는지, 거리는 한적했다.
“……잠시만 계십시오.”
카르한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그가 어쩌지 싶은 얼굴로 말했다.
“하나밖에 없다고…….”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한이 먼저 나서서 빌려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잘했어요.”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의 뾰족한 눈매가 조금 허물어졌다.
“제가 우산 사오겠습니다!”
프란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우산 하나로 다섯 사람이 쓰기엔 한참 부족했다. 프란체는 카르한이 가져온 우산을 쓰고 빗속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돌아왔다.
“……겨우 하나 사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소낙비 때문에 우산이 금방 동난 모양이었다.
마차까지 왔다 갔다 하기는 거리가 제법 있고……. 일리아는 우산 두 개를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그러자 말렉이 눈치 빠르게 테시온과 프란체의 어깨를 잡았다.
“저희끼리 함께 쓰겠습니다!”
그는 사명감을 지닌 사람처럼 어딘가 비장해 보였다.
“다들 괜찮겠어요?”
일리아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 큰 세 남자가 옹기종기 모여서 우산을 펼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아가 카르한의 옆에 바싹 붙었다.
“같이 쓰고 가야겠네요.”
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산이 펼쳐졌다.
“제가 들겠습니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지라, 그편이 나을 듯했다. 카르한이 우산을 건네받았다. 그의 손에 들리자 우산이 작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몸을 맞붙인 채 빗속으로 나아갔다.
투두두둑, 머리 위에서 시원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찰박찰박 물방울을 튕기며 일리아와 카르한은 걸음을 맞춰 앞으로 걸어갔다. 최대한 밀착하다 보니, 어깨 부분에 긴장해서 팽팽해진 그의 팔이 느껴졌다.
대지를 식히는 차가운 빗속에서도 그의 몸은 따뜻했다. 쌀쌀해서 솜털이 일어나는 와중에, 맞닿은 부분에만 온기가 느껴졌다.
빗속을 한참 걸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치맛단을 빼고는 거의 젖지 않았다. 일리아는 카르한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잔뜩 젖어서 옷이 딱 달라붙은 그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저와 맞닿은 부분만 젖지 않았을 뿐이지, 영락없이 물에 빠진 모습이었다. 놀란 일리아가 제 쪽으로 기울어진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카르한, 당신 다 젖었어요.”
“괜찮습니다.”
앞만 묵묵히 응시하던 그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사위는 온통 물안개 때문에 흐릿한데, 그의 눈동자만큼은 선명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순간 일리아는 자신이 카르한의 눈동자에 잠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이미 젖었으니, 써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감기가 잘 들지 않는 체질이니까요.”
괜히 미안해진 일리아는 머뭇거리다가 좀 더 옆으로 붙었다.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카르한의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마차가 세워진 골목 어귀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드디어 마차 앞까지 도착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계속 우산을 씌워주었다. 결국 그는 우산을 쓴 보람이 없을 정도로 흠뻑 젖고 말았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만 편하게 와버렸네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젖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카르한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일리아.”
일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으로 먼저 이름을 불러줬네요.”
비온 뒤 무지개가 뜨듯 일리아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환한 미소에 카르한은 잠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역시 연습하니까 되죠?”
“……예.”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 말과 함께 마차 문이 닫혔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빗줄기를 뚫고 마차는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멀어지는 마차를 눈으로 좇던 카르한은 따끔거리는 가슴팍을 문질렀다. 망치질하듯 사방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뚫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카르한 님. 가시지요.”
테시온의 말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카르한이 걸음을 뗐다. 마차에 올라탄 카르한은 테시온이 건네준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잔뜩 젖어버린 옷을 벗었다.
셔츠까지 모두 벗고 나자, 꼭꼭 숨겨진 피부가 드러났다. 근육으로 꽉 찬 몸에는 상흔이 가득했다. 가벼운 생채기부터 생사를 오간 흔적까지 흉터가 여럿이었다.
테시온이 건넨 옷으로 갈아입은 카르한은 천천히 창가에 고개를 기댔다. 고작 반나절이었는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난도가 너무 높은 환불도 경험해보고, 경비병과 실랑이도 했다.
신분패를 보여줄 필요도 없이 경비병들이 물러난 것은 처음이었다. 일리아를 만난 후로는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변화하는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을지 기대되었다. 즐겁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일리아가 해준 칭찬을 곱씹던 카르한은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가슴께를 둥둥 울렸다. 통증은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데,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카르한의 중얼거림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테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가 저를 위해 이렇게나 열심히 도와주는데, 정작 자신은 해줄 것이 없었다. 심지어 계약 연애조차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제대로 해야 할 텐데.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카르한은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일리아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자신은 에반테온 후계자지만,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매번 일리아를 만나러 갈 때마다 솔직하게 말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음으로 미루곤 했다.
혓바닥을 굴러다니던 가시는 어느새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 방치했을 뿐이었는데, 점점 깊숙이 파고들어 괴로웠다.
“내가 도움이 될까?”
“카르한 님…….”
테시온이 조용히 카르한을 불렀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누가 뭐라고 한들 에반테온의 후계자는 카르한 님이십니다.”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테시온은 뭐라고 응원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공작의 후계자지만, 후계자 수업조차 받지 못한 임시직에 불과했다. 공작부부와 일부 원로들이 생각하는 진짜 후계자는…….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
창문을 통해 점점 가까워지는 에반테온 저택이 보였다. 거대한 대저택은 한 마리의 웅크린 짐승 같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카르한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물에 잠긴 듯 숨통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세상을 삼킬 듯 거센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고 카르한이 문을 열었다. 축축하게 젖은 땅을 밟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딘가 낯익은 마차가 보였다. 그 마차 또한 방금 도착했는지, 마부가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카르한은 계단을 밟고 내리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깨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에반테온!”
카르한은 가만히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것인가 했지만, 정말로 스텔라 델로타였다.
“에반테온, 외출하고 오는 길이에요?”
스텔라가 카르한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어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은 방문객을 받지 않는 저녁 시간이었고, 스텔라가 방문한다는 언질조차 받지 못했다. 요즘 불쑥불쑥 찾아오는 일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스텔라가 불편했다. 그녀의 끝없는 집착은 저를 감싸오는 거미줄 같았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기분에 몇 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전부 무시당했다. 그리고 그녀를 꺼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카르한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자, 스텔라가 움찔했다. 그러나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도리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도 오는데, 날 여기에 세워둘 생각이에요?”
보다 못한 테시온이 나섰다.
“저녁이니, 다음에 방문 의사를 밝히고 찾아오십시오.”
“내가 뭐 못 올 곳 왔나요? 그렇게 늦지도 않았잖아요.”
아직 초저녁이라며 스텔라가 도리어 불쾌해했다. 그녀는 테시온을 무시한 채 카르한에게 칭얼댔다.
“다리가 아파요. 일단 들어가요.”
카르한은 이러다가 기껏 갈아입은 옷이 젖을 것 같아, 걸음을 뗐다. 스텔라는 우산을 씌워주는 고용인과 함께 카르한을 뒤따랐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카르한은 현관문을 등진 채 스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직한 목소리에 스텔라가 멈칫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카르한은 한층 서늘해 보였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읽었던 수많은 연애 소설이 스쳐지나갔다.
스텔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말려들면 조연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기죽지 않는 당당한 여주인공만이 나쁜 남자를 쟁취할 수 있는 법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를 찾아온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스텔라는 카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이할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에 스텔라의 얼굴이 비쳤다.
“당신이 블로든 영애와 함께 외출했다는 이야기요.”
찰나의 순간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스텔라가 물었다.
“거짓말이죠?”
단단히 다물린 입매에 틈이 생겼다. 카르한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스텔라가 눈을 부릅떴다. 카르한은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을 내뱉었다.
“저는 블로든 영애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차분히 내뱉은 목소리와 달리, 카르한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말을 내뱉고 나니 다음 말은 수월하게 나왔다.
“영애께는 미안하지만, 약혼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에반테온!!”
뒤늦게 정신 차린 스텔라가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
“왜 하필 그 계집애예요!!”
일리아를 비난하는 어투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스텔라는 주춤했으나, 저번과 달리 물러서진 않았다.
“이미 공작부부께선 저를 받아들이셨어요. 이야기가 끝났다고요!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는데, 어떻게……!”
원망의 화살이 날아들자,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전이었다면 싸우고 싶지 않아서 먼저 꺾였을 것이다. 침묵하고 상대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텔라와 약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건 자신의 의지였다. 처음 스스로 내린 결정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카르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깨를 바들바들 떨던 스텔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에요?”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면…….”
“이게 무슨 소란이냐.”
대화를 비집고 들어온 낯선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열린 현관문으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허리까지 덮는 숄을 걸친 그녀는 램프를 든 고용인을 양옆에 대동한 채였다.
“에, 에반테온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당황한 스텔라가 인사를 건넸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카르한이 뒤늦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녀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스텔라에게 말을 걸었다.
“델로타 영애는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요?”
“공작부인…….”
스텔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공작부인을 불렀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그녀는 흐느끼는 척했다.
“소공자께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그 말에 에반테온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카르한에게 눈길을 보냈다. 얼어붙은 시선에, 혓바닥까지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카르한이 스텔라를 꺼렸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스텔라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에반테온 공작부인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녀의 집착이 버거워서 피해 다니면 공작부인을 찾아가 하소연하곤 했다. 그리고 스텔라는 그 방법이 무엇보다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거 참……. 나 또한 몰랐던 일이군요.”
공작부인은 카르한을 아래위로 찬찬히 훑더니, 다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교육해둘 테니, 영애는 안심하고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하지만.”
스텔라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 자리에서 카르한에게서 확답을 받고 싶었다. 다시는 일리아 블로든을 만나지 않겠다는.
“델로타 영애.”
공작부인의 부름에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인자했으나, 지금은 왠지 소름끼쳤다.
“지금부터는 가족사이니, 그만 가주세요.”
권유에서 명령으로 바뀐 말투에 스텔라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스텔라는 현관 계단을 내려오며, 카르한을 힐끔거렸다.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왠지 창백해 보였다.
스텔라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여기서 잘못한 것은 카르한이었다. 자신을 두고 감히 일리아 블로든을 만날 줄이야.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스텔라는 공작부인이 그를 제대로 훈계해주길 바라며, 마차에 올라탔다.
델로타 가문 마차가 출발하고, 현관에는 다섯 사람만 남았다. 카르한, 테시온, 공작부인 그리고 고용인 두 명. 숄을 걸친 채 가볍게 팔짱을 끼고 있던 공작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이니?”
굳어졌던 혀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예.”
그 순간, 손이 날아왔다. 빗소리를 헤집고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똑바로 하라고 했지?”
카르한은 시선을 떨구었다. 공작부인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주 나쁜 아이구나. 집안 망신이나 시키고 말이야.”
“공작부인……!”
놀라서 숨을 들이켰던 테시온이 다급히 공작부인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테시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카르한의 권속인 테시온은 그녀에게 개만도 못한 존재였다.
“네 형만큼은 바라지도 않으니 처신 잘해라.”
그 말을 남기고, 공작부인은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램프를 든 고용인들까지 들어가자,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비 내리는 어둠 속에서 카르한은 가만히 서 있었다.
“카르한 님.”
테시온이 안절부절못하며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고 굳게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고작 문 하나인데, 완전히 단절된 것 같았다. 이 집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따끔거리는 감각에 카르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에게 맞은 뺨이 아니라, 속이 아팠다. 어머니의 뾰족한 힐난은 카르한의 가슴을 몇 번이고 저미었다. 이제 덤덤하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물안개처럼 잠깐 흐려졌던 표정이 되돌아왔다. 카르한은 직접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테시온은 카르한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작부인은 여전히 장남만을 귀애했다.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쫓겨났는데도, 그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남이 다시 돌아와 공작가 후계자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카르한은 그저 이용될 뿐이었다. 장남이 저지른 일을 뒷수습하기 위해 원치 않은 사람과 약혼해야 했다. 같은 친자식인데 어쩜 그럴 수 있는지. 자신이 직접 본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분명 숨겨진 일도 수두룩할 터였다.
테시온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카르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헤인리는 일리아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리자, 저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보였다. 아무래도 얌전히 기다리기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후다닥 계단을 내려온 두 사람이 헤인리를 붙들고 물었다.
“어땠니?”
“얼굴은 봤고?”
헤인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세 사람은 빠르게 응접실로 향했다. 곰처럼 덩치 큰 블로든 백작이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백작부부가 대답만을 기다리자,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렸다.
“소문대로 위험한 남자인 것 같습니다.”
헤인리는 자신이 본 것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 잠깐 사이에 경비병들이 출동해서 소공자를 둘러싸더군요.”
거리가 있었던 탓에 대화는 듣지 못했다. 헤인리가 일리아라도 구하기 위해 개입하려는 순간, 경비병들이 모두 물러섰다. 다들 안색이 푸르죽죽한 것이 몇 대 맞은 것 같았다.
법보다 폭력인가! 헤인리는 제 눈을 의심했다. 좀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식당에 들어가 버렸다.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했으나, 비가 오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괜히 그런 소문이 도는 게 아닌 듯합니다.”
다들 근심 어린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이제 나쁜 남자가 취향인가?”
비올레가 중얼거렸다.
“부인, 리하트 그놈도 나쁜 놈이었는걸요.”
“그것도 그렇네요.”
백작이 한마디 거들자, 비올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일리아가 에반테온 소공자와 교제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일리아를 불러서 직접 묻는 게 좋겠어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비올레가 비장하게 말했다.
“오늘은 다 함께 저녁을 먹도록 하죠.”
저녁 식사 시간에 결판을 내야겠다고, 그녀가 다짐했다.
***
집에 돌아온 일리아는 곧바로 옷을 벗었다. 비는 거의 맞지 않았지만, 습기 때문에 눅눅했다.
고용인이 장미 석영으로 만들어진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워 넣었다. 이전에 서부 광산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장미 석영이 채굴되어 화제가 되었다. 워낙 고품질의 원석이라 다들 어디에 쓰일지 궁금해했는데, 결국 일리아의 욕조가 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호화로운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 장미 꽃잎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욕실에서도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역시 집이 최고야.”